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3화
개인 연습실에서 친한 사람들만 불러 같이 관람 중이니 지켜야 할 에티켓이 그리 빡빡하진 않았다. 과자를 먹어도 되고 음료수를 마셔도 된다.
너무 큰 소리를 내선 안 된다는 것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아서 지키고 있었다. 훈련받은 음악가로서의 습관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난 인터미션에도 모두가 진지하게 갈라쇼에 모든 이야깃거리를 할당하길 바라지 않았다. 갈라쇼는 핑계고 모두 다 함께 모여서 놀고 싶었다는 말은 아이들을 변호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는 내 진심이었다.
물론 에르네스트도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금방 분위기는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갈라쇼에 대한 이야기는 금방 지나가고, 그 자리를 과자와 게임 등이 차지했다.
“이건 심리 게임 같은 건가?”
“그냥 하나를 고르기만 하면 되는 거지.”
모두가 가볍게 즐길 수 있는 파티 게임 중엔 몇 개의 카드로 이루어진 아주 간단한 게임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제일 하기 싫은 일 하기, 아니면 제일 하고 싶은 일 못하기?”
아나톨리는 자신이 든 카드를 들고는 중얼거렸다. 굉장히 고민이 되는지 한참 동안 질문을 되풀이했다. 머릿속으로 모든 상황을 생각하려는 것 같았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선택 게임 혹은 밸런스 게임이라고 불리는 게임이었다.
사람들은 살면서 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선택은 보통 세 종류다. 좋은 것과 좋은 것을 고르기,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고르기, 나쁜 것과 나쁜 것을 고르기.
그중에서 앞의 두 개는 사실 별로 고민할 것이 없다 그냥 좋은 것을 고르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쁜 것과 나쁜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나쁜 것을 고르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까.
때문에 그런 고르기 싫은 질문들로 교묘하게 균형을 맞추어 놓고, 도망가지 못하게 게임의 룰로 잡아둔 상황에서 참가자가 어떤 논리로 선택을 하는지 보는 게임이었다.
아나톨리는 고민이 깊은 듯했지만 한 사람에게 많은 시간을 줄 순 없었다. 류보비가 빨리 하라며 압박했고, 아나톨리는 결국 선택했다.
“차라리 제일 하기 싫은 일을 할래요.”
“오, 그래? 왜?”
“제가 하기 싫은 일은 보통 유익한 일들이 많았거든요. 그러니까 다 하고 나면 결국엔 제게 도움이 되겠죠.”
“……와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운 대답이 나와서 아나스타샤는 물론 나도 깜짝 놀랐다. 너무 진지하고도 멋진 대답이었다.
그런데 이 좋은 분위기에 류보비가 찬물을 끼얹었다.
“잘 모르겠는데. 만약 죽은 개구리를 먹어야 한다고 쳐 봐. 그게 먹고 나면 어떻게 도움이 되는 건데?”
“……지금 그런 이야기가 아니거든?”
“뭐가 아니야? 모든 상황에 맞아떨어져야 하는 거 아니야?”
우리는 아나톨리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이해했지만 사실 류보비의 말도 꽤 날카로운 편이었다. 아나톨리가 하기 싫은 일을 고행이나 수련이라 여길 수 있다면 죽은 개구리를 먹는 일도 똑같이 대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건 어떻게 봐도 유익한 일이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나톨리는 쿨하게 결론을 냈다.
“죽은 개구리를 먹고 나면 비위가 강해져서 다른 것도 잘 먹을 수 있게 되겠지 뭐.”
그것도 맞는 말이긴 했다.
하지만 류보비는 그런 아나톨리의 논리와 마주하기보단 인상을 쓰는 편을 택했다.
“으엑. 더러워.”
“네가 먼저 물어본 거잖아.”
아나톨리가 짜증난다는 듯 말했지만 류보비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이미 아나톨리가 개구리를 먹기라도 한 것 같다는 표현이었다.
그런데 이런 가벼운 놀림도 이 게임의 묘미이긴 했다.
물론 이런 식으로 놀렸을 때 그대로 되돌려 받는 것도 이 게임의 특징이었고.
“개구리맛 초콜릿 vs 초콜릿맛 개구리…….”
다음 카드를 뽑아든 류보비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힘겹게 카드를 읽었다. 복수의 기회만 노리던 아나톨리는 싱글벙글 웃으며 류보비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정확하게 해 줄게. 개구리맛 초콜릿이 어떤 거냐면 말이지, 바로 여기 있는 이 초콜릿과 생긴 건 똑같아. 그런데 딱 입에 넣으면 미끌미끌하고 끈적끈적하고 물컹…….”
“아악!! 그만해!!”
류보비가 살려 달라는 듯 비명을 질렀으나 아나톨리는 멈추지 않고 옆에서 쫑알거렸다. 류보비가 조금 가엾긴 했지만 아나톨리가 저렇게 신나하는 건 오랜만인 것 같아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한참이나 괴롭힘 당한 후에야 류보비는 간신히 초콜릿맛 개구리를 골랐고, 또 개구리를 골랐다면서 아나톨리한테 잔뜩 놀림당했다. 류보비는 잠깐 사이 핼쑥해진 얼굴로 의자에 축 늘어졌다.
“다음 난가?”
그다음으로 카드를 뽑아든 건 발렌티나였다.
그리고 그녀 역시 핼쑥해졌다. 그녀가 뽑은 질문은 ‘모기 20마리와 자기 vs 바퀴벌레 10마리와 자기’였다. 묘하게 숫자로 균형을 맞춘 것 같은 게 정말 기분 나쁘다.
“차라리 모기…….”
발렌티나도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뒤편으로 빠졌다.
어쩐지 이 게임 할 때마다 한 명씩 초췌해지는 것 같은데, 계속 해도 되나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만두면 앞서 한 사람들이 불평할 것 같으니 계속 해야만 했다. 이미 멈출 수 없게 되었다.
사샤가 뽑은 카드는 ‘평생 감자만 먹기 vs 평생 오이만 먹기’였다. 사샤는 당연하다는 듯 감자를 택했다. 감자를 좋아하는 건가 싶었는데 상식적인 이유가 있었다.
“오이만 먹다간 굶어죽을 거예요.”
비타민만 먹고 살 수는 없으니까…… 옳은 말이긴 한데, 감자만 먹어도 죽는 건 마찬가지일 것 같긴 했다. 질문 자체가 조금 이상한데?
약간 이상하긴 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하고, 다음은 내 차례였다.
“평생 뒤로만 걸어 다니기…… 아니면 평생 기어 다니기.”
정말 질문이 왜 이런 식인지 모르겠다.
둘 다 생각만 해도 이상했다. 뒤로 걷는 사람은 마이클 잭슨밖에 생각나지 않지만 평소에도 그러면 진짜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기어 다니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밖에 절대 못 나갈 것 같다.
질문이 워낙 이상했는지 다들 재촉하지 않고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지만, 난 게임에 있어선 잔꾀를 쓰지 않는 편이었다. 당당하게 하나를 골랐다.
“뒤로 걸어 다니는 게 낫겠어요.”
발렌티나가 상상만 해도 어지럽다는 듯 눈을 찡그렸다.
“엄청 불편할 것 같은데. 그래도 기는 것보단 낫나?”
“가는 방향이 보이지 않더라도 누군가 있다면 믿고 갈 수 있지 않을까요?”
뒷머리에 눈이 달려 있지 않으니 혼자라면 무척 불안하겠지. 꼼짝도 못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면 평상시랑 별로 다르지도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따라오는 사람을 마주보며 걸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런 상상은 전혀 안 해 봤는데.”
발렌티나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만약 내가 정말 계속 뒤로만 걸어야 한다면 발렌티나와 아나스타샤는 분명 나와 마주 보며 걸어 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걸으면서 이야기도 한다면, 재미있지 않을까?
내일부터 그렇게 해 볼까 생각하고 있자 이쪽을 바라보던 아나스타샤가 그 순간 내 생각을 읽었는지 말했다.
“그렇다고 뒤로 걷진 마. 넘어지면 큰일 나.”
“음…… 안 그럴게요.”
“…….”
약간 불안하다는 듯 바라보긴 했지만, 아나스타샤는 그 이상 말하지 않고 다음 카드를 뽑았다.
“여름에 히터 켜고 자기 vs 겨울에 에어컨 켜고 자기.”
끔찍한 질문이었지만 아나스타샤는 카드를 휙 흔들더니 가볍게 대답했다.
“이건 후자지. 이미 비슷하게 하기도 하는데?”
“……예?”
“겨울에 창문 열어놓고 이불 뒤집어쓰면 얼마나 기분 좋은데.”
“…….”
그러다 감기 걸려요…….
한겨울에 창문을 열어 두는 건 에어컨을 트는 조건보다 더 가혹했다. 그런데도 아나스타샤는 그걸 즐긴다고까지 하니…… 이걸 건강해서 기쁘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삐딱하게 듣더니 심판처럼 손날을 내밀었다.
“이불은 빼야지.”
“왜?”
“그건 반칙이잖아.”
심판의 제지에도 아나스타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똑같은 조건으로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라면 여름에 히터를 켤 때도 이불을 덮어야 하는 건데, 그건 그럼 공정하니?”
“……?”
“이불을 덮든 다 벗든 어차피 한쪽은 불공정하잖아. 그러니까 상황에 맞게 대처는 할 수 있게 하는 게 맞지.”
그녀가 논리정연하게 나올 때면 그 누구도 이길 수가 없다. 물론 틀린 억지를 쓰는 것도 아니었고. 에르네스트는 잠시 후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난 왜 너랑 말하면 이렇게 말문이 막히냐.”
“바보니까 그렇지.”
“……화나네 진짜.”
“헛소리하지 말고 다음 카드나 뽑을래?”
마지막 차례는 에르네스트였다.
지금까지 나온 질문들이 모두 괴상하기 짝이 없었기에 그는 마음의 준비를 어느 정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운도 좋게 가장 멀쩡한 질문을 뽑아냈다.
“10년 후로 가기 vs 10년 전으로 가기.”
“치사해!”
“왜 제일 좋은 거야?”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들렸다. 누군 개구리도 먹고 모기에 물리기도 했는데 이건 불공평하긴 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에게만 시간여행 자유이용권이 주어진 것에 대해 따지고 싶다면 카드뭉치에 따져야 했다. 좋은 걸 잘 고른 건 그의 운이었으니까.
“……글쎄.”
그런데 좋은 카드를 골라 놓고도 에르네스트는 고민했다. 여기저기서 빨리 안 고르고 뭐 하냐는 말들이 쏟아질 무렵, 그는 생각을 정리했는지 조용히 말했다.
“아무것도 못 하고 10년 후를 맞이하는 거라면 그건 사절할래. 그냥 10년 전으로 가는 게 낫겠는데.”
아나스타샤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피식 웃었다.
“지금 실력으로 10년 전으로 가는 거니?”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지 난 여기 있는 누구보다 분명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다른 사람과 똑같이 공평하게 자신의 시간만 보냈어도 지금 이 정도로 뛰어난 음악가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10년이 더 주어진다면…… 정말 굉장한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
만약 여기 있는 누구 한 명에게 그런 행운이 주어진다면 그건 에르네스트의 것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그 행운을 자신의 것으로만 사용할 생각이 아니었다.
“그것도 있겠지만, 타티아나를 찾아와야겠지.”
“예?”
갑자기 내 이름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눈을 크게 뜨자 에르네스트가 날 바라보더니 킥킥거렸다.
“그땐 피아노 안 하고 있었을 거잖아? 그러니까 내가 가서, 피아노 하라고 설득할게. 그럼 8학년이 아니라 훨씬 더 일찍 입학할 수 있겠지.”
“…….”
난 무어라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10년 전이면 여섯 살이다. 이 저택이 아니라 코시기나에 살던 시절의 기억의 편린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분명히 날 찾아내고 말았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시당했을려나?”
에르네스트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작년까진 내 스스로의 판단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겠지. 말 그대로 모르는 기억의 일이니까.
하지만 이젠 기억들까지 전부 넘겨받으면서 스스로에게 많은 확신이 생긴 후였다. 난 검은 새가 된 그녀가 원래는 푸른색을 좋아했었다는 것도, 또 그 색에 어울리는 쿨한 성격이었다는 것도 잘 안다.
기억을 넘겨주면서 그런 세세한 성격까지 내가 알 수 있게 해 준 것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어떤 판단을 하든 믿고 지지해 주겠다는 의사표명이었다고 생각한다.
난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기쁘게 받아들였을걸요.”
분명 그랬을 테지. 처음 보는 남자애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같이 피아노를 하자고 한다면 약간 당황했을지도 모르겠지만, 흔쾌히 받아들였겠지.
그리고 그가 말하는 대로 일찍 중앙음악학교에 입학해서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와도 일찍 만났을지도 모른다. 난 또 다른 그런 세상에 대해 생각하다가, 웃음을 참을 수 없어졌다.
예전에 리처드가 말해 주었던 세상에 대한 이야기보다 훨씬 멋진 이야기였다. 난 스스로의 필요성에 대해 깨닫는 것보다, 에르네스트가 날 찾아서 피아노 앞에 앉히고 말 것이란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