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2화
에르네스트는 초콜릿을 하나 입에 넣으며 다리를 쭉 폈다. 저녁 9시 10분. 타티아나의 연습실 한 면을 가득 채우는 커다란 화면에선 막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는 인연이 꽤 많다. 어려서부터 방학이면 꼭 휴가를 가는 곳이기도 하고, 가끔은 연주회 일로 간 적도 있었다.
그리고 잊지 못할 추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작년 초 타티아나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 도시와 마주하고 있었다. 정말 모든 게 처음인 사람 같았다. 가만 보고 있으면 불안해서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바라는 대로 따라다니고 도와주기도 했었다.
결과적으로 타티아나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때,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그곳에서 직접 우승했을 때보다 더 보람찬 기분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번엔 타티아나의 차례인 것 같았다. 그녀는 연신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예카테리나와 다른 선배들이 모두 좋은 결과를 거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진 그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때문에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그냥 이 시간을 즐길 수 있도록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해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에르네스트는 잘 안다. 원한다면 자주 만들 수 있는 자리임에도 타티아나는 항상 시간을 소중하고 특별하게 여긴다.
“자리가 불편하진 않으신가요?”
혹시나 싶은지 타티아나는 계속 주변 친구들을 챙기려 했다. 지금까지 앉아 놀던 자리인데 갈라쇼 볼 땐 특별히 불편해지기라도 하나? 딱히 아무도 불만이 없을 거란 건 분명했지만, 한편으론 그녀가 왜 계속 묻는지 이해가 가기도 했다.
류보비는 일부러 보여 주려는 듯 몸을 앞뒤로 기우뚱거리며 말했다.
“너무 편해요. 직접 가서 봐도 지금보단 덜 편할걸요.”
“당연하지. 저기선 지금처럼 뭐 마시면서 못 보잖아.”
“그래서 그런가? 말 나온 김에 거기 쿠키 좀 집어 줘.”
“…….”
당연한 듯 시키는 말에 아나톨리는 인상을 썼지만 그래도 고분고분하게 쿠키를 건네주었다.
착하게 구는 건 타티아나 앞이기 때문인가? 에르네스트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갈라쇼를 보기 전에 손이나 씻고 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가서 옆으로 돌자마자, 에르네스트는 복도의 어둠 속에 서 있는 실루엣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 실루엣이 루슬란이라는 걸 간발의 차이로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발로 걷어차기라도 할 뻔했다. 혹시 이상한 사람이라면 저 안에 있는 애들을 지킬 수 있는 건 자기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간신히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았고, 루슬란 역시 놀란 얼굴에서 다시 평소의 냉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에르네스트는 문을 살며시 닫고는 작게 말했다.
“왜 거기 그러고 있습니까? 이상한 사람인 줄 알고 큰일 날 뻔했잖아요. 루슬란.”
“이 저택에 이상한 사람이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해?”
듣고 보니 그것도 그랬다. 수십 명의 경호원과 보안 시스템이 지키는 이 저택에 초대받지 않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에르네스트가 한숨을 내쉬자 루슬란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큰일 날 뻔했다는 건 뭔데?”
“……별거 아닙니다.”
“그래?”
농담할 생각도 들지 않아서 입을 꾹 다물자, 루슬란은 그 모습도 재미있어하는 듯했다.
그러나 장난은 거기까지였다. 루슬란은 연습실 쪽으로 눈길을 주며 물었다.
“아나스타샤나 다른 친구들은 안에 있고?”
“들어오시죠?”
“글쎄, 그냥 잘 있다는 걸 확인했다면 됐어.”
루슬란은 지나가다 들렀을 뿐이라는 투로 그렇게 말했다. 들어와서 인사 한마디 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그것도 방해나 부담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따질 일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한편으론 지금 호스트로 있는 타티아나를 존중하는 일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에르네스트는 루슬란을 더 설득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길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게 마음에 들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루슬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상한 사람이 있나 지키는 녀석도 있고.”
“그냥 손 씻으러 나온 건데요.”
꼭 그 한마디를 해야 하냐는 듯 루슬란은 눈을 흘겼다. 하지만 곧 쿨하게 발걸음을 떼었다.
“아무튼 난 간다. 아버지에게도 말해 둘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좋은 밤 되길.”
에르네스트는 말을 맺은 루슬란이 별관을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봤을 때도 그렇고,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타티아나가 리허설을 했을 때도 루슬란은 그녀의 옆에 붙어 있었다. 마치 지켜보고 있지 않으면 타티아나에게 문제라도 생길 것처럼. 그게 어떤 기분인지 에르네스트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루슬란은 동생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충분하다는 듯 그냥 떠났다. 그녀에게 관심이 사라졌기에 그런 것이 아닌, 여유와 믿음으로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어두운 복도를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도 밖에 너무 오래 나와 있음을 느꼈다. 그는 루슬란과 달랐다.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타티아나의 곁으로 돌아가야 했다.
대충 물에 적신 손을 털어 내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니 모든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어디 갔다 오셨나요?”
“손 씻으러.”
타티아나의 물음에 대충 답하자 아나스타샤가 킥킥 웃으며 농담을 덧붙였다.
“나쁜 일 하고 손 씻었다는 것 같네.”
“……무슨 소린데 진짜?”
“아니, 그렇잖아? 우리 몰래 뭔가 한 것 아니야?”
진짜 맥락도 없이 얻어걸린 것이겠지만 가끔 아나스타샤의 감각은 평범한 사람의 수준을 한참이나 넘어선 능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이가 없어진 에르네스트는 자기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몰래 누굴 만나긴 했었지.”
“응?”
“루슬란이 왔다 갔었어.”
“어!?”
아나스타샤가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고, 타티아나도 재차 확인해 왔다.
“정말인가요?”
“바로 갔어. 갈라쇼 관람 때문에 모인 우릴 방해하고 싶지 않았나 봐.”
타티아나는 아쉽다는 눈빛으로 문 쪽을 바라보았지만 이렇다 할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어떤 이유든 간에 좋은 의도가 있었으리라 생각하며 이해하려고 하는 모습이었다.
깊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잠시 후 화면이 휙 바뀌더니 갈라쇼 오프닝이 시작되었다.
디아나 의장의 인사말과 사회자의 안내. 그리고 오케스트라 소개까지 이전과 비슷한 반복이었지만, 갈라쇼 프로그램은 그렇지 않았다. 이전과 완전히 다른 2시간 30분의 연주회였다.
“모스크바에서의 첫 곡은 호두까기 인형이었죠?”
“그랬지.”
어제 보았던 모스크바 갈라쇼에선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시작하여 첼로, 플루트, 피아노 협주곡 순으로 진행되었었다. 하지만 오늘의 첫 곡은 바이올린의 파가니니 카프리스였다.
일반적으로 같은 콘서트라면 다른 곳에서 연주하더라도 같은 프로그램을 똑같이 진행하기 마련이다. 그러는 편이 혼선도 적고 연주자들에게도 피로가 덜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이 콩쿠르 갈라쇼는 단지 그 장소에 있는 청중들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수십만 명에게 공개되는 클래식 음악 방송이기도 했다. 이틀 연속 똑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건 시청자들을 하여금 지루하게 만드는 일이다. 때문에 아예 다른 프로그램을 준비한 것이다.
콩쿠르 대결에 올릴 곡들을 치열하게 연습한 연주자들에게 갈라쇼에서 연주할 곡들도 따로 준비하게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 정도 무대에 서는 연주자들은 어디에서나 연주할 수 있는 곡들을 늘 충분히 준비해 놓곤 한다.
아니나 다를까, 막심은 그야말로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바이올린을 높게 치켜들었다.
“…….”
저 사람은 팝 음악을 해도 잘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단 어떻게 해야 돋보이는질 잘 아는 사람이다. 저건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타고나야 하는 스타성이었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까지 했으니 그 실력은 말할 것도 없기도 하고.
타티아나는 눈을 반짝이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로도 천재들의 향연이 이어졌다. 바이올린의 솔로로 막을 연 무대 위로 트럼펫 협주곡이 웅장하게 연주되고, 성악가의 아리아가 울려 퍼진다. 피아노 협주곡까지 연달아 연주되니 숨 돌릴 틈도 없었다.
이번 콩쿠르의 수상자들의 탁월함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여 주려는 듯 갈라쇼는 화려하게 진행되었다.
“…….”
에르네스트는 조용히 화면을 바라보았다.
저 시기의 연주자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가 아닐까. 수만 명의 연주자가 도전하지만 겨우 몇 명밖에 설 수 없는 자리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저 부러워하기보단 침착하게 가라앉은 머리로 생각할 뿐이었다.
그에게도 곧 기회가 주어진다. 바로 내년에 있을 쇼팽 콩쿠르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역시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콩쿠르들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연주자로서 큰 무대에도 몇 번 선 경험이 있어서 지금 옆에 있는 친구들에 비해 조금은 앞서 있다고 할 수 있는 에르네스트이지만, 국제 콩쿠르 출전이 처음인 건 모두와 마찬가지였다.
같은 출발선 상에 다시 서게 된 것이다.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발렌티나. 모두 각자의 음악관에서 어느 정도 결실을 거둔 연주자들이다. 절대로 저 애들보다 압도적으로 잘 한다고 자신할 순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조금 긴장되기도 했다.
‘만약 엉망으로 뒤쳐진다면…….’
물론 최선을 다해 임할 테니 그럴 확률은 낮겠지만, 무슨 일이 있을진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에르네스트가 내년 있을 모든 콩쿠르에서 제대로 된 성적을 내지 못한다면 그건 그냥 뒤처지는 게 아니게 된다.
타티아나는 그야말로 신격화될지도 모르고, 에르네스트의 무의식은 더더욱 그를 공고하게 옥죄어 올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이미 악보에도 묻어나기 시작한 그 무의식을 완전히 무시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무언가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나스타샤는 비로소 솔직해질지도 모르지. 그건 사실 바라는 바이긴 하지만, 그 후가 어떻게 될진 알 수 없었다.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이 복잡하다. 에르네스트는 화면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간단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그냥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결과를 내면 된다. 타티아나를 올려다볼 일 없도록, 그리고 인간관계는 대화로 풀어나갈 수 있도록.
머지않은 미래이지만, 잘 해나갈 수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자신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굳혔다.
“에르네스트, 1부 끝났어요.”
“아, 그래.”
쉽게 생각한다고 하는데도 생각이 깊어져서 멍하니 있었더니 타티아나가 그를 불렀다.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흔들고는 옆에 있던 찻잔을 들었다. 따뜻한 찻물이 마른 목을 적신다.
인터미션 사이엔 1부의 곡들에 대해 짤막한 평들을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이야기는 9학년들이 했고, 류보비와 아나톨리는 다른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와, 아까 먹으면서 아무 말도 안 하느라 혼났어. 이 과자 대체 무슨 맛이야?”
“이상해? 나도 줘 봐.”
“여기.”
“……욱, 차라리 시나몬 캔디가 낫겠어.”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않아?”
무언가 먹으면서 콘서트를 볼 일은 드무니까 이런 이야기를 편하게 하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도 평소 같았으면 별말 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방금 전 무대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한 번 휩쓸고 지나갔던 터라 여유가 조금 부족했다. 에르네스트는 자기도 모르게 한마디 했다.
“꼬맹이들, 여기 과자 먹고 놀려고 온 거야?”
아나톨리와 류보비가 뜨끔한 눈빛으로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프라이빗한 연습실에서 지금 편하게 있긴 하지만 사실 중요한 건 갈라쇼 관람이었다. 이럴 땐 에티켓이 어떻게 되는지 머리를 굴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농담조로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괜한 말로 긴장하게 했나 후회하는 찰나, 타티아나가 슥 끼어들더니 과자를 하나 집어 입에 넣으며 말했다.
“사실 놀려고 부른 건데요…….”
“…….”
저렇게 변호하니 할 말이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후회했다. 그저 행복한 시간을 함께 보내는 데에 만족하기로 했으면서, 왜 혼자 생각이 많아졌는지 모르겠다. 전부 지금은 쓸데없는 생각들이었다.
이 순간에 충실하기로 생각하며 에르네스트는 손을 내밀었다. 류보비는 그 손 위에 아까 말했던 이상한 과자를 몇 개 올려 주었다.
그 과자를 입에 털어 넣은 에르네스트는 몇 초 지나지 않아 인상을 쓰며 물통을 찾아 그대로 들이켰다.
류보비와 아나톨리, 그리고 타티아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속닥거렸다. 무슨 말인지 들리진 않았지만, 에르네스트는 여유를 되찾고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