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39화 (639/1,277)

##  639화

저번에 다른 친구들에게 어떤 콩쿠르에 나갈 것인지 한 번 물어본 이후로는 다시 묻지 않았다. 물론 발렌티나가 쇼팽 콩쿠르에 나간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일단 기억에서 지웠다.

에르네스트는 어느 날 자기 스스로에게 질문했을 때 친구를 따라 참가했다는 바보 같은 대답이 나와선 안 된다고 말했다.

난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난 친구들을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내 연주자로서의 행보가 친구들에게 영향을 받아 흔들리게 둘 순 없었다.

철저하게 혼자서 판단한 끝에 결정을 내렸고, 그 결정에 대한 확신이 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참가할게요.”

확고하게 결론만을 이야기했다. 그래도 미하일 선생님께서 혹시 탐탁잖아 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잠시 기다렸으나, 선생님은 내 레슨을 봐 주실 때 늘 하시던 것처럼 차분하게 내 결론에 대한 근거와 이유를 물어보셨다.

“그래, 그렇게 결정한 이유를 들려주겠니.”

“우선…… 일찍 열리고 한 번에 결과가 나온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4월에 예선을 치르고 10월에 결선을 시작하는 쇼팽 콩쿠르와 달리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5월 한 달에 모든 것이 끝난다.

반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건 연주자들에게 준비할 시간을 길게 준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나에겐 그 긴 시간 동안 쇼팽의 곡들과 싸워야 한다는 뜻과 같았다. 올해 초에 했던 것과 같이.

물론 피아노를 완전히 허락받은 이후론 쇼팽을 다루는 데에도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곡의 완성도를 계속 올려서 콩쿠르 무대에 올려 검증받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혹시 모를 불안감을 안고 그런 큰 대회에 나가고 싶진 않았다.

“제겐 그쪽이 더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해요.”

내 목소리가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스스로의 미숙함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도 연주자에겐 중요한 소양 중 하나였으므로.

하지만 나약함을 인정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기도 했다. 말을 마치고 바라보니 미하일 선생님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단순히 느긋한 일정에 따라가기 싫다는 이유는 아닌 것 같은데. 타티아나.”

지금은 많이 옅어진 내 조급증과 불안에 대해 미하일 선생님은 알고 계신다. 난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는 걸 확실히 하고 싶었다.

“두 번째 이유도 있어요.”

“그래.”

다음 이유가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이유였다.

“쇼팽 콩쿠르는 오로지 쇼팽의 곡들만을 다루죠. 전 퀸 엘리자베스에서 보다 다채로운 곡들을 무대에 올리고 싶어요.”

예선에서 결선까지 모든 무대를 오로지 쇼팽의 곡만 연주해야 하는 쇼팽 콩쿠르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내게 큰 흥미를 주지 못했다.

쇼팽의 시대를 이어 나갈 연주자를 꼽는 그 콩쿠르가 가지는 어마어마한 권위는 세계 최고라 해도 무방했지만, 피아노 연주자로서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권위에서 오는 명예가 아니었으므로.

내가 원하는 명예는 다양한 사람들과 겨루는 데에서 오는 명예였다. 쉽게 예상할 수 없는 무대에서 남들과 똑같은 출발선에 설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

미하일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셨다.

“그런 점이 쇼팽 콩쿠르의 문제이기도 하지. 쇼팽과 잘 맞지 않는 연주자들은 불공평하다 느낄 테니까.”

하지만 그저 긍정해 주시기만 하진 않는다. 조용한 목소리 속엔 예리한 직감이 날 파헤치고 있었다.

“하지만 타티아나, 내 귀엔 네 쇼팽에 분명한 강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애초에 이 학교에 날 데리고 온 것도 쇼팽의 마주르카였다. 올해 초에 목숨을 걸었던 곡도 쇼팽의 소나타였고.

미하일 선생님은 내가 구사하는 쇼팽의 리듬이 아무렇게나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라 생각하신다. 쇼팽이라는 작곡가와 음악적으로 잘 어울려야 하고 또 그만한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

선생님의 눈빛에선 약간의 아쉬움. 그리고 그 아쉬움보다 앞서는 걱정 등이 느껴져 온다.

난 생각을 정리하며 신중히 대답했다.

“스스로 만족했다느니…… 그런 오만한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굳이 콩쿠르에 올릴 목적으로 다듬어서 검증받고 싶진 않아요.”

레퍼토리를 다양하게 펼칠 수 있다면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다. 하지만 오로지 쇼팽의 곡만 수십 곡씩 준비해야 한다면 시험을 치는 기분이 들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해해 주실 수 있나요?”

미하일 선생님은 다시 한 번 물어보셨다.

“쇼팽이 거북한 건 아니겠지? 타티아나.”

“…….”

싫거나 거북하다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그저 음악적으로 내 폐부까지 깊숙이 찌르고 들어왔을 뿐이니까.

미하일 선생님도 어렴풋이 알고 계시긴 하겠지만, 난 가볍게 고개를 젓기만 했다. 선생님은 흐릿한 미소를 지으셨다.

“좋아하면서도 어려워하니…… 어떤 기분으로 대하고 있는지 알 것 같기도 하지만, 내 멋대로 널 재단하고 싶진 않구나.”

“죄송해요.”

미하일 선생님은 껄껄 웃더니 조금 더 의자를 내 쪽으로 당기며 말씀하셨다.

“아니다, 하지만 나 역시 네 판단이 옳다고 생각한단다. 네가 이렇게 말하지 않고 내 도움을 구했다 하더라도 분명 난 네게 퀸 엘리자베스를 추천했겠지.”

“!”

난 깜짝 놀라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그 전까지 아무런 상담도 없었는데, 정말 선생님과 생각이 통한 걸까?

“정말이신가요?”

“그래.”

“제 쇼팽에 강점이 있다고 생각하신다 하셨잖아요?”

“물론 그렇지만, 네 피아노는 쇼팽 하나에 국한시키기엔 아깝지.”

“아깝……다고요?”

“난 사실 쇼팽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진 않아서.”

“예?”

“너도 그럴 텐데? 타티아나.”

쇼팽은 모든 피아노 연주자들이 반드시 거쳐 지나가야 하는 작곡가이기도 하고, 난 그의 음악을 잘 연주하는 편이었다. 때문에 마지막으로 남아 버린 미련이기도 했고.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를 딱 한 명만 꼽는다면 그 사람은 바로 라흐마니노프였다.

미하일 선생님은 이미 날 2년 넘게 가르치시면서 내 음악적 기호 정도는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라흐마니노프, 슈만, 브람스 등 많은 음악가들에 닿아 있는 네 레퍼토리는 다채롭게 사람들을 매료하기에 충분하다 생각한단다. 그쪽이 사람들도 행복할 테고 또.”

말을 잠시 멈춘 미하일 선생님은 손가락을 들어 날 가리키며 이어 말했다.

“너 역시 행복하겠지.”

“…….”

콩쿠르 참가에 대해 결정하는 데 그런 기준이 언급된다는 것이 약간 묘하게 느껴졌다.

무대를 즐기라는 말은 많이 듣긴 하지만…… 기성곡들의 감정을 연기하는 클래식 연주자는 늘 어느 정도 절제됨을 지녀야 하고, 또 국제 콩쿠르는 하고 싶은 대로 즐기기만 해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곳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렇게 당연히 떠오르는 반박들에 앞서 훨씬 더 근본적인 되물음이 입 밖으로 나왔다.

“제가 행복한 게 중요할까요?”

물론 난 기쁨을 느끼고 행복감에 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피아노의 망령이 아닌 인간으로서 살아 움직이는 이유의 대부분은 외부에 있었다. 친구들이 기뻐할 때 나 역시 기뻐하고, 청중들이 행복해할 때 나 역시 행복해진다.

그것 외에 자신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게 무엇인지 난 마땅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을 위임해 준 검은 새 덕분에 난 제멋대로 살아도 그녀가 불만을 가지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지만, 그것이 용서라 할지라도 잠벌은 남는다. 아직 난 책임져야 할 것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이해나 설명을 떠나, 미하일 선생님은 잠시의 고민도 없이 바로 대답해 주셨다.

“난 중요하단다.”

“아…….”

쓸데없는 내적 혼란을 잠재우고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미하일 선생님이 내 행복을 중요하게 여기신다. 그 말이면 충분했다.

원하는 음악을 한다면 불행하진 않을 것 같다.

“그럼…… 그렇게 결정한 걸로 하자꾸나.”

미하일 선생님은 이쯤 하면 괜찮을 것 같다는 듯 말을 한 번 자르고는, 가볍게 웃으며 날 바라보셨다.

“다른 작은 일정들이 겹쳐 있을 때도 혼자 결정하지 못하고 허둥거리는 학생들이 많은데, 그에 비해 중요한 콩쿠르가 겹쳐 있는데도 혼자서 잘 결정했다. 타티아나.”

“……예. 선생님.”

“그럼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 볼까.”

참가할 콩쿠르가 정해졌다. 이젠 발을 담그기 전보다 확실하게 알아볼 차례였다.

역사가 깊은 콩쿠르이니만큼 여러 이야기가 오갈 수 있었다. 오랫동안 쌓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여 좋은 점수를 딸 수 있는 계산이라든가, 보다 유리해질 수 있는 노하우나 팁 등.

하지만 미하일 선생님은 그런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사전 비디오 제출까진 4개월 정도 남았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아니겠지. 당장 내일이라도 찍어 보내면 될 테니까.”

“그, 그건…….”

“아무튼, 그건 별로 걱정할 필요 없고.”

DVD 심사는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듯 대충 말한 미하일 선생님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셨다.

“내가 생각하기에 준비해야 할 건 오케스트라 협연 경험일 것 같구나.”

이전부터 몇 번 나왔던 문제였다.

내 연습의 모든 초점은 솔리스트로서의 기량을 높이는 데에 집중되어 있었다. 물론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와의 협연도 한 적이 있긴 했지만, 2관 이상의 정규 오케스트라와는 한 번도 없었다.

“특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파이널에선 오케스트라와의 커뮤니케이션 능력 등이 굉장히 중요해지지. 알고 있지? 타티아나.”

“예.”

“물론 지금 이대로도 큰 문제는 없겠지만, 최고를 노리려면 확실히 경험만 한 게 없단다.”

정점이란 단어를 꺼내신 미하일 선생님은 곧 드물게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말씀하셨다.

“넌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을지 모르겠지만, 이왕 하기로 했다면 해 봐야겠지?”

“아…… 과, 관심 많아요! 물론 해야죠!”

“당황하기는.”

재미있어하시는 것 같았지만 난 나름 심각했다.

그냥 입상만 하는 것보단 예카테리나처럼 최고상을 받는 것이 내게도 좋고 미하일 선생님에게도 좋겠지. 그렇다면 노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선생님 말씀처럼 협연 경험이 필수적이었다. 지금 당장 한 곡을 잡고 오케스트라와 리허설을 하라 하더라도 어떻게든 해낼 수 있겠지만, 전 세계의 천재란 천재는 다 모여드는 콩쿠르에서 그걸론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협연 경험이라는 건 당장 쌓고 싶다고 해서 연습실에 가서 쌓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과 함께해야 하는 일이기에 약속과 준비가 필요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방학이니 어떻게든 해 본다면 방법이 아주 없진 않겠지. 라파 에이전시나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에 도움을 구할 수도 있을 테고.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한 번 정도는 협연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상황이 닥친 이제 와서야 그런 고민을 하는 나와 달리 선생님은 이미 준비해 두신 바가 있었다.

“예전부터 네게 흥미를 보이던 오케스트라도 있고, 구세프가 소개해 준 곳도 있단다. 만약 네가 시간을 낼 준비만 된다면 그 오케스트라들과 연락을 해 보마. 아마 흔쾌히 응하지 않을까 싶구나.”

“아……! 감사합니다. 선생님.”

“내가 해야 할 일이지.”

미하일 선생님은 당연한 일을 한다는 듯 말씀하시며 마지막으로 찻잔을 비우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하셨다.

오케스트라와 접선하시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비로소 큰 콩쿠르에 첫발을 내디뎠다는 기분이 든다.

미하일 선생님이 도와주신다면 무대에 오를 기회를 잡는 것까진 문제없을 것 같다. 그다음은 내 실력에 달려 있다.

내년 이맘때의 난 어디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것이 어디든지 간에 후회하고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단지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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