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35화 (635/1,277)

##  635화

잠깐 졸던 타티아나는 정말 5분도 안 되어서 깨어났다.

“저, 저 잠들었었나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는 사실이 이해가 안 가는지 타티아나가 당황해했다. 그렇게 허둥거릴 일도 아닌데.

아나스타샤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이만 다들 자러 갈까? 이제 와서 집에 가겠다고 할 사람은 없지?”

“전 허락 받고 왔어요.”

“저도요.”

갈라쇼가 9시 이전에 끝났다면 아이들만 일단 일찍 돌려보내는 것도 적절했을지 모르겠지만, 다 끝나고 보니 12시인데 뒤늦게 돌려보내는 건 의미가 없었다. 때문에 아예 모두 자고 가는 걸로 결론이 오래전에 나 있는 듯했다.

타티아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일어나선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거기엔 태블릿 컴퓨터가 있었고 화면엔 표가 띄워져 있었는데, 아마 저택에 준비된 방의 목록인 것 같았다.

그 화면을 유심히 보던 타티아나는 머릿속으로 정리가 끝났는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연습실을 치우기 시작했다. 물론 에르네스트도 열심히 도왔다. 노는 와중에도 틈틈이 잘 치웠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컵과 접시, 카드, 과자 부스러기 등이 여기저기에 있었다.

청소를 오래 할 필요는 없었다. 인원이 일곱 명이나 되다 보니 몇 분 만에 연습실은 그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다.

류보비와 아나톨리는 더 깨끗하게 하겠다는 듯 연습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타티아나가 제지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본관으로 가죠. 방이 준비되어 있어요.”

그렇게 그녀는 다른 아이들을 이끌고 저택으로 향했다.

베르체노프 저택엔 빈방이 굉장히 많았다. 타티아나를 제외한 여섯 명에게 하나씩 방을 나누어 주어도 충분할 정도였지만, 대부분 개인 방을 원하지 않았다.

류보비가 타티아나의 팔에 매달렸다.

“저 같이 자면 안 돼요?”

“그럴까요?”

타티아나가 흔쾌히 승낙하자 이번엔 반대쪽에서 발렌티나가 달라붙었다.

“그럼 나도!”

하지만 류보비에 발렌티나까지 합세한다면 아나스타샤만 따로 두는 것도 이상했다. 타티아나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셋…… 네 사람이 자기엔 좁아요. 따로 방을 안내해 드릴게요. 아나톨리는…… 에르네스트에게 부탁드려도 될까요? 침대가 세 개 있는 방이 있어요.”

“상관없어.”

최종적으론 방 두 개만 빌려서 한 방엔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 그리고 다른 한 방에 에르네스트와 사샤, 아나톨리가 들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배정받은 방은 침대가 세 개가 아니라 여섯 개쯤 들어가도 될 정도로 컸다. 이곳에 놀러온 지 벌써 몇 번이나 되는데도 놀라웠다.

사샤와 아나톨리도 새삼 신기한지 이곳저곳 구경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짐짓 엄하게 말했다.

“꼬맹이들. 일단 가서 씻어.”

타티아나가 맡긴 건 이런 일이겠지. 하지만 직접 고생해서 챙기거나 할 일은 없었다.

사샤나 아나톨리나 둘 다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성격이 아니라서 말 한마디만 하면 착하게 시키는 대로 따라 주는 편이었다. 한 번쯤 말 안 듣고 까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아쉬움이 들 정도로 두 아이는 점잖았다.

둘 다 욕실로 간 사이, 에르네스트는 잠시 테라스 쪽으로 나왔다.

“…….”

잘 가꾸어진 정원이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난다. 바람이 불자 풍경이 흔들리며 에르네스트의 눈을 현혹시켰다.

멍하니 그 광경과 마주하며 바람을 즐기고 있는데, 바로 옆 테라스에서도 누군가 걸어 나왔다. 옆 방에 있는 발렌티나였다.

잠깐 바람을 쐬러 나온 걸까. 발렌티나도 말없이 정원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 없던 건 에르네스트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한차례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잠잠해진 공기가 가라앉았을 때, 발렌티나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뭐 해? 에르네스트.”

“잠깐 바람 좀 쐬려고.”

에르네스트가 어깨를 으쓱하자 발렌티나가 난간에 팔을 기대며 말했다.

“기분 좋다. 그치.”

“그러네.”

“주변에 숲이 있어서 그런가 바람이 달라.”

바람에도 질이 있다면, 모스크바 한복판에선 좀처럼 느낄 수 없는 바람이긴 했다. 조금 더 청량하면서도 동시에 약간 차갑기도 하다.

갑자기 드는 생각들이 많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 무엇도 꺼내 들지 않고 발렌티나를 따라 난간을 짚었다. 이미 새벽 2시다. 이야기를 하기엔 너무 늦은 시각.

그러나 발렌티나는 새벽 2시야말로 적당한 시간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다시 에르네스트를 불렀다.

“에르네스트.”

“응.”

“아까…… 아까 인터미션 때 애들이랑 타티아나 너무 웃기지 않았어? 단체 세례하는 것 같더라니까? 그치?”

그 말에 따라 기억이 되살아난다. 타티아나가 귀를 당겨 주면 키가 더 클 것이란 믿음으로 시작된 일이었다.

그냥 장난 같은 한때였지만, 묘하게 타티아나는 진지한 구석이 있었고, 그 분위기에 편승하듯 귀를 맡긴 아이들 역시 경건한 표정이긴 했다. 발렌티나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세례식 같은 느낌이었단 생각이 든다.

에르네스트가 피식 웃으며 긍정했다.

“재미있긴 했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발렌티나는 예전에 있었던 일도 꺼내 들었다.

“넌 작년에 그랬었지? 그때도 재밌었는데.”

“……기억에서 지워 줬으면 좋겠는데.”

어린애들이랑은 다르다. 에르네스트는 친구에게 그런 걸 당하리라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기분이 나빴던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모를까, 모두가 보고 있는데 그러는 건 솔직히 창피하다.

발렌티나도 그때를 생각하는지 킥킥거렸다. 그리고 그뿐만은 아니라는 듯 덧붙인다.

“그런데 딱 그때부터였던 것 같기도 해. 너희가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게.”

“……뭐?”

“그 애 좋아하잖아?”

갑작스러운 질문이라 순간 말문이 막혔다.

여자애한테 이런 질문을 듣는 건 처음이기도 했고, 발렌티나의 생각을 잘 알 수가 없었다. 좋아한다고 하면 도와주기라도 할 건가? 하지만 그런 의도로 이렇게 말을 붙인 것 같진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잠시 생각하다가 일단 가볍게 대답했다.

“그럼 싫어하겠어?”

“그런 걸 묻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

“……갑자기 왜 그래?”

“갑자기가 아니야. 지금 그렇게 대답하는 건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 에르네스트. 아나스타샤에 이어 너까지 그러진 마. 나 힘들어.”

“…….”

발렌티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되도록 친구의 틀 안에서 행동하려고 했지만 의식적으로 그리한다고 해서 아무런 표시가 안 날 수는 없었다.

발렌티나와 친하게 지낸 지도 8년이 넘었지.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오래 봐 온 친구에게 모든 걸 숨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가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그래서?”

“그리고 그만큼 지금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도 알겠어. 하지만 이제 우리 학교생활도 얼마 안 남았어. 다들 어른이 되겠지. 이미 되었을 수도 있고. 사샤 말처럼.”

“아니라면서?”

“아니고 싶은 걸지도?”

분명하게 다가올 미래를 예언이라도 하듯 발렌티나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예언이랄 것도 없었다. 나이를 먹는 건 모두에게 공평하게 찾아오는 일이었고, 아마 크게 달라질 일은 없을 테니까.

발렌티나는 한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이대로 쭉……. 그런 생각을 하지만, 그렇게 되진 않겠지.”

넋두리하듯 중얼거리는 말이 무겁게 느껴진다.

에르네스트는 저 애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눈 게 얼마나 되었나 떠올려 보았다.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항상 발렌티나는 밝고 명랑한 모습으로 즐거운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솔직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에르네스트는 그것을 받아 줄 필요가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 발렌티나.”

“아하하, 언제까지나 내 어리광에 어울려 달라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야. 그냥…… 옆에서 보고 있으면 드는 생각들이 있잖아.”

오늘도 모두의 어리광이 얽혀 만들어진 상황이었을까? 그 안에 있으면 복잡할 것 없이 행복했다. 발렌티나는 그 지점이 일종의 합의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난간에서 살짝 멀어지며 발렌티나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갈색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난다.

“콩쿠르 전에 그 애와 사귈 생각이 있는 건 아니지?”

“무슨 콩쿠르. 내년?”

“응. 내년.”

모두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시기를 뒤흔들 선택을 하지 말라는 건가? 하지만 그런 단순한 이야기를 하려면 훨씬 더 쉽게 할 수도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한 번 더 돌려 물어보았다.

“그렇게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해 봐야 의미 없는…….”

“그냥 대답해 줘.”

“…….”

발렌티나는 그녀답잖게 단호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에르네스트는 이 대답이 나와야만 모든 게 진행될 수 있음을 느끼곤 짧게 대답했다.

“없어.”

“그래? 왜?”

“이유는 말 못 해.”

“혹시 우리 때문이야?”

“…….”

이유라고 한다면 상당히 복잡했다. 콩쿠르에 집중하는 게 최우선인 이유는 물론이고, 에르네스트의 무의식에 관련된 내부적 이유.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서 에르네스트의 발목에 매달려 있었다.

그중엔 아나스타샤에 대한 공정 또한 존재했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발렌티나가 왜 지금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에 대한 그 의도를 어렴풋이 느꼈다.

“발렌티나. 넌 아나스타샤 때문에 그러는 거야?”

“……어?”

발렌티나가 놀란 목소리를 내다가, 자기도 모르게 방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혹시 아나스타샤가 있는지 확인하는 눈빛이었다.

그것으로 모든 게 확실해졌다. 발렌티나가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감추고 있었던 건 아나스타샤에 대한 이야기였다.

에르네스트는 이제 알겠다는 표정을 짓자 발렌티나는 더더욱 혼란스러워했다. 있을 수 없을 일을 목도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한참이나 주저하고 더듬거리던 발렌티나는 짧게 물었다.

“너 혹시…… 다 알고 있어?”

“뭘?”

“아나스타샤 말이야.”

에르네스트는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두 명이 서로의 추론을 짜맞춰 결론을 내길 바라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직접 이야기해 보기 전까진 아무것도 아는 게 아니지.”

“……세상에.”

발렌티나는 양손으로 입을 막으며 굳었다. 에르네스트가 이미 아나스타샤를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괜히 일을 키우는 것 같아서 에르네스트는 입을 막은 발렌티나에게 마침 잘되었다는 투로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발렌티나. 오늘 같은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내고 더 이상 누구에게도 하지 마. 알겠지.”

“…….”

“난 아직 애라서 그런가, 어른처럼 못 하겠거든.”

보다 뻔뻔하게 모든 걸 대할 수도 있겠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렇지 못했다. 이 상황에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말로 뱉고 보니 괜히 한 기분이 든다. 창피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발렌티나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하하핫, 그러니?”

“웃지 말고.”

“아직 애라고 스스로 인정한 건 다른 애들한테 말해도 돼? 응?”

그런 소릴 하고 다니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으로 노려보니, 발렌티나는 미안하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한참이나 웃음을 멈추지 못하던 그녀는 이윽고 숨을 고르고 나서야 다시 여유를 되찾았다.

훨씬 느긋해진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있잖아……. 생각해 보면 넌 어릴 때부터 그랬었어. 에르네스트.”

“뭐가?”

“그냥, 다른 애들하고는 좀 달랐었다고.”

그런 말은 어른들에게 많이 듣긴 했지만 오랜 친구에게 들으니 느낌이 이상했다.

무슨 상관일까 싶어 에르네스트가 웃어넘기자 발렌티나는 환하게 웃으며 난간 위로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래서 난 네가 좋았어. 이런 말 정도는 해도 되는 거지?”

“……고맙다고 해야 하나?”

“너도 날 좋아한다고 해 줘야지!”

“싫은 건 아냐.”

“진짜 손해 보는 기분만 드네…….”

발렌티나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특별히 불만이라는 것 같진 않았다.

서로 어리광을 부리면서 그중 누군가는 더 손해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걸 꼭 손해라 불러야 할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발렌티나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모두가 손해만 보는 상황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생각의 표면을 읽어 내리다가, 그녀도 별로 다르지 않음을 깨닫곤 입을 열었다.

“발렌티나.”

“응?”

“손해를 봐도 후회하진 않을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래?”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란 투로 웃음소리에 섞어 모든 이야기들을 날려 버린다.

잠시 나눈 이야기였지만 발렌티나는 한결 나아진 미소로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슬슬 들어가자. 나도 씻고 잘래.”

“그래, 잘 자. 발렌티나.”

“너도. 에르네스트.”

발렌티나가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에르네스트도 발걸음을 옮겼다. 양 테라스에서 허공을 가운데에 놓고 나눈 짧은 대화는 밤바람을 타고 날아갔지만 에르네스트는 새로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조용히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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