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40화 (640/1,277)

##  640화

미하일 선생님의 전화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처음 한두 곳의 답변이 그리 신통찮은지, 선생님의 전화는 네다섯 곳으로 늘어났다. 쉽지 않은 것 같았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식은 찻잔에 물을 조금 더 부었을 무렵. 미하일 선생님이 전화기를 내려놓고는 노트를 꺼내 펜으로 무어라 메모하시더니 휙휙 원을 그리기도 했다.

궁금해하는 눈으로 바라보니 선생님이 웃었다.

“걱정스럽지?”

“아뇨…… 그렇진 않아요. 열심히 할게요.”

“하하, 듣지도 않고 일단 대답부터 하는구나.”

어떤 내용이든 선생님이 내게 필요하다 판단하셨다면 무조건 따를 생각이었다. 콩쿠르를 내 마음대로 정했으니 그 정도는 해야 했다.

그러나 열의가 있다 해도 상황이 따라주어야만 한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은 이렇게 전화 몇 통으로 일정을 조율해서 뚝딱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미하일 선생님은 펜을 빙글 돌리더니 내려놓았다.

“일단 당장은 어려울 것 같구나. 타티아나.”

“그런가요.”

지금부터 당장 선생님이 바라시는 대로 열심히 하는 건 어렵게 되었다. 약간 아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쉬워하는 나와 달리 미하일 선생님은 느긋한 모습이었다. 선생님은 노트를 기울여 보시더니 말씀하셨다.

“시간이 조금 있긴 하니까…… 차차 알아보면 되겠지.”

“…….”

“정 안 된다면 다른 방법도 있고.”

다른 방법?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생님은 내가 궁금해하는 게 재미있게 보였는지 쉽게 말씀해 주려 하시지 않았다.

때문에 난 나대로 다른 방법을 궁리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까 협연 이야기가 나왔을 때 떠올렸던 방법들이었다.

“저도 제 쪽에서 알아볼까요?”

“네 쪽에서?”

“예. 저번에 같이 일했던 베르너를 통해 에이전시와 이야기해 보거나…… 아니면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 같은 곳을 통해서요.”

이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서 나도 연주자로서 알게 된 인연들이 많았다. 그중 몇 명은 내가 부탁한다면 협연 자리를 구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그만큼 확실한 리턴을 보장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연주회를 해야겠지만.

리사이틀이라면 개인의 실수가 개인의 명예 실추로 끝난다. 하지만 협연이라면 그 책임이 오케스트라와 관계자 전원에게 번진다. 당연히 그 어떤 곳도 오로지 호의로만 음악학교 학생에게 협연을 허락하진 않는다. 연주자의 삶이란 늘 그런 법이지만, 한순간에 걸린 것이 너무나도 많다. 그런 생각을 하니 살짝 긴장이 되었다.

그렇게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미하일 선생님이 너털웃음을 터뜨리셨다.

“하하, 너무 그렇게 힘주고 있진 말려무나. 아까 네게 협연이 필요하다고 하긴 했지만 그렇게 급하게 해야 할 일은 아니니까. 연주회를 굳이 하지 않을 수도 있고.”

“……예?”

지금까지 협연에 대해 말씀하신 것 아니었나요? 무슨 말씀이신지 영문을 모르겠다.

의아해하자 미하일 선생님이 천천히 말씀하셨다.

“타티아나, 너는 무언가 배우거나 익숙해지는 게 굉장히 빠른 편이지. 정규 오케스트라와 연주회를 한다면 물론 좋겠지만, 여의치 않다면 리허설만 몇 번 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연습이 되리라 생각한단다.”

“아…… 그런 방법이.”

“그래, 그러니 걱정 말거라. 적당한 시간에 리허설 정도는 여러 곳과 상의해 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방금 전 말씀하셨던 다른 방법이란 바로 리허설만을 하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그리 나쁘지 않았다. 무대에 서는 건 분명 그 자체로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경험이 되겠지만, 사실 협연 자체는 리허설에서 이루어지는 게 많았으니까. 횟수로 밀어붙여서 리허설을 여러 번 한다면 무대에 한 번 서는 것보다 얻을 수 있는 게 많을지도 모른다.

“……잠시만요.”

하지만 잠깐 생각해 본 나는 그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선생님, 하지만 그건 오케스트라를 연습용으로 사용한다는 뜻이잖아요?”

“그렇지.”

“그거야말로 현실적으로 힘든 일 아닌가요……? 어떤 오케스트라가 연주회도 없이 저와 연습만 해 주겠어요?”

한두 명의 음악가라면 음악적 교류를 이유로 함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집단을 움직이는 것은 시스템이다. 모든 행동에 많은 자본이 들어가는 오케스트라에겐 늘 정당한 이유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 이유라면 오로지 연주회뿐이었다.

연주회 없는 단순한 리허설만 반복하는 건 오케스트라의 입장에선 무의미했다. 심지어 음악학교 학생의 연습용 리허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미하일 선생님의 대답은 달랐다.

“네 생각보다 많을지도 모르겠는데.”

“예?”

“하하하.”

시원하게 웃던 선생님은 노트를 탁 덮더니 옆에 내려놓으시곤 의자를 기울여 앉았다.

“아무튼 걱정 말거라. 그런 오케스트라를 구하는 것도 내 일이니까.”

“너무 무리하시는 일 아닌가요……?”

“별로. 괜찮단다.”

묘하게 즐거워하시는 모습이었다. 난 여전히 조금 의아한 부분들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걱정보다는 기대되는 마음이 더 많았다.

이야기를 정리한 미하일 선생님은 팔걸이를 톡톡 치더니 상체를 일으켰다.

“그럼 오케스트라 이야기는 이쯤 하고.”

지금까지 느긋하게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던 분위기가 갑자기 일변했다.

어렴풋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지금부터는 철저하게 현실의 이야기가 차지했다.

“레슨을 시작해 볼까? 네 실력이 어디까지 왔는지 한번 확인해 보고 싶구나.”

미하일 선생님은 늘 인자하고 의지가 되는 분이시지만 학생의 실력을 가늠하려 하실 땐 그 어떤 선생님보다 예민하고 철두철미하신 분이기도 했다.

의자에서 일어난 선생님은 내 쪽에 있는 피아노를 가리켰다.

“피아노 앞에 앉거라. 시간을 조금 줄까?”

난 대충 대답하지 않고 빠르게 컨디션을 살폈다. 팔꿈치를 살짝 들고 손목을 구부리며 힘을 줘 본다. 내 몸이 연주자로서 제대로 기능하는지 확인하는 데엔 굳이 스트레칭을 할 필요도 없었다.

단 몇 초 만에 확인을 마친 나는 가볍게 대답하며 일어섰다.

“괜찮아요.”

미하일 선생님은 시간이 필요하냐며 두 번 묻지 않았다. 대신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

며칠간은 반복된 하루하루의 일정을 보면 매우 단순하다. 거의 모든 시간이 연습실에서의 연습으로 구성되어 있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조금 더 깊게 보면 그 연습 내용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난 솔리스트로서 혼자 연주해야 하는 곡들의 레퍼토리를 다시 점검하고 완성도를 확인하는 건 물론이고, 협주곡들 역시 조금씩 늘려 나가기 시작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파이널 라운드까지 가게 된다면 연주해야 하는 협주곡은 총 세 곡. 그중 한 곡은 콩쿠르 협회 측에서 제시하게 되니 두 곡을 준비하면 된다.

아직 그 두 곡을 결정하진 못했다. 다만 되도록 많은 협주곡들을 봐 둘 필요가 있었다. 세상의 피아노 협주곡은 수백 곡도 넘기에 그 모두를 익힐 수는 없지만, 콩쿠르를 대비하는 피아노 연주자가 자주 연주하는 협주곡만 추린다면 그 범위가 확 좁아진다. 그 정도는 가능했다.

때문에 연습실에서의 내 일과는 반은 피아노 앞에서 연주하고 반은 악보를 읽는 것이었다.

그리고 연습실에서 나오면 벨카와 운동을 하기도 하고 드미트리에게 요리를 배우기도 했다. 이제 요리는 슬슬 취미라고 해도 될 정도로 손에 익었다.

갈수록 새로운 레시피들을 배우는 건 새 악보를 배우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난 노트를 가지고 음악연구를 하는 것처럼 레시피 노트도 따로 만들어선 드미트리가 가르쳐 주는 대로 공부했다.

물론 그렇게 온종일 공부만 하다 보면 지치기도 한다.

그렇게 지친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쇼핑 안 갈래? 타티아나.]

한적한 점심, 발렌티나로부터 날아온 메시지였다.

평소 말이 많은 스타일인 그녀가 이렇게 짧게 보내온 것만 보더라도 지금 만사 귀찮아져서 그냥 무조건 나가고 싶어 한다는 게 느껴졌다.

반나절 정도는 얼마든지 상관없었다. 마침 여름옷이 더 필요하기도 했고. 난 발렌티나에게 아나스타샤도 부르자고 전했고, 그녀는 곧장 아나스타샤에게도 확답을 받아냈다.

갑자기 외출 약속이 잡혔다. 난 피아노 건반을 덮고 나갈 채비를 했다.

차를 타고 1시간 정도. 모스크바 중심부의 오호트니 랴드 역 근처에서 내렸다. 크렘린 성벽 근처의 가로등에서 잠시 서성이며 기다렸다. 바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저마다 목적지를 향해 간다. 몇 명이 내게 시선을 주기도 했지만 잠시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안…….”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언제쯤 오는 걸까?

“녕!”

다시 시간을 확인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 크게 소리치며 와락 끌어안았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발렌티나가 웃고 있었다. 언제 살금살금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놀랐어? 타티아나.”

“심장 멎는 줄 알았어요.”

“어…… 큰일 날 소리 하네. 네 심장이 멎으면 내 것도 같이 멎는 거야.”

“……같이 죽어 주시는 거예요?”

“아니? 아나스타샤가 날 죽일 테니까.”

묘하게 진지한 어조로 말하던 발렌티나는 키득거리며 물러났다. 그 뒤편엔 아나스타샤가 한심한 짓 좀 그만하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근처에서 만나서 같이 온 모양이다. 난 웃으며 아나스타샤도 안아 주었다.

“왜 이렇게 오랜만인 것 같죠? 아나스타샤.”

“나도 그래. 한 일주일밖에 안 되었는데.”

계속 전화를 하긴 했지만 우린 서로 연습에 집중하느라 저번 갈라쇼 관람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발렌티나도 다시 옆에 달라붙더니 발을 동동 구르기까지 했다.

“나 진짜 일주일 내내 연습실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죽는 줄 알았어. 간신히 숨 좀 돌리러 나왔다니까?”

그녀는 정말 어디 갇혀 있다가 간신히 탈출한 사람처럼 말했다.

아마 크게 다를 바 없었으리라. 발렌티나에게 기대를 거는 사람들도 많았고, 그녀는 그 기대를 마냥 저버리는 성격이 되지 못했으니까. 분명 어느 정도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전까진 스스로가 만든 연습의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을 것이다.

해야 해서, 또 하고 싶어서 하지만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다. 때문에 발렌티나는 투정 부리듯 말하고 있었지만 여기 지난 일주일간 연습실에 틀어박혀 있던 건 우리도 똑같긴 했다.

“나도 비슷해.”

“저도요.”

“역시 다들 비슷비슷하네? 하…… 정말 너무해. 한창 놀아야 할 시즌에 꿈도 못 꾸고 있으니. 사람 사는 거니 이게?”

작년 여름 방학만 하더라도 조금 더 여유가 있었지만 이번엔 아니다. 발렌티나도 여행 같은 건 계획이 없는 것 같았다.

이런 여름방학은 생전 처음이라는 듯 말하는 발렌티나를 보며 난 차마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반면 아나스타샤는 거침없이 말했다.

“사람이니까 해야지. 사람이 아니면 할 필요 없어.”

“너…… 은근히 돌려 욕하는 거 같은데?”

“안 돌렸는걸?”

“돌리는 척이라도 해!”

발렌티나가 왁 하고 불평했지만 아나스타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절대로 말을 돌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니 이제야 우리들의 시간이 온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난 발렌티나의 팔을 살짝 잡으며 웃었다.

“아하하, 사람이니 쉴 때도 있어야죠. 그렇죠?”

“응, 응. 그렇지.”

“자, 가요. 오늘은 신나게 놀죠.”

난 옆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우리가 모인 역과 똑같은 이름의 오호트니 랴드 쇼핑몰이 있었다.

명품 등이 많은 굼 백화점이나 줌 백화점과 달리 일반적인 가격대로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물건들이 많이 있는 곳이었다. 학생들이 쇼핑으로 스트레스를 풀러 오기엔 딱 좋은 놀이터이기도 했다.

먼저 발렌티나를 이끌고 발걸음을 옮겼다. 아나스타샤가 천천히 뒤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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