## 629화
모스크바의 모든 매체에선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비춰지는 예카테리나나 막심 선배들의 모습만 보더라도 지금 얼마나 바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쉽게 짐작이 갈 정도였다.
게다가 두 사람은 어젠 자르야드예 콘서트홀에서 갈라쇼 무대에도 올랐고, 지금은 마린스키 극장에서 열리는 2차 갈라쇼를 위해 비행기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중이었다.
빡빡한 일정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소화해 낼 수 있어야 했다. 앞으로도 우승자들은 전 세계를 돌며 콩쿠르 위원회가 주최하는 투어 콘서트를 하게 될 테니, 그 후로도 프로 연주자로서 연주회 일정을 잡다 보면 매일 비행기를 타고 왔다 갔다 해야 하는 하드한 일정은 당연한 일처럼 따라붙는다.
이제 모두들 국제적인 연주자가 되기 위한 첫 발을 떼었다고 할 수 있었다.
“…….”
난 느긋하게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와 내 옆을 맴돌다가 나갔다. 습관처럼 건반을 만지작거리며 상념에 잠겼다.
국제적인 큰 대회는 문제없이 마무리되었고, 내가 응원하던 사람들은 좋은 결과를 얻었다. 어제 친구들과 함께 보았던 갈라쇼에서 예카테리나와 막심 선배, 그리고 니콜라이 선배는 모두 화려하게 돋보이고 있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을까. 순수한 기쁨으로 난 그들 모두를 축복하고 싶다.
그리고 동시에, 막연하게 느껴지던 내 순서도 발치에 와 있음을 느낀다.
열일곱 살까지 반년도 안 남았다. 2년 전엔 그저 멀게만 느껴지는 먼 미래였는데, 이젠 정말 현실감 있게 다가와 있었다.
물론 열일곱이 되자마자 무언가 획기적으로 바뀌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 여전히 면허를 따거나 음주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애매한 성인의 나이일 테니.
하지만 국제 콩쿠르에 나갈 수 있고, 음악원 진학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어느 때보다 중요한 나이였다.
난 거기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을까.
“?”
멍하니 건반을 가지고 놀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리처드였다. 간만의 전화라 반갑게 받았다.
“아, 리처드?”
- 좋은 아침. 타티아나.
지금 리처드는 모스크바에 없다. 난 웃으며 물어보았다.
“전 어떻게 인사드리면 될까요?”
- 여긴 오후 4시네. 이제 좋은 하루 보냈냐는 말을 들어야 할 시간이지.
“좋은 하루 보내셨나요?”
- 어제 새벽 늦게까지 갈라쇼 보느라 잠도 부족한데 아침부터 끌려 다녀서 죽을 것 같아.
“아하하하. 비즈니스 중이신가요?”
방학 시작 전에 듣기로, 리처드는 일단 영국의 본가에 돌아갔다가, 개인적인 비즈니스 용무로 또 다른 나라에 갈 예정이라 했었다. 나랑 같은 나이인데도 시야가 넓고 행동력도 남달랐다.
그는 음악가로서 진지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사업가로서 성공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방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있는 건 성미에 안 맞는다고 했던가…….
궁극적으로는 음악계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한데 그건 너무 먼 미래의 일이라 제대로 물어볼 수 없었다. 나도 그렇듯 그 역시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는 타입이었으니까.
아무튼 그런 이유로 바쁘게 돌아다니는 와중에 갈라쇼까지 챙겨 보았나 싶어 물어봤는데, 리처드는 뜻밖의 답을 해 주었다.
- 며칠 전까진. 지금은 한국에 와 있어.
“예?”
- 한승우가 혼자 있다잖아. 그래서 놀아 주러 왔지.
“아…….”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유학생 두 사람은 영어로 소통할 때부터 친하게 지냈었으니까.
중앙음악학교에 다니지 못할 뻔했던 한승우가 용케 잘 다니게 된 일을 리처드가 흥미롭게 여기고 도와주게 된 것 같지만, 그 후로도 쭉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건 한승우 역시 친구로서 부담 없고 좋은 사람이었던 덕분이었다.
이후 리처드가 한승우가 온 나라에도 흥미를 가지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분명 언젠간 있었을 여행이었다.
- 아, 그래. 임세연도 만났고.
그런데 이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난 깜짝 놀라 말을 잊었다. 그렇다면 세 사람이 만나서 놀았다는 건가? 아니면 잠깐 만나서 이야기 정도만? 혹시 지금도 다 같이 있는 거야?
그렇게 멀리 있는 상황에 대해 복잡하게 생각하다 보니 스스로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세연과 접점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 경계하고 있지?
어차피 저번 리사이틀 때 세 사람이 인사를 나누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는 방학에 만날 수 있는 건 세 사람의 자유였다. 내가 깊게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생각을 갈무리하며 숨을 고르자 리처드가 물었다.
- 별로 안 놀라네? 난 신기했는데.
“놀랐어요. 그렇지만 세상이 좁다는 건 잘 아시잖아요?”
- 세상 좁지.
그는 킥 하고 짧게 웃으며 말했다.
- 하지만 충분히 넓기도 해.
그 목소리엔 희미한 열기가 실려 있었다.
이젠 비행기로 전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는 시대이지만, 그렇게 전 세계의 모든 나라와 문화에 대해 알기엔 인간의 수명이 짧다. 리처드는 그런 부분을 짚어 주고 있었다.
난 그가 만족한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떠신가요?”
- 뭐가?
“그냥…… 전부요.”
- 다 좋은데?
리처드가 특유의 시니컬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선히 그려졌다. 겪어 보니 이것도 괜찮은 것 같다는 어투.
하지만 그는 투덜거리기도 했다.
- 한승우가 매일같이 이상한 것들을 사 와서 먹이려는 짓만 하지 않았으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아하하, 그 애가 자꾸 괴롭히나요?”
- 이젠 임세연과 합작해선 두 배로 더 신났다니까? 미치겠어.
당장 떠나고 싶다는 투로 말하고 있긴 하지만 내심 즐거워하고 있음이 충분히 느껴졌다. 하지만 그 점을 이야기하면 되레 더 화를 낼 것 같아서 나도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리처드는 나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개략적으로 이야기해 주고는, 짤막히 덧붙였다.
- 아무튼 임세연 말이야, 꽤 재밌는 애더라.
“……그래요?”
-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아?
난 스마트폰을 쥔 손을 움찔했다.
리처드가 보기엔 그리 보일지도 모르겠다. 난 세연을 리사이틀에 초대하기도 했었으니까. 재미가 무엇을 말하는진 몰라도, 관심의 일종이라면 그녀에 대한 관심이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굳이 따지자면 세상에서 세연에게 가장 관심이 많은 사람 중 한 명에 가깝겠지.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조심스러워해야 하는 나로선 표현을 삼갈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 말이 조금 이상했나? 아무튼 그렇게 느끼고 있진 않나 보네.
내가 대화를 피하고 싶어 한다는 걸 느꼈는지 리처드 역시 말을 줄였다. 그와 나는 필요 이상으로 서로를 탐색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낮게 웃더니 다시 말했다.
- 아무튼 알았어. 음…… 또 부르네. 망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하는 갈라쇼 보려면 이번엔 정말 꼭두새벽인데. 그때까지 버틸 생각인가 봐.
“피곤하시면 일찍 주무시는 게…….”
- 내가 질 것 같아?
무슨 내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리처드는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걸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 끝까지 깨서 다 지켜봐야지.
그곳에선 새벽 3시가 넘어야 시작하게 될 텐데…… 괜찮을는지 모르겠다. 저렇게 열의를 불태우고 있는 걸 보니 오늘 새벽에도 리처드는 밤새 갈라쇼를 보고 피곤하게 될 운명인 것 같다.
“…….”
그렇게 짧은 통화를 마치고 스마트폰을 내려놓자 방금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다시 스쳐 지나갔다.
세상은 적당히 넓었다. 만나고 싶은 친구가 있다면 멀리 있어도 비행기를 타고 갈 수 있고, 시차가 있어도 통화를 할 수 있으며 같은 무대를 보고 즐길 수 있을 정도로.
그럼 가까이에 있는 친구들을 또 만나지 못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난 고개를 들고 연습실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혼자 쓰기엔 너무 큰 홈시어터가 연습실의 벽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차피 오늘 저녁엔 각자 집에서 2차 갈라쇼를 보고 있게 될 텐데, 그렇다면 모두 초대해서 여기 있는 홈시어터로 보는 게 좋지 않나 싶다.
2차 갈라쇼의 프로그램도 상당히 기대할 부분이 많았으므로 다 같이 보고 감상을 나누면 더 만족스러울 것임이 분명했다. 시간이 늦긴 하지만 집에 데려다줄 수도 있고, 아니면 자고 가도 괜찮으니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마지막 축제를 모두와 보내고 싶었다. 난 전화를 들고 아나스타샤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 오늘? 그럴까?
저녁 식사 초대와 9시 즈음에 시작될 갈라쇼 관람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그녀는 흔쾌히 답했다. 이어서 발렌티나에게도 단번에 승낙을 얻어 냈다.
모스크바에 있는 아나톨리와 류보비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콩쿠르를 전부 관람하진 않았지만 갈라쇼는 함께 보면서 즐거워했다. 오늘도 다 함께 모이면 좋겠다고 말했더니 둘 다 오겠다고 답해 주었다.
마지막으로는 에르네스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 그래도 괜찮겠어?
물론 친구들을 초대하면 내 쪽에서 준비할 것들이 많지만, 그런 건 별로 문제도 아니었다. 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주셨으면 좋겠는걸요?”
- 알았어. 갈게. 다른 애들도 다 부른 거야?
“예.”
- 그럼 오늘은 사샤도 데리고 갈…… 야, 뭔데.
갑자기 전화 너머에서 무언가 툭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더 기울여보았더니 사샤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지금 에르네스트에게 무언가 항의하는 것 같았다.
내가 의아함을 안고 가만히 있자 곧 다시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 사샤는 빠진다고 하네.
“……무슨 일 있나요?”
- 어? 일이 있긴 하지. 굳이 말하자면…….
다시 또 무언가 투닥거리는 소리.
조금 당혹스러웠다. 사샤도 이제 형제와 싸울 나이인가……? 조금 충격적이었지만 현실이라면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문제는 그런 단순한 다툼이 아닐 때의 문제였다.
놀러 오지 못할 이유는 많았지만 이 순간에도 내 머리는 심각한 일들을 떠올리며 불안하게 만들었다.
잠시 후, 씨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난 그 숨소리가 에르네스트의 것이 아니라는 걸 곧바로 알아차렸다.
“사샤?”
- 네…….
결국 에르네스트에게 전화를 빼앗은 듯했다. 물론 에르네스트가 져 줬을 테지만…… 그만큼 사샤도 진지했다.
자기 형과 격투를 할 정도면 크게 나쁜 것 같진 않지만, 우선 난 가장 걱정되는 부분부터 물었다.
“혹시 아픈가요? 다쳤다든가…….”
내 목소리에 담긴 걱정을 알아차렸는지 사샤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 전혀요.
“정말요?”
- 정말.
평소 사샤가 이렇게 말했던가?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직접 마주 보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약간 고민된다. 어제도 사샤는 콘서트홀에 오지 않았다. 어떤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류보비와 아나톨리도 있으니 와 줬으면 좋겠다고 해 봐야 별 소용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사샤가 어떤 기분인지 알기 위해선 일단 내 기분을 솔직하게 말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 못 본 지 오래되지 않았나요?”
- 아마도요.
“괜찮다면 오늘 봤으면 좋겠어요. 물론 부모님과 에르네스트의 허락이 있어야겠지만…….”
사샤의 보호자들이 괜찮다고 판단한다면 괜찮은 거겠지. 난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잠시간의 침묵 후, 사샤가 조용히 말했다.
- 갈게요.
어딘가 조금 체념한 것 같은 목소리이기도 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정말 걱정되게.
걱정되니까 직접 보고 싶다는 마음과, 사샤를 더 귀찮게 할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부딪쳤다.
내 바람을 우선하는 건 안 될 일이지 않나 생각 중인데, 다시 전화를 바꿔 든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 간대.
“저기…… 에르네스트가 보기에 안 되겠다 싶으시면 데리고 오지 마세요. 전 사샤를 무리시킬 생각은 없어요.”
-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이따가 보면 알 거야.
“예?”
- 음. 저녁 즈음 가면 될까?
“아…… 6시에 오실 수 있도록 차를 보내 드릴게요. 저녁 식사는 하지 말고 와 주세요.”
- 알았어.
그렇게 답한 에르네스트는 툭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난 잠시간 앉아서 건반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피아노 건반 덮개를 닫았다. 호스트로서 준비는 일찍 시작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