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34화 (634/1,277)

##  634화

인터미션 사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대한 짤막한 다큐멘터리가 나오던 중계 화면은 곧 수상자들에 대한 인터뷰로 바뀌었다.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우리들의 관심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화면으로 향했다.

성악 우승자가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던 류보비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들었어요? 저 언니도 폴리나 선생님에게 배웠대요!”

“저도 분명히 들었어요.”

이력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재학 중이라고만 나와 있어서 그 전에 어떤 분에게 사사했는진 알 수 없었는데, 방금 직접 중앙음악학교의 성악과 폴리나 바실레예브나라는 이름을 들었으니 확실했다.

이 인터뷰는 중계방송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류보비도 이제야 안 사실에 굉장히 신기해했다. 바로 스마트폰을 꺼내어 메시지를 입력하는 걸 보니 폴리나 선생님에게 축하드린다고 메시지를 보내는 모양이었다.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분명 지금 폴리나 선생님도 같은 화면을 보고 계실 테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그 후로도 각 부문의 수상자들이 가볍게 한마디씩 하며 지나갔다.

“저 사람 잘하더라.”

“저도 봤었던 기억이 나요.”

피아노뿐만 아니라 바이올린이나 첼로, 그리고 성악, 목관, 금관에서도 이젠 몇 명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저께 결과가 나왔을 때부터 온갖 매체에서 사진과 이름이 계속 쏟아져나오는 걸 봤더니 기억하지 못하는 게 이상했다.

물론, 그전부터 잘 알던 사람들도 있었다.

“확실히 이렇게 보니까…… 어른같아.”

발렌티나가 중얼거렸다. 갑자기 멀리 가 버린 것 같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가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는 듯 말했다.

“어제 홀에서 봤을 땐 어른 같지 않았고?”

“그것도 대단했지 당연히. 얼마나 큰 무대야? 그런데 저렇게 인터뷰하는 거 보니까 느낌이 달라.”

“뭐가?”

“뭔가가.”

“?”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난 발렌티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인터뷰에 응하는 막심 선배는 내가 평소에 알던 그 선배와는 약간 달리 느껴지기도 했다. 한순간에 성인이 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

무대에 선 모습을 볼 땐 그래도 같은 음악가라는 인식이 더 강했었는데, 카메라 앞에서 이야기하는 모습이라 그런가? 그래도 멋지게 보인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발렌티나는 화면을 바라보다가 나와 아나스타샤 쪽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어른이 되기 싫은 건 나뿐이야?”

“그게 싫으면 안 할 수 있는 거야?”

“글쎄, 그냥 갑자기 그래. 밸런스 게임 2탄 할까? 평생 어른으로 살기 vs 평생 어린애로 살기.”

오늘따라 발렌티나는 자신의 말에 대한 이유가 없었다. 그냥, 뭔가, 갑자기. 그런 식으로 나와선 허공에 흐릿하게 떠돌다가 사라져버리는 말들. 아나스타샤 역시 그 말들을 그리 깊게 생각하며 대답하고 있진 않았다.

그런데 옆에서 가만히 듣던 사샤가 약간 이해가 안 간다는 투로 말했다.

“누나들은 이미 어른이잖아요?”

사샤가 보기엔 그렇게 보이려나. 우린 나이 차이가 꽤 나는 편이니까.

발렌티나는 귀엽다는 듯 사샤를 바라보더니 깔깔 웃으며 장난스레 받았다.

“아직 아닌데?”

“예전에 저처럼 이도 빠졌을 거고.”

“그래도 여전히 애인걸.”

“키도 다 크신 것 같고요.”

“…….”

몇 년 전부터 우릴 봐 온 사샤 입장에선 우리 키가 더 이상 크지 않는다는 걸 이제 알 만도 하다. 하지만 한참이나 어린아이에게 키가 다 컸다는 말을 이렇게 직접 들으니까 기분이 묘하다.

반대로 우리 역시 사샤를 몇 년 전부터 봐 왔었다. 난 새삼 신기하단 기분이 들어 사샤를 돌아보았다.

키도 많이 컸고, 유치도 빠졌다. 그야말로 훌쩍 커간다는 게 눈으로 보였다. 옆에 있는 아나톨리나 류보비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아나톨리는 조금만 있으면 내 키도 넘을 기세다.

나와 친구들은 몇 년간 그대로였다. 겉으로 보기엔 별로 바뀐 게 없다. 어떤 면에서든 어른이 되어 본 적 없다고 생각하는 나로선, 그냥 이대로 지구가 태양을 몇 바퀴 더 돌면 성인이 된다는 게 뭔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갑자기 모든 기준들이 아리송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비슷한 생각을 하는 건 비단 나뿐이 아닌 듯했다.

에르네스트가 진지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생각은 안 해 봤는데…… 키가 멈춰야 어른이라 할 수 있는 건가?”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잠시 후에야 그가 하는 말의 속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더 빨랐다. 그녀가 에르네스트의 옆으로 휙 다가가더니 물었다.

“너 설마 아직도 크니?”

“……저리 가.”

“정말?”

발렌티나도 흥미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할 수 있다면 에르네스트를 일으켜 세워서 키를 재 보고 싶어하는 것 같다. 물론 에르네스트는 지금 누가 와서 강제로 일으키려고 해도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태세였지만.

난 이미 작년 즈음에 그가 계속 크고 있다는 것을 느낀 바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면 확실히 더 돋보이는 기분이 든다.

남자애들은 스무 살이 넘어서도 자라기도 하니까…… 얼마나 자라려나? 지금도 충분히 크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살짝 떨어진 곳에서 에르네스트를 바라보고 있는데, 사샤가 그에게 말했다.

“형 그래서 요즘 조절하는 거야?”

“뭐?”

“맨날 커피 마시고 늦게 자고 그러잖아.”

“그런 거 아니거든.”

괜히 내가 뜨끔했다.

예전에 난 에르네스트가 혹시 라흐마니노프만큼 커 버릴까 봐 그만 자라길 바랐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때도 일부러 늦게까지 놀다가 자면 어떨까 생각했었는데, 막상 에르네스트가 정말로 늦게 잔다고 하니 괜히 내가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공부가 많은 걸까. 약간 걱정이다.

“그렇게 늦게 자는데도 키가 크는 건 타티아나 누나가 귀를 당겨 준 덕분이겠네.”

사샤는 커피를 마시고 늦게 자도 여전히 키가 크는 에르네스트의 비밀을 알았다는 듯 귀 부근을 가리키며 말했다.

물론 그런 적이 있긴 하지만…… 그때 난 에르네스트의 키가 더 크길 바랐던 게 아니다. 보다 넓은 의미에서 성숙하길 바라는 기원을 담은 행위였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자면 키가 크는 마법이 되고 만 것 같다. 사샤는 부럽다는 듯 말을 걸었고 결국 에르네스트는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사샤. 조용히 안 하면 방학 동안 게임기 압수야.”

“…….”

여름방학이 아직 한참 남았는데 놀거리를 빼앗는 건 너무했다.

그 협박은 사샤에게 아주 강력하게 먹혀든 것 같았다. 사샤가 조용해졌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에게까지 그 협박이 통하진 않았다.

“언니!”

갑자기 류보비가 큰 소리로 날 불러서 깜짝 놀랐다.

“예?”

“저번 제 생일 땐 안 해 주셨잖아요. 지금 해 주세요.”

“……지금요?”

“지금!”

류보비는 강아지처럼 내 앞에 파고들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생일이 지나고 난 지금에야 키가 더 크고 싶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다.

하지만 내 손에 그런 마법 같은 건 걸려 있지 않은데…… 에르네스트가 자라는 건 그냥 그가 더 자랄 시기일 뿐이고.

약간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못 해 줄 건 없었다. 이전에 에르네스트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바람과 축복을 담아 귀를 살며시 잡았다. 류보비가 간지럽다는 듯 까르르 웃는다. 난 가볍게 양손을 들어 올렸다.

류보비도 이런 걸 받았다고 해서 키가 많이 클 거라 믿고 있진 않겠지. 하지만 그녀는 그냥 내가 해 준다는 사실 자체가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 웃었다.

남은 두 아이도 우리가 뭘 하는지 바라보더니 기다렸다는 듯 곁으로 다가왔다.

“저도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나톨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게 어려울 것 없었다. 난 아나톨리에게도 똑같이 해 주었다. 아나톨리는 자기가 요청했음에도 부끄러운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래도 키가 더 클 수 있다면 아주 작은 것이라도 놓치지 않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사샤도 빠지지 않고 내게 귀를 맡겼다.

그렇게 세 명을 다 해 주고 나자 뭔가 의식 같은 걸 한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성장의 가능성이 있는 이 애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

그런데 성장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긴 했다.

슬쩍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더니 그는 내 눈을 얼른 피했다. 가까이 가면 도망가버릴 것 같다.

저번 생일엔 벌칙 같은 것으로 붙잡아서 했던 것이니까 이번엔 안 되겠지. 그는 굉장히 창피해하기도 했고. 난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키가 멈추지 않더라도 그는 이미 충분히 어른스러웠다.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난 그렇게 인정해 주고 싶었다.

그는 날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에겐 워낙 못미더운 모습을 많이 보여서…… 솔직히 자신이 별로 없다.

직접 물어보자니 굉장히 이상한 질문들을 몇 가지 떠올리고 있는데, 에르네스트가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2부 시작한다.”

에르네스트는 지금 주제를 돌리고 싶어 하기도 하지만, 음악가의 진지한 모습이 앞서 있었다.

난 하던 생각을 멈추곤 일단 다시 갈라쇼에 집중했다.

***

마린스키 극장에서 열린 두 번째 갈라쇼는 총 2시간 30분 정도 진행되었다.

수십 명의 연주자와 음악들이 준비된 긴 콘서트였지만 지루할 틈도 없었다. 솔리스트들의 특색을 보이려 하기 때문인지 온갖 편곡들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파가니니의 라캄파넬라를 플루트로 연주한 건 굉장히 신선했다. 에르네스트는 작곡가로서 조금 더 넓은 시야로 각 악기들을 보려고 했고, 덕분에 작곡에 쓸 괜찮은 아이디어들을 몇 가지 얻기도 했다.

그렇게 갈라쇼를 모두 보고 나니 자정이었다. 밤이 깊었으니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누구 하나 먼저 자겠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는 물론이고 세 명의 아이들도 이대로 자기엔 아쉽다는 듯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타티아나가 그 애들의 바람에 응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이런 시간을 가장 바란 건 다름 아닌 그녀였을 테니.

그렇게 새벽 2시쯤 되었을 때였다.

“타티아나 자는 거야?”

차를 끓이던 에르네스트는 발렌티나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쪽을 보니 의자에 앉아 있는 타티아나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차는 일단 나중에 끓이기로 하고 에르네스트는 그 옆으로 가 보았다.

“…….”

타티아나는 미동도 않고 잠들어 있었다. 이렇게 보면 잠든 건지 기절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그렇게까지 건강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약간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본 얼굴은 평화로워 보였다. 그렇게 활발하게 게임에 참여하더니 결국 말 그대로 놀다 지쳐 잠든 모습이었다.

함께 놀던 친구들은 모두 조용히 그 앞에 모여들었다. 조각상 앞에 모여든 관람객들 같았다.

아나스타샤가 작게 속삭였다.

“이 애가 이렇게 자는 건 오랜만에 보네.”

“그건 그래.”

타티아나가 이 정도로 무방비하게 잠든 모습을 보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그녀는 함께 놀다가도 꼭 다른 친구들이 모두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는, 그런 성격이었으니까.

지금은 달리 신경 쓸 것이 별로 없기에 잠들어 버린 모양이다.

“어떻게 해? 그냥 자게 둬?”

“여기서 이렇게 자는 건 별로 안 좋은데.”

“그래. 우리도 여기서 다 잘 순 없잖아? 그럼 타티아나만 여기에 남겨 둘 거야?”

“말도 안 되지.”

발렌티나와 아나스타샤가 속닥거린다. 그녀들은 타티아나를 깨우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는 모양이었다.

이젠 여자애들이 알아서 하도록 둘 일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두 사람을 잠시 제지했다.

“잠깐만 자게 두자.”

“……왜?”

“잠깐만.”

에르네스트는 평소 주장에 이유가 확실한 편이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도 잘 들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며 아나스타샤는 더 묻지 않고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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