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1화
사샤는 입을 열 때마다 시선이 집중되는 것에 신경이 쓰이는 듯했지만, 곧 적응했는지 무덤덤해졌다. 류보비와 아나톨리, 사샤 세 명은 평소처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난 조금 흐뭇한 심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고, 옆에 있던 에르네스트도 한마디 얹었다.
“막상 오면 좋아할 거면서.”
“아하하하, 오전에 전화했을 땐 큰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어요.”
“애들한텐 큰일이긴 하니까.”
사샤는 그 나이대 아이들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면모가 있었지만 그래도 적잖이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렇긴 하지.”
“에르네스트는 기억하시나요?”
“무슨 기억?”
“유치가 빠졌을 때요.”
사샤를 보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에르네스트에게도 비슷한 시절이 있었을 텐데.
혹시 사진 같은 게 있으면 제일 좋겠지만, 아무래도 요원한 생각이었다. 지금 사샤도 사진이라면 기겁하는 것 같은데 당시 에르네스트의 사진을 찍을 만한 사람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별 고민도 않고 툭 대답했다.
“기억 안 나. 너는?”
자연스럽게 기억을 되짚는다. 혼재되어 있는 기억들 중엔 모두 기억나는 것도 있고 어느 하나만 기억나는 것도 있었다. 난 그중 한 기억을 손가락으로 건져 올려,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전…… 기억해요. 꽤 선명하네요. 손으로 이렇게 밀어서…….”
“아니…… 지금 보여 주진 말고.”
“아…….”
나도 모르게 기억을 따라 손끝으로 이를 누르다 깜짝 놀라 손을 뺐다.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거지. 부끄러움에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에르네스트는 방금 건 못 본 걸로 치겠다는 듯 하는 것 같았다. 난 얼른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학교에 안 갔…… 갔던가? 음…… 그랬었네요.”
“……?”
애매한 기억 역시 있었다. 학교생활에 대한 기억은 거의 제대로 남아 있는 게 없었다. 어느 쪽을 보더라도.
에르네스트는 반대로 학교생활에 대한 건 잘 기억하는 것 같았다. 그는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아나스타샤 쪽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일주일이나 안 왔었지.”
“그 이야기를 왜 하는데?”
“사실이니까. 너도 기억하지? 발렌티나.”
“선생님이 아나스타샤 좀 데리고 오라면서 날 보냈었지. 난 착한 아이였으니까 얘 집에 갔었고. 그때 아나스타샤가 뭐라고 그랬는지 알아?”
“뭐라고 했었지?”
두 사람은 아나스타샤를 가운데에 두고 마치 놀리기라도 하듯 그렇게 말을 주고받았다. 아나스타샤는 무표정하게 있었지만 난 스산한 기운을 느꼈다.
발렌티나는 그걸 감지하지 못했는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너도 흔들리는 거 있으면 빼고 오라고 했어. 그럼 같이 가 준다고.”
“……오우. 나름 공정하네.”
“그게 공정해? 제 딴엔 논리라고 말했는지 몰…… 아야!!”
“둘 다 조용히 안 해?”
“…….”
어느샌가 뒤에 다가선 아나스타샤가 발렌티나를 조용히 시켰다. 에르네스트도 더 이상 그녀를 건드릴 생각은 없는지 조용해졌다.
더 어릴 적 아나스타샤는 어땠을지도 조금 궁금해졌다. 예전에 본 영상에선 정말 천사처럼 예뻤는데. 학교를 안 나오고 했던 걸 보면 그때도 자유분방했던 건 마찬가지였던 것 같기도 하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물어보고 싶었다.
지나간 이야기들을 조금 나누고, 다음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난 사샤에게 문제가 없음을 알면서도 혹시나 싶어서 한 번 더 물어보았다.
“아무튼…… 사샤, 식사하는 데엔 문제없죠?”
“아뇨, 문제가 있어요.”
그냥 확인차 물어본 건데 사샤의 말에 약간 당황했다. 혹시 다른 치아도 아픈가? 그렇다면 카샤를 끓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무슨 문제인지 알려 주세요. 제가 드미트리 셰프에게 전해 둘게요.”
“콜라를 마시면 안 된대요.”
“……예?”
자꾸 날 당황시키는 사샤를 보며 눈을 깜빡이자 사샤는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말 사샤에겐 심각한 문제인 것 같다.
에르네스트는 엄격한 모습으로 사샤에게 말했다.
“몸에도 좋지 않은 거 이참에 끊어.”
이런 말은 조금 이상하지만 마치 담배 끊으라고 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콜라가 막 자리를 잡는 치아에 안 좋다는 건 차치하고, 어려서부터 마셔서 그리 좋을 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정론을 마주하면서 사샤 역시 정론으로 맞받아쳤다.
“형도 커피 끊으면 같이 끊을게.”
“……젠장, 아나스타샤한테 이상한 걸 또 배워 가지고.”
아나스타샤로선 조금 억울한 이야기였다. 그 논리를 썼다는 건 사실이지만 이 자리에서 이야기한 건 발렌티나였으니까. 아나스타샤가 다시 한 번 발렌티나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렇게 흘겨본 건 잠시뿐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앞으로 나서더니 사샤 옆에 앉았다. 사샤는 눈치 빠르게도 바로 도와 달라는 시선을 그녀에게 보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현명한 방안을 내놓았다.
“대신 나도 안 마실게, 사샤. 어때?”
“누나도요?”
“응. 나도 콜라 좋아하는데, 동지로서 의리를 지켜야 하지 않겠어?”
아나스타샤도 콜라를 자주 마신다는 건 사샤도 잘 아는 바였다. 그런 그녀가 같이 참아 주겠다고 하니 사샤로서도 납득할 만한 것 같았다.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알았어요.”
두 사람은 새끼손가락까지 걸면서 다시 한 번 신뢰를 굳게 했다. 그저 콜라를 마시지 않겠다고 한 것뿐인데 왜 웃음이 나는지 모르겠다.
“후후, 그럼 일반 식사는 괜찮은 거죠? 질긴 음식은 없을 거예요.”
“예.”
“그럼 가죠, 모두 배고프실 텐데.”
이미 드미트리가 준비는 해 놓았을 시간이었다. 난 친구들을 이끌고 식당 쪽으로 향했다.
일곱 명을 위해 완벽하게 세팅된 테이블이 우릴 맞이했다. 아나스타샤는 그 숫자를 헤아리더니 뭔가 부족하다는 듯 말했다.
“유리 아저씨는?”
“오늘은 늦는다고 하시네요. 오빠도 그렇고.”
“아쉽네,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오늘은 저녁 식사만 하고 갈 게 아니니까 저녁 늦게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일단은 우리뿐이니까 각자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드미트리와 나제즈다가 트레이에 애피타이저를 준비해 왔다.
“진짜 맛있어 보이네요, 드미트리!”
“하하, 고맙습니다.”
곳곳에서 감사가 오간다. 친구들은 이미 드미트리의 실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드미트리도 친구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파악하고 있었고.
잠시 후 각자의 앞에 애피타이저와 음료가 준비되었다. 우리는 잔을 들고 가볍게 앞으로 기울였다. 난 호스트로서 한마디 할 수도 있었지만, 그 대신 가벼운 미소로 대신했다. 그저 좋은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늘 안 왔으면 후회할 뻔했어.”
“그냥 올리비예인데도 어떻게 이런 맛이 날까.”
모두들 감탄을 금치 못했다. 친구들이 온다고 해서 드미트리가 안 그래도 좋은 실력에 더더욱 박차를 가한 모양이었다. 지금 샐러드부터 나온 걸 보니 코스 요리로 준비한 것 같은데, 쭉 기대된다.
그리고 혹시나 싶어 사샤를 살펴봤더니, 다행히 사샤는 별 문제 없이 닭가슴살로 보이는 부위를 쿡 찔러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 우물우물 씹었다. 저 정도면 괜찮아 보인다.
조용히 안도하면서 내 몫도 천천히 먹고 나니 다음으론 수프와 비네그레트 소스를 얹은 아보카도 차례였다. 러시아식과 프랑스식을 적절하게 섞은 코스인 것 같았다.
“많이 배고팠어? 아나톨리.”
“배가 불러도 이건 다 먹어야지.”
그 후로 나온 음식들도 호평일색이었다. 드미트리의 요리라면 나도 정말 많이 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색다르고 맛있는 요리들이 많았다. 언제쯤 드미트리만큼 요리를 할 수 있게 될지 모르겠다.
메인 디쉬로 나온 두툼한 스테이크까지 먹은 시점에선 배가 부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디저트로 나온 몽블랑과 차를 마시는 속도는 처음과 비교하여 현저히 줄어들어 있었다.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려온다.
“…….”
시계를 확인했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각. 조금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 준비도 미리 해 둔 참이었다.
“별관으로 갈까요.”
“응. 그러자.”
모두 내 뒤를 따라왔다. 난 별관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나스타샤가 처음으로 놀란 목소리를 냈다.
“어쩐 일이야? 연습실이 바뀌었네?”
“오늘만이에요.”
원래 피아노와 음반 등만 눈에 들어오던 연습실엔 예고르가 준비해 준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거기에 잠시 시간을 보내며 놀거리들도 많았다.
내가 테이블 옆의 보드게임들을 몇 개 올리자 아이들이 관심을 보였다. 난 웃으며 제안했다.
“게임 하지 않으실래요?”
당연히 거절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예전에 했었던 마피아의 변형 게임부터 시작해서 딕싯이라는 이미지 추론 게임, 그리고 아주 단순한 할리갈리까지 다양한 게임들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모든 게임의 신이나 다름없는 아나스타샤를 어떻게 견제할 수 있을까 싶어 산술이나 순발력이 아니라 추상적인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게임도 올렸는데, 심지어 아나스타샤는 그런 추론마저도 강했다.
처음엔 에르네스트와 발렌티나가 악전고투하며 그녀에게 맞섰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자연스럽게 다른 아이들과 나까지 모두 합세해서 아나스타샤의 상대를 해야 했다.
아나스타샤는 한참이나 우리와 놀아 주다가 결국 지쳤다면서 멀리 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하지만 말만 그렇게 하지 사실은 그냥 슬쩍 빠져 주었을 뿐이라는 게 분명했다.
아무튼 아나스타샤가 빠진 뒤로는 에르네스트가 조금 잘하는 편이긴 했지만 다들 비슷비슷한 실력이었다.
한참 동안 보드게임을 가지고 논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피아노에도 손을 뻗었다. 처음 시작된 건 초견 대결이었다.
규칙은 간단했다. 무작위로 책장을 하나 고르곤 눈을 감고 그 앞에서 아무거나 한 권을 뽑는다. 그리고 포커 카드 두 장을 뽑아 페이지 숫자를 정한 뒤 그 페이지를 연주하는 것이다.
“이건 정말 쳐 본 적이 없는데.”
악보를 펼친 에르네스트는 중얼거리더니 몇 초 지나기도 전에 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정말 처음이라고요……?
나도 초견엔 나름대로 자신이 있는 편이지만 에르네스트는 정말 모든 곡들을 다 연습하고 온 사람처럼 잘 연주했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초견에 강한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연습한 것이 있는지 곧잘 해냈다. 사샤도 더듬거리긴 했어도 그 나이를 생각하면 굉장히 뛰어난 축에 속했고.
그렇게 한 바퀴를 다 돌고 나자 에르네스트는 대충 손이 풀렸다는 듯 다음 책장 앞에 섰다. 협주곡 악보들이 꽂혀 있는 책장이었다.
그렇게 일부러 난이도를 올린 에르네스트는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오케스트라 총보를 뽑아 왔다.
“어떻게 치려고?”
“어떻게든 해 보는 거지.”
그렇게 한마디만 던진 에르네스트는 그대로 피아노 앞에 앉더니 악보를 빠르게 읽어 내리곤 바로 연주에 들어갔다. 총보독법을 활용한 편곡 연주였다.
그의 연주 방식은 내 것과 조금 달랐지만, 작곡가답게 다채로운 방식으로 주제를 살리는 훌륭한 연주였다. 이 연주만 들어 보더라도 그가 작곡 공부는 물론이고 피아노 연습도 얼마나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거기에 질 수 없다는 듯 아나스타샤도 다시 책장에 가선 눈을 감고 악보를 꺼내 왔다. 알캉의 악보였다.
일반적인 연주자들이라면 절망적일 정도로 운이 안 좋은 상황이었겠지만, 아나스타샤는 달랐다. 그녀는 반색하더니 바로 악보를 펼치곤 한 페이지를 그야말로 휘갈기듯 쳐 냈다.
에르네스트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미리 연습한 곡도 그렇게 치긴 어렵겠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로테이션이 이어졌다. 류보비와 아나톨리는 구경만 하긴 했지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는지 전혀 지루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렇게 보드게임과 악기 등을 가지고 놀다 보니 2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9시였다.
슬슬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가 다가왔다. 한 명씩 자리에 앉았고, 난 미리 세팅된 홈시어터를 조작해 갈라쇼 중계 현장을 화면에 띄웠다.
에르네스트가 중얼거렸다.
“이걸 집에서 작은 텔레비전으로 볼 뻔했네.”
“오길 잘했죠?”
“그렇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난 그 웃음만으로도 오늘 친구들을 초대한 것에 대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