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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638화 (638/1,277)

##  638화

떠들썩했던 게 정말 거짓말 같다.

친구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니 정말 모든 게 조용해져 버린 것 같았다. 저택의 분위기는 물론이고 내 마음 속의 소리까지.

물론 이 아쉬움을 잘 기억하고 있어야 다음에 만났을 때 그만큼 더 기쁘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적적함이 찾아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혼자 남은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요를 쫓아내기 위해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것 정도였다.

반 기계적으로 연습실로 찾아가선 이리저리 건반을 짚으며 연습을 하고 음색을 궁리하다가, 내가 만드는 소리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단 생각이 들어서 홈시어터를 틀어 보았다. 혼자서 보니까 새삼 너무 크다.

“…….”

아직 홈시어터엔 예고르가 연결해 준 방송 수신 장비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채널은 수십 가지도 넘는다. 하지만 난 괜히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지 않고 곧장 뉴스 채널들만 몇 개 틀었다.

뉴스에선 당연하다는 듯 온통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대한 이야기들뿐이었다. 바로 어제 2차 갈라쇼가 끝난 참이니 아직 이슈로 다루어질 때였다.

물론 대부분의 내용은 이전에 봤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알리는 내용들. 사람들이 관심 있어 할 만한 결승전에서 연주된 연주곡, 연주자들에 대한 소개와 인터뷰 등.

그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많이 다루어지는 건 피아노 부문의 우승자인 예카테리나와 바이올린의 막심 선배였다.

아무래도 러시아에선 다른 악기보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조금 더 포커스가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기악 교육 커리큘럼도 그 두 악기의 연주자들을 양성하는 데에 많은 힘을 쏟기도 하고.

그 덕분인지 아니면 원래 이 땅엔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어울리는 음악가들이 많이 태어나는 것인지, 그 결과는 꽤 자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예카테리나와 막심 선배는 올해 러시아의 자랑거리였다.

두 사람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인터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커다란 홈시어터에 비해 자그마한 스마트폰 화면을 보니 예카테리나의 이름이 떠 있었다.

막 뉴스에서 인터뷰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니 묘한 기분이었다.

“아, 예카테리나.”

- 전화해도 되니? 타티아나.

그녀가 먼저 양해를 구했다. 난 농담조로 웃으며 말했다.

“이미 하고 있는걸요?”

- 그래도.

“예카테리나야말로 괜찮은가요? 바쁘지 않으세요?”

- 전화할 시간 정도는 있지롱.

“안 그래도 지금 예카테리나가 나오는 방송을 보고 있는 중이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난 시선만 돌려 다시 뉴스 쪽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음악관에 대해 겸손하면서도 당차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상당히 멋드러졌다.

그러나 막상 예카테리나는 부끄러워하며 말끝을 꼬았다.

- 뭘 그런 걸 보고 있니? 뭐라고 했는지 기억도 잘 안나…….

“아하하하, 괜찮아요. 멋있는걸요? 아르카디 교수님께서 자랑스러워하시겠어요.”

- 응. 좋아하셨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자를 가르치고 있다는 건 교수님으로서도 굉장한 기쁨이겠지. 난 어쩐지 그 기분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정작 내가 예카테리나를 가르친 것도 아닌데.

고개를 흔들어 이상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난 이야기를 어제 시점으로 돌렸다. 그녀가 정말 돋보였던 무대.

“아, 어제 갈라쇼 있잖아요.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 정말?

“정말이고말고요. 예카테리나가 어떻게 우승자가 된 것인지 결승전을 못 본 사람들도 단번에 납득했을걸요?”

- 칭찬해 줘서 고마워!

“모두들 같이 봤었는데, 다른 분들도 예카테리나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했어요.”

모두라는 말에 예카테리나가 반응했다. 그녀는 간밤의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 아, 다른 애들도?

“예. 저희 집에 초대했어요.”

- 솔직히 갈라쇼 보는 건 둘째 치고 진짜 재밌었겠다…….

예카테리나도 어제 함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갈라쇼의 주인공처럼 빛났던 그녀가 이렇게 말하니 웃음이 나온다. 그만큼 우리들을 좋아해 주는 것 같아서 나 역시 그녀가 더욱 좋아졌다. 난 다음을 기약하며 말했다.

“재미있었죠.”

- 지금은? 옆에 있어?

“아뇨, 돌아갔어요.”

- 일찍들 갔네? 아직 점심도 안 되었는데.

“갈라쇼 관람이 주 목적이었으니깐요.”

- 그래도 말야.

예카테리나는 콩쿠르 때문에 바쁘지만 우리는 방학이기도 하니 오랫동안 모여 놀 것이라 생각한 것 같았다. 실제로 다른 아이들은 평범히 그렇게도 한다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우린 방학이라고 할지라도 며칠이고 모여 노는 일이 없었다. 방학에야말로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신의 음악에 파고들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학기가 바뀔 때마다 몰라볼 정도로 실력이 급상승해서 등장하는 친구들이 종종 있곤 했다. 바로 방학을 제대로 자기개발에 쓴 친구들이다.

그래도 자기 공부에 정신이 팔려 놀 때도 흐지부지하진 않는다. 난 어제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간략히 이야기해 주었고, 예카테리나는 대충 알겠다는 듯 웃더니 자신의 이야기도 꺼냈다.

- 그렇구나. 여기는……. 조금 정신없다고 해야 하나.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하면서도 다시 물었다.

“정신없다니요?”

- 워낙 다양한 말이 사용되기도 하고, 친하게 구는 사람도 많고…….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말 그대로 정신없어 그냥.

예카테리나 역시 이 정도 되는 콩쿠르의 우승자가 이전처럼 편하게 있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진 않았다. 그래도 예상보다 훨씬 더 신경 쓸 일이 많은 것 같았다.

빡빡하게 짜인 스케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야기하던 예카테리나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어 중얼거렸다.

- 그나마 막심이나 니콜라이가 있어서 다행……인가?

왜 의문으로 끝나는 거지?

그래도 이야기를 들어 보니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악기를 다루지만 콩쿠르 수상자들 사이에서도 친하게 잘 지내는 것 같았다.

난 그 상황이 궁금해져서 살짝 물어보았다.

“막심 선배는 어떤가요?”

- 물 만난 물고기?

“그 정도예요?”

예카테리나는 말도 말라며 까르르 웃었다. 막심 선배는 확실히 스타성이 넘치는 연주자이긴 했다. 그 에너지 넘치는 활발한 성격은 사람들과의 사교에서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난 예카테리나 역시 같다고 생각한다.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 보여 주었던 모습이 떠오른다. 자기 음악에 진지하며 공사구분이 확실하고 다른 사람에게 모나지 않고 긍정적인 성격은 뭇 음악가들에게 사랑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분명 그럴 것이라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예카테리나도 물고기인 건 마찬가지이니 익숙해지시겠죠. 이제 세계 투어도 가셔야 할 텐데. 그렇죠?”

- 응. 정신없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원했던 세계니까. 좋아.

예카테리나 역시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며칠밖에 안 지났으니 일주일이 지나면 훨씬 더 좋아질 테고, 한 달이 지나면 그야말로 멀리멀리 가 있겠지.

“최고가 되셨으니까, 앞으로도 쭉 그러시길 바라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예카테리나를 최고라 불러도 문제없을 것 같았다. 계속 그 최고를 갱신해나가길 바라는 기원을 담아 그녀에게 말했다.

예카테리나는 가볍게 웃으며 받아 주었다.

- 내년이 되면 너희들도 곧 따라오겠지?”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최대한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 그땐 내가 제일 열심히 응원해 줄게. 내 스케줄 같은 건 다 접더라도.

“예? 하하하, 올해나 내년은 계속 끝없이 일이 많으실 텐데요. 활동은 하셔야죠.”

- 그냥 그렇게 정했어.

두말할 것 없다는 듯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난 그저 웃는 수밖에 없었다.

시시콜콜한 담소가 전파에 담겨 오가고, 잠시 지나자 예카테리나 쪽에서 소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 멀리에서도 느껴진다.

“가 봐야 하나요?”

- 응.

예카테리나는 어디론가 조용한 곳에서 더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그보단 책임감이 앞섰다. 누군가 예카테리나를 찾는다면 그녀는 응해야 했다.

- 아무튼 끝까지 지켜봐 줘서 고마워.

“저야말로 좋은 연주에 늘 귀가 호강하는 기분이었어요.”

- 무슨 호강까지야. 아하하.

기분 좋게 웃으며 그녀는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 또 연락할게. 타티아나.

“예. 투어 연주 힘내세요.”

- 응.

전화를 끊고 나자 다시 적막함이 찾아온다. 하지만 아까처럼 그저 멍하니 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있었을 때의 적막과는 조금 달랐다.

예카테리나는 이미 가고자 하는 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우릴 기다려 준다고 말했다.

그녀가 먼저 보여 주었던 콩쿠르 무대와 분위기가 떠오른다. 그 모든 것들을 경험으로 삼아서 나 역시 결정해야 할 것들과 마주해야 할 때가 왔음을 느꼈다.

“…….”

다시 피아노 앞으로 돌아가지 않고 난 태블릿 컴퓨터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내년에 있을 대형 콩쿠르들에 대해 다시 한 번 검색하여 정보들을 찾아보고, 내가 쓸 수 있는 레퍼토리들을 정리하며 하나하나 판단해 나가기 시작했다.

***

자신의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미하일은 타티아나의 전화를 받았다. 레슨과 상담 건으로 뵙고 싶다는 연락이었다.

방학엔 사실 학생들은 학교에 올 의무가 없다. 자신의 개인연습을 묵묵히 수행하는 것도 방학에 학생들에게 주어진 과제 중 하나였다. 학교를 떠나고 나면 누군가 붙잡아 줄 사람이 없는 까닭이었다. 모든 건 다 성인이 된 후를 위한 연습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이 자신의 연습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레슨을 요청하는 건 선생인 미하일의 입장에서 굉장히 기쁜 일이기도 했다. 그건 그만큼 열정적이란 증명이었으니까.

타티아나는 그런 면에서 굉장히 열정적인 학생이었다. 평소 모습은 그저 차분할 뿐인데 대체 그 어디에 그런 열정이 잠들어 있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미하일은 그런 타티아나를 굉장히 아꼈다.

“선생님. 타티아나입니다.”

똑똑, 문을 두드려 노크하고. 언제나처럼 예의바른 인사와 함께 들어온다. 심지어 학교에 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타티아나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방학 정도는 아무렇게나 입어도 상관없는데.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교복도 아예 없었으니 그렇게까지 엄격하게 지켜야 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학생으로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점에 있어선 타협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그런 부분은 미하일로 하여금 조금 더 진지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서 오너라. 차부터 한 잔 할까?”

“감사합니다.”

두 사람의 레슨은 항상 티타임으로 시작된다. 홍차와 허브차를 한 잔씩 끊인 미하일은 타티아나에게 찻잔을 들려 주었다.

타티아나는 뜨거운 찻물을 홀짝이더니, 찻잔받침에 올려놓곤 잠시 식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 같다.

그러나 상담은 기다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선생님. 어제 고민을 조금 해 봤어요.”

“무슨 고민?”

“내년 콩쿠르에 대해서요.”

타티아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사실 미하일이 보기에 타티아나는 자신의 음악, 친구들, 학교 그리고 사사하는 선생들에겐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때문에 명예나 명성 혹은 금전 등이 주어지는 콩쿠르라는 것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경쟁적이지 않은 성격인 것도 아니고,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종종 보이는 그런 달관한 듯한 태도가 조금 아리송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을 잡은 듯했다. 타티아나의 눈엔 분명한 욕망이 맺혀 있었다.

미하일은 목을 축이곤 대답했다.

“그래…….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를 보면서 느끼는 바가 있었겠구나.”

“예. 그전까지 막연했던 것들이 조금 확실해진 것 같아요.”

“그게 네 선택에 영향을 주었니?”

“글쎄요? 그것까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때가 왔다는 기분이 드네요.”

분명 고민은 많이 해 본 태가 나는 대답이었다.

미하일은 이쯤하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간 2년 넘게 타티아나를 봐 오면서 이미 그녀의 성격에 대해선 잘 알게 된 지 오래였다. 타티아나는 정말 신중하고 생각이 깊지만 한 번 결정한 것에 대해선 저돌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떻게 결정했니.”

“전…… 그 결정 때문에 상담을 요청드린 건데요?”

“이미 마음 속 결정은 끝났잖니. 내가 그런 것도 모를 줄 알고?”

“아하하……. 선생님은 못 속이겠네요…….”

선생의 의견을 참고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내린 결정으로 거꾸로 설득하려 들 게 뻔했다. 미하일은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들어보자꾸나.”

타티아나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분명한 의지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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