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41화 (641/1,277)

##  641화

역에서 길을 따라 마네즈나야 광장을 거치면 곧장 오호트니 랴드 쇼핑몰이 나온다.

6층의 커다란 건물이었다. 난 이 쇼핑몰의 화사한 색감을 좋아했다. 친구들과 함께 온 건 몇 번째였더라?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상당히 많이 왔었다.

우린 쇼핑몰 안으로 들어서선 약속이라도 한 듯 의류매장들부터 돌아다녔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이때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여름을 맞이해 나온 신상들을 독수리처럼 살피고 다녔다.

난 그저 여름용 블라우스가 한 벌 필요했을 뿐이라서 적당히 사고 싶었는데, 아나스타샤가 몇 곳이나 데리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권하는 바람에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사고 말았다. 그래도 그리 비싼 메이커들이 입점해 있는 곳이 아니라서 적당히 잘 산 것 같다. 두 사람도 나랑 비슷한 정도였다.

여름옷들은 부피가 얼마 안 나가서 좋다. 우린 굳이 짐을 맡기지 않고 가지고 다니면서 기분을 냈다. 새로 산 물건들을 직접 가지고 다니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기도 했다.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체력이 약한 내가 슬슬 힘들어질 시점이었고 내 친구들은 정확하게 내 컨디션을 파악했다. 같이 다닌 시간이 많다 보니 이젠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그래도 나만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훨씬 더 신났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약간 미안하기도 했다. 요즘 운동에도 시간을 꽤 투자하고 있긴 한데, 아무래도 약해져 있던 시간이 길다 보니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꾸준히 계속해야 두 사람과 비슷하게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원하다.”

우린 3층 식당가의 카페에 앉아 음료수를 놓고 마시며 쉬었다. 밑의 층과 달리 조금 한적한 분위기에, 편안하게 듣기 좋은 음악까지 나오고 있었다.

잡담을 나누다가 잠시 시선을 돌린 아나스타샤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이 음악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이걸 모른다고? 요즘 제일 잘 나가는 음악이잖아.”

발렌티나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모르는 건 모르는 거라며 웃어넘길 뿐이었다. 사실 나도 잘 몰랐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다.

발렌티나는 친구들이 최신 문화에 뒤처지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바로 음악을 검색했다.

“이 가수 다른 곡도 있어. 들어봐 봐. 난 이게 제일 좋더라.”

그녀가 틀어 준 음악은 주변 소음이 묻어 흐릿하게 들렸다. 하지만 스마트폰 스피커로도 명쾌하게 들리는 가수의 목소리와 그 뒤로 들리는 악기들의 리듬은 엉켜드는 소음을 떨쳐 내고 우리 귀에 닿았다.

내 머리는 이 와중에도 이 곡의 코드와 흐름 등을 자동적으로 분석 중이었다. 직업병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아나스타샤는 처음엔 약간 시큰둥하게 듣더니 노래 중반쯤 와서야 인정하듯 말했다.

“괜찮은데?”

“그렇지? 자본주의의 물을 먹은 말랑말랑한 음악이라 그런지 역시 좋아.”

“……그게 뭐예요?”

무슨 음악이요?

발렌티나는 팝 음악을 들을 때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처음 들어 보는 표현이라서 약간 당황하긴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재미있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저런 팝 음악이 시대의 흐름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하니까.

스스로도 한 말이 웃긴지 발렌티나는 킥킥거리며 물었다.

“타티아나 너도 팝엔 관심이 별로 없지?”

우리가 평소에 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음악 이야기이지만 클래식 외의 장르를 묻는 일은 정말 드물었다.

난 클래식이 아닌 음악에도 감동을 느끼고 좋아하긴 하지만 즐겨 듣거나 하진 않는다. 내 취향은 굉장히 예전 시대에 존재했다.

“취향에 맞진 않았어요.”

“음…… 결국 어쩔 수 없나 봐. 우리는.”

발렌티나는 동감이라는 듯 웃었다. 어쩔 수 없다. 그 말이 맞았다. 21세기에 태어나서 21세기의 음악을 들으려고 해도 자꾸만 귀가 19세기로 향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커피를 홀짝이던 아나스타샤는 말을 헷갈리게 하지 말라는 듯 물었다.

“말랑말랑한 음악이 좋다지 않았니?”

“그건 간식으로 먹는 젤리 같은 거지. 알면서?”

“……그냥 말을 않을게.”

그래도 발렌티나는 팝 음악도 자주 듣는 편이었다. 간식처럼 먹으면 맛있는 걸까? 나도 가끔 생각나면 들어 볼까 싶다.

발렌티나는 스마트폰을 집어넣더니 기지개를 쭉 켰다. 고양이가 나른하게 몸을 펴는 것 같다.

“하루 온 종일 쇼팽, 쇼팽, 쇼팽만 연습하다가 이런 곳에서 커피 마시면서 젤리 같은 음악 들으니까 기분 좋다.”

일주일 내내 틀어박혀 있었다는 건 바로 쇼팽 때문이었다. 난 다른 가수의 음악 말고 발렌티나의 음악에도 흥미가 생겨서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요즘은 쇼팽만 하시나요?”

“응. 내가 말 안 했었나? 나 쇼팽 콩쿠르 나갈 거야.”

“아.”

당연히 기억한다. 우리 중에서 오직 발렌티나만이 자신이 어느 콩쿠르에 나갈지 밝혔었으니까.

그녀는 이젠 슬슬 말해 달라는 듯 테이블 위로 얼굴을 내밀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맞아…… 그래서 너희는? 어쩔 건데? 아직도 안 정했어?”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단어들을 고르고 있는데, 그보다 먼저 아나스타샤가 대답했다.

“난 정했어.”

“어디로?”

“쇼팽 콩쿠르로.”

“응?”

발렌티나가 의문을 표했다. 의외라는 듯하다.

“왜?”

“왜긴 왜겠어? 당연히 널 이기기 위해서지.”

“얘 좀 봐 진짜 미쳤어! 그런 이유라고?”

당연히 농담이겠지만 발렌티나는 질색하며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그녀를 괴롭히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웃어 댔다.

난 그녀의 선택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처음엔 약간 의아했다. 아나스타샤라면 그 강렬한 테크닉을 살릴 수 있는 곡을 자유롭게 골라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나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쇼팽을 택했다.

그 선택에 깊은 고민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되짚어 본 나는 이윽고 그녀에게 말할 수 있었다.

“현명한 선택인 것 같아요. 아나스타샤.”

“그러니?”

아나스타샤는 평이하게 대답했는데, 발렌티나가 발칵 화를 냈다.

“쟤가 날 잡으러 온 게 현명해!?”

“그런 말이 아니에요.”

난 차분하게 내가 아는 아나스타샤라는 피아노 연주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나스타샤는 알캉을 연주하실 정도로 테크닉적인 완성을 이루었지만…… 사실 그 곡들은 콩쿠르에 내보내기엔 약간 밸런스가 좋지 않죠.”

한 음악엔 여러 가지 기준이 주어진다. 길이, 음악성, 테크닉, 난해함 등등 정말 수많은 기준들이 음악을 평할 때 사용된다.

물론 어느 한쪽에만 특화되어 있어도 그게 탁월하다면 명곡으로 인정받지만, 밸런스가 좋다는 평은 그 모든 수준이 어느 수준 이상을 가리켜야만 받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알캉의 곡들은 밸런스가 좋다고 하긴 어려웠다. 특히 콩쿠르 같은 엄격한 자리에 내놓으면 테크닉 위주의 실력을 뽐내기 위한 선곡으로 오해받기 딱 좋다.

아나스타샤 역시 그 부분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곡들을 택해도 되겠지만, 그럴 바에야 차라리 쇼팽으로 집중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며 말했다.

“쇼팽에도 강점이 많으시니까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

“그럴까?”

“물론이죠.”

난 아나스타샤가 연주하는 쇼팽을 여러 번 들어 본 적 있었다. 그녀는 굉장히 화려하고도 에너지 넘치는 쇼팽을 연주한다. 난 그러한 해석도 인기가 많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그저 미소만 짓더니 이번엔 반대로 내게 물었다.

“넌 어떻게 정했니? 타티아나.”

“아, 전…….”

“잠깐만, 내가 맞혀볼게.”

막 대답하려는데 말을 채간 아나스타샤는 스스로 한 질문에 스스로 답했다.

“퀸 엘리자베스로 갈 거지?”

정확했으니 달리 할 말은 없었다.

“……예.”

“역시 그렇구나.”

이미 다 예상했다는 어투. 아마 그녀가 자신의 콩쿠르를 정할 시점에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나스타샤는 쇼팽 콩쿠르를 택했다. 따라서 이제 와서 듣고 바꿀 생각은 없다.

그렇게 각자의 이유로 콩쿠르를 택한 것에 대한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약간 걱정된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그녀가 왜 그런 눈빛을 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올해 초 쇼팽을 연주하고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졌던 일 때문이었다.

물론 나에겐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었지만, 친구들이 보기엔 절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쇼팽을 피해 갔으면 하는 바람과, 내가 심적으로 상처를 입고 있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마음이 동시에 느껴진다.

잠자코 있던 발렌티나가 가만히 내 손을 잡으며 물었다.

“타티아나, 괜찮은 거지?”

그녀는 내가 일어난 뒤에도 늘 밝은 모습으로 대해 주었다. 하지만 속으론 굉장히 충격이었을 터다. 난 발렌티나에게 정말 미안해져서, 다시 반대편 손으로 그녀의 손등을 덮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전 괜찮아요. 그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를 보고 있다 보니 다양한 레퍼토리를 써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랬구나. 솔직히 쇼팽만 반복하는 건 지겹긴 해.”

그제야 발렌티나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쇼팽이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는 목소리엔 그럼에도 열정이 가득했다.

콩쿠르 참가에 대한 의사는 이렇게 서로 다 알게 되었다.

“그럼 우리 세 사람은 일단 정해진 거네? 나랑 아나스타샤는 쇼팽. 타티아나는 퀸 엘리자베스로.”

“그렇게 되었네요.”

“세 명이 같은 콩쿠르에 나가도 재미있었을 것 같긴 한데, 솔직히 우리끼리 싸우면 다른 애들만 득 보잖아? 그치?”

우리 세 명이 모두 입상하지 않는 이상 별 상관 없을 것 같긴 한데…… 어쨌든 발렌티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나가는 게 유리하다는 논리였다.

어떻게 생각하든 별 상관 없긴 했다. 어차피 각자의 이유로 정한 결과였으니, 이젠 거기에 대해 최선을 다하면 될 일이므로.

아나스타샤는 빨대를 입에 물고 곰곰이 무언가 생각하더니 중얼거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다른 애들은 어떻게 정했는지 모르겠네?”

“라리사는 안 나갈 거라 했었고…… 바르바라가 쇼팽 생각 중이랬던가?”

“묘하게 퀸 엘리자베스는 어렵게 여기는 것 같아.”

“실제로 어렵기도 하잖아?”

내년에 열릴 두 국제 콩쿠르는 그 위상은 서로 비슷하지만 예선과 결선 사이에 반년이나 시간을 두는 쇼팽 콩쿠르에 비해 한 달간의 강행군으로 끝내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쪽이 보다 힘들고 규칙도 복잡하다고 여겨지긴 했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승우 한이나 리처드 이야기는 못 들었네.”

“그 애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더니 대체 죽었는지 살았는지 연락도 없더라? SNS도 안 하니까 알 수도 없고.”

발렌티나가 투덜거렸다. 난 두 유학생이 아예 아무 연락도 없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살짝 끼어들어 말했다.

“아…… 얼마 전에 전 리처드와 전화 통화 했었어요.”

“어? 정말? 뭐래?”

사실 길게 통화한 건 아니었다. 나나 그나 서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신나서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므로.

난 그냥 들은 것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리처드와 한승우가 같이 한국에 있다는 것 정도.

물론 그 정도로 충분했다. 발렌티나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같이 있다고? 정말?”

“예, 리처드가 놀러 갔다고…….”

“좋겠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지금 연습실의 나무가 될 뻔했던 건 우리뿐이야?”

“그런 건 아니지 않을까요…….”

그쪽에서 세연도 같이 만나고 있다고 했으니 분명 연주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후로 계속 놀기만 했을까? 그렇진 않겠지.

“에르네스트는?”

마지막으로 생각났다는 듯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난 고개를 저었고, 발렌티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린 에르네스트가 콩쿠르를 어떻게 하겠다고 분명히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없었다.

“작곡에 집중 중이니까 안 나갈려나……?”

“그렇게 넘기기엔 아쉬운 기회이지 않나요? 그리고 구세프 선생님은 피아노와 작곡의 병행을 허락하셨지 작곡에만 매진하는 걸 허락하신 게 아니에요.”

“그런 거야?”

발렌티나와 난 이런저런 추측을 해 봤지만 결국 답이 바로 나오진 않았다.

그런 우릴 보고 있던 아나스타샤는 간단한 해답을 냈다.

“전화해서 물어볼까?”

“지금요?”

“응. 지금.”

너무 무턱대고 나온 이야기가 아닌가 싶긴 한데, 지금 굉장히 궁금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조심스레 동의하자 아나스타샤가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