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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630화 (630/1,277)

##  630화

아버지와 오빠에게 전화를 걸어 친구들을 초대했음을 알리고 간단히 허락을 받았다. 두 분은 내가 사교적으로 지내는 걸 반기는 분들이라 파티라면 언제든 환영이었다.

다음은 예고르와 드미트리에게도 전하는 일이었다. 친구들이 오면 호스트인 나도 모두를 신경 써야 하지만 그것보다 현실적으로는 고용인 분들에게 부담이 많이 간다.

그런데 드미트리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무척이나 반겼다.

“저로선 파티가 조금 더 자주 있어도 좋을 것 같군요. 아가씨.”

“예? 드미트리로선 일이 늘어나는 것 아닌가요?”

드미트리는 잠시 고민하며 턱을 만지작거리더니 말했다.

“아가씨도 되도록 큰 콘서트홀에서 연주하고 싶으시지 않으십니까?”

“……아.”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리사에게 있어 많은 손님은 그만큼 큰 보람과 행복이죠.”

주어진 일이 크면 클수록 더더욱 열정적으로 달려드는 것이 우리 같은 사람들의 공통점이었다. 물론 손님이 적으면 적은 대로 더더욱 집중하여 대접하고.

같은 공감대를 찾았음을 확신한 드미트리가 웃으며 눈을 찡긋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드미트리는 그렇다는 거죠?”

“예. 그러니 되도록 자주 파티를 열어 주시죠. 유리 님이나 루슬란 님은 영 파티엔 관심이 없는지라…….”

“아하하…… 저도 비슷해요.”

“그래도 가장 희망이 있어 보입니다.”

드미트리 말대로 아버지나 오빠는 정말로 1년에 손에 꼽을 정도로만 사람들을 초대했다. 내게서 희망을 찾으려 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친 드미트리는 만찬을 준비하겠다면서 바로 팔을 걷어붙였다. 난 그가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것에 존경과 감사를 느꼈다. 마치 당연히 해야 할 일처럼 말하고 있긴 하지만 만약 그가 날 싫어했다면 지금처럼 말하진 않았으리라.

집안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마친 나는 개인적인 준비도 하기 시작했다.

괜히 포멀하게 올 필요는 없다고 모두에게 말해 둔 뒤였다. 저녁 식사는 가벼운 이브닝 파티처럼 할 참이고, 갈라쇼 관람 역시 연습실에서 모여 볼 것이기 때문에 되도록 편안하게 보는 쪽이 나았다. 나 역시 가벼운 여름 원피스로 맞이하기로 했다.

“……음.”

별관으로 향한 나는 괜히 피아노 근처의 물건들을 이리저리 옮겨 보거나, 홈시어터를 만지작거렸다. 직접 청소라도 하고 싶었지만 이미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어서 건드릴 것이 없었다. 이따가 친구들이 오면 쓸 테이블과 의자는 예고르가 준비해 주기로 했다.

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2시였다. 약속된 시간은 6시. 시간이 왜 이렇게 늦게 가나 모르겠다. 4시간을 어떻게 기다리지?

두서없이 두리번거리던 난 결국 피아노 앞에 앉았다.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모르겠을 땐 결국 습관처럼 이렇게 되고 만다.

아무 생각 없이 건반을 만지려던 순간, 웃음이 터졌다.

“아하하하.”

문득 기억 속 한 페이지에 남겨져 있는 동화가 생각났다. 어린왕자였지. 친구가 4시에 온다면 3시부터 마음이 들뜰 거라던 여우.

난 그 여우보다 더 참을성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니, 그 여우가 참을성이 강한 건가?

어쨌든 확실한 건 시간이 갈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고 안절부절못하게 되며, 행복의 가치를 느끼게 될 거란 점이었다. 그 사실이 더더욱 날 기쁘게 만들었다.

***

타티아나의 초대에 맞춰 준비를 마치자 정확한 시간에 검은 벤츠가 집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어 주는 운전사에게 작게 인사하며 아나스타샤는 뒷좌석에 올랐다.

이미 그곳엔 발렌티나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나스타샤를 보더니 발랄하게 웃으며 말했다.

“드레스 안 입길 잘했네.”

“그 애는 파티 분위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잖아.”

“그건 그렇지.”

타티아나나 베르체노프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에게 묻는다면 당연히 그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는 크고 화려하지 않겠냐고 답하겠지. 그게 평범한 시선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주최하는 파티에 몇 번 참석해 본 아나스타샤는 절대 그런 분위기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평소 생활이 그렇듯 타티아나는 파티도 화려하게 하는 법이 없었다. 물론 셰프와 웨이터가 있는 파티가 흔한 건 아니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보다 훨씬 더한 파티도 여럿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크게 꾸며 보려고 휘황찬란하다 못해 요란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파티들. 그런 것에 비하면 타티아나의 파티는 정말 아담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아담함과 함께 기본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우아함이 아나스타샤는 마음에 들었다. 애써서 튀어 보이려 하지 않아도 충분한 편안함이 거기에 있다.

오늘도 분명 그렇겠지. 아나스타샤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자 발렌티나가 조금 더 다가오며 물었다.

“어쨌든, 아나스타샤. 난 네가 일찍 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약속 시간에 맞췄네?”

“시간 약속은 지켜야지.”

“네가 그런 거 신경 쓰는 애였어?”

마음 같아선 사실 신경 쓰지 않고 먼저 가고 싶었다. 호스트로서 준비하고 있을 타티아나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 충동을 참느라 아나스타샤도 한참이나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정시에 맞춰 도착하는 것으로 결정 내렸다. 아나스타샤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란 뜻으로 발렌티나에게 말했다.

“어린왕자도 안 봤니?”

“응?”

“여우가 아무 때나 무턱대고 찾아오지 말라고 했었는데. 그 충고는 어디로 들은 거야?”

일찍 파티에 함께하고픈 게스트의 마음은 좋지만 그래도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오래전 동화에선 물론이고 어른들도 누구라도 그리 말한다.

발렌티나는 할 말이 없는지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지지 않겠다는 듯 말꼬리를 물었다.

“타티아나는 여우가 아닌데?”

“자꾸 바보 같은 대답 하면 바보로 대할 거야. 발렌티나.”

“얘는…… 진짜 농담이 안 통해.”

두 사람이 이렇게 말을 주고받는 것도 벌써 몇 년이나 된 일이다. 아나스타샤는 발렌티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발렌티나는 어떻게 하면 아나스타샤를 화나게 하는지 알았고.

“어쨌든 맞는 말이긴 해. 호스트에 대한 기본적인 에티켓이기도 하니까. 어라, 이제 보니까 우리 여우가 어려서부터 에티켓 교육을 시켜 준 거였구나?”

“……말을 말자.”

아나스타샤는 한숨을 내쉬며 차 문에 팔을 기대었다.

그 여우는 기다림의 행복을 빼앗지 말란 뜻에서 그런 말을 했겠지. 그건 호스트에게 주어진 가장 큰 행복일지도 모르니까.

타티아나도 지금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을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니 메시지 하나도 보내기 힘들었다. 지금까진 하지 못했던 생각들을 주섬주섬 담으면서, 아나스타샤는 차창을 바라보았다.

“도착했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운전 너무 멋지게 잘 하세요!”

베르체노프가에 도착한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운전기사에게 인사를 보내곤 저택 앞에 섰다. 두 사람은 바로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아나스타샤! 발렌티나!”

앉아 있던 타티아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잔걸음으로 달려왔다. 갑자기 아까 발렌티나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친구를 여우 같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타티아나는 두 친구를 번갈아 포옹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정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아나스타샤 역시 미소를 지으며 가지고 온 종이 가방을 건네주었다.

“초대해 줘서 고마워. 자, 이거 선물.”

“고마워요, 쿠키인가요?”

“응. 이따 같이 먹자.”

“좋아요!”

들떠 있는 타티아나를 보니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응접실 의자에 앉았고, 타티아나가 직접 차를 따라 주었다.

그 모습을 보던 발렌티나가 살짝 물어보았다.

“많이 기다렸니?”

“물론이죠.”

망설이지도 않고 타티아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물어본 발렌티나가 조금 부끄러워할 정도였다. 하지만 곧 그녀는 다시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5시부터?”

“아뇨?”

“응?”

“제가 자각한 게 한 2시부터였을까요?”

“……??”

여우가 1시간. 타티아나는 4시간. 타티아나는 염소자리였었지? 아나스타샤는 무심결에 그런 걸 떠올리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발렌티나는 타티아나에게 찻잔을 받아 들며 말했다.

“맨날 보면서 뭘 그렇게 기다렸니?”

“매일 본다고 해서 특별해지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얘는 참…….”

서로에게 길들여져 있으면 무엇이든 특별하고 기다려지게 된다. 타티아나는 정말 무슨 일이라도 감사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이젠 자신도 비슷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응접실에서 간단히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다른 아이들도 도착했다. 류보비와 아나톨리였다.

“오늘도 같이라서 너무 기뻐요!”

“저야말로요, 류보비.”

응접실 문을 열자마자 류보비는 바로 타티아나에게 달려들었다. 저러다가 언젠가 한 번 같이 넘어지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그에 비해 아나톨리는 차분하고 점잖았다.

“저도 초대해 주셔서 기뻐요.”

“기뻐해 주셔서 다행이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차를 준비해 드릴게요.”

타티아나도 아나톨리를 애 대하듯 하지 않고 조금 더 어른처럼 대해 주고 있었다. 그래 봐야 아직 열 살짜리긴 하지만…… 전부터 저 애를 봐 왔던 아나스타샤로선 약간 감회가 새롭기도 했다.

순식간에 다섯 명으로 불어나자 말소리도 더 많아졌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 그리고 타티아나는 동생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귀엽게 보며 말을 거들거나 웃어 주었다. 류보비는 늘 하고 싶은 말이 많았고, 아나톨리는 비교적 조용했지만 한마디씩 할 땐 유머러스한 부분이 있어서 대화가 끊어질 일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막 두 명도 도착했다.

“안녕.”

에르네스트는 한 손 가득 무언가 잔뜩 사 온 참이었다. 뭔가 했더니 갈라쇼를 보면서 먹을 과자와 음료 등이었다. 음식을 가져올 수 있는 홈파티는 아니지만 이 정도는 사 와야겠다 생각을 한 모양이다.

타티아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서서 반겼다.

“어서 와요, 에르네스트. 사샤.”

“이건 어디에?”

“거기 두세요. 이따 정리할게요.”

“알았어.”

에르네스트가 짐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사샤도 머뭇거리며 따라가선 그 옆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아나스타샤는 약간 이상함을 느꼈다. 사샤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편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겐 낯을 조금 가리긴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 중 사샤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저렇게 얼굴을 못 마주치는 건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타티아나 역시 그 모습이 걱정하는 건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웃음이 떠나지 않던 얼굴에 걱정이 서린다.

무릎을 굽혀 사샤와 눈높이를 맞춘 타티아나가 물었다.

“와 주셔서 기뻐요. 사샤.”

“……네.”

진짜 이상하다.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를 휙 돌아보았다. 너 혹시 여기 오면서 저 애를 혼내거나 한 것 아냐? 왜 저렇게 풀이 죽어 있어?

날카롭게 노려보자 눈이 마주친 에르네스트는 그렇다고 긍정하지도, 억울하다고 항변하지도 않았다. 재미있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 상황에서 웃을 수 있는 건지 아나스타샤는 이해가 안 갔다.

“사샤…….”

타티아나만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조곤조곤하게 사샤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이야기를 해 보라는 것 같다. 저 어린 애가 어떤 고민이 있든 간에 타티아나가 도와주지 못할 일은 없어 보였다.

그 간곡한 설득에 결국 사샤가 입을 열었다.

잠시 후, 타티아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괜찮아요. 귀엽잖아요? 사샤.”

“전혀 안 그래요…….”

“괜찮다니깐요.”

사샤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걸 타티아나가 다시 어르고 달랜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다른 친구들도 그 옆으로 모여들었다.

“어, 사샤 앞니 빠졌네!”

류보비가 크게 말하더니 자기도 비슷한 나이에 이가 빠졌다면서 신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샤가 입학했을 때 류보비와 아나톨리는 이미 2학년이었다. 딱 그 시기이긴 했다.

사샤는 끔찍한 시간이라는 듯 고개를 숙였다. 지금 모습이 스스로 느끼기에 정말 창피한 것 같다.

아나스타샤는 그 심정을 이해했다. 자신도 어릴 적 똑같이 겪었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창 예민하던 아나스타샤는 일주일 넘게 학교에 안 갔었다. 그에 비하면 사샤는 정말 용감했다.

용감한 사샤는 긍정적이기도 했다. 조금 침울해하긴 했지만 주변에서 계속 모두가 자신들도 겪은 일이라며 위로해 주자 이윽고 기운을 차리고 고개를 든 것이다.

타티아나는 무엇이 그리 기쁜지 사샤의 손을 잡고는 놓을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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