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2화
에르네스트는 구부정한 자세로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상태로 오른손으로는 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왼손으로는 보면대 위의 악보에 음표를 그려 넣었다.
평소 반듯한 자세를 지향하는 그에게 이런 자세는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소리도 제대로 내기 어려울뿐더러 펜을 쥔 왼손을 높게 들고 끄적이다 보니 손아귀가 뒤틀리려고 한다.
흔히 피아니스트는 양손잡이에 절대음감이 많다는 선입견이 있다.
에르네스트가 피아니스트로서, 또 작곡가로서 보이는 무시무시한 기량을 본 사람들은 종종 그런 선입견을 그에게도 접목시키곤 했다. 에르네스트는 피아니스트로서 지닐 수 있는 온갖 기술적 재능을 타고난 집약체처럼 보이곤 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둘 다 아니었다. 그가 지닌 기술적인 재능은 남들보다 조금 더 길고 곧은 손가락과 잘 지치지 않는 유연한 손목 정도였다.
때문에 그가 지금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그 몇 가지 안 되는 재능을 완벽한 무기로 다룰 줄 알기 때문이었다.
맨몸의 인간이 자신의 육체를 완전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가. 에르네스트가 생각하기에 피아니스트로서 타고나야 하는 재능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또 엇나갔네.”
그러나 지금만큼은 왼손으로 글씨도 잘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에르네스트는 왼손으로 잘못 그린 음표를 대충 찍찍 그어 지우고는 바로 그 밑에 다시 음표를 그렸다. 이렇게 되면 한눈에 잘 안 들어와서 짜증 난다.
언젠가 익숙해질 때까진 이렇게 악보에다가 실수를 해 가면서 연습하는 수밖에 없었다. 따로 시간을 내어 왼손 글씨를 연습할 것도 아니니.
“…….”
에르네스트는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피아노 앞에서 몸이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해서 연습하는 건 늘 해 왔던 일이다. 그는 이런 일에 자신 있었다.
틀린 음표를 고친 그는 다시 건반을 누르며 작곡을 계속해 나가려 했다. 오늘 그는 이 곡을 마무리 지어야만 했다.
살짝 흐트러졌던 머릿속 선율을 붙잡고 다시 그 끝을 악보 위에 옮기려는 찰나, 예상치 못한 절묘한 타이밍에 슈만의 음악이 귀를 통해 파고들며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다.
“…….”
에르네스트는 눈가를 찡그리며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 전화벨 소리는 신나게 울리고 있었다.
슈만의 음악은 하필이면 또 머릿속 선율과 조성도 비슷해서 더더욱 엉망진창으로 달라붙어 버렸다.
자기도 모르게 원망이 발신자 쪽으로 향한다. 하지만 전화를 꺼놓지 않은 그의 책임이 가장 크다는 건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안다.
에르네스트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스마트폰을 들었다. 그리고 화면에 올라와 있는 아나스타샤의 이름을 보고는 멈칫했다가, 전화를 받았다.
“어.”
짧게 말하니 아나스타샤 쪽에서도 좋은 말이 나올 리 없다. 그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 전화 좀 반갑게 받아 줄래?
“충분히 반갑게 받았는데.”
에르네스트는 괜히 유치하게 반박했다. 아나스타샤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핀잔을 주었다.
- 너 다른 애들한테도 그러니?
“뭐?”
- 나한텐 상관없는데 다른 애들한텐 그러지 말라고. 혹시나 싶어서.
다른 애들이라고 하면 발렌티나나 타티아나 말인가?
에르네스트는 그간 자신의 언행을 돌이켜보았다. 잘 생각해 보니 의도하든 그렇지 않았든 아나스타샤의 입장에선 차별하지 말란 이야기가 나올 만도 했다.
그런데 그녀의 요구는 자신의 대우에 대한 불평이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 요구의 저의를 읽어내려다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지금처럼만 하라는 것 같긴 한데, 그 말대로 했다간 후회할 것 같았다.
이럴 땐 보통 아나스타샤가 옳던데. 에르네스트는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뭐라는 거야 진짜…… 알았어. 대충 받아서 미안해. 지금 좀 바빠서 그랬어.”
- 바빠? 뭐 하는데?
“뭐 하긴, 악보 붙잡고 있지. 넌 뭐 하는데?”
- 음…… 나도 비슷해. 계속 피아노 연습하고 있었으니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가 끝나고 나서 9학년들에겐 보다 현실적인 긴장감이 닥쳐왔다. 이제 곧 가을이 오면 10학년이 되고, 내년엔 그 정도 되는 규모의 콩쿠르에 올라갈 수 있게 된다.
바로 나가지 않고 한 타이밍 넘기더라도, 성인 연주자들의 대열 맨 끝자락에 발을 걸치게 된다는 것에 대한 분위기의 변화가 모두에게 와닿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열여섯 살이나 열일곱 살이나 그게 그거긴 한데…… 어쨌든 기분이란 건 중요한 거니까.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보람찬 방학이네.”
- 보람차니?
“아무튼…… 그래서 무슨 일인데?”
슬슬 용건을 말해 주었으면 해서 에르네스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나스타샤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분명히 물었다.
- 내년에 대형 콩쿠르 두 개 열리는 거, 어디에 나갈지 정했니?
그 말을 듣자마자 에르네스트의 머릿속엔 온갖 생각들이 짓쳐들어왔다.
전화가 걸려왔을 때부터 느꼈던 것들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를 라이벌 그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늘 하는 내기 같은 장난이 아니라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기준으로 그를 이기고 싶어 한다.
그 기준은 어떻게 보아도 피아노뿐이었고, 큰 무대라면 더더욱 좋다.
자존심 앞에선 남녀가 없고 다른 여타 스포츠와 달리 음악의 세계에서의 우열에도 남녀가 없다.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가 서서히 내미는 날카로운 칼날의 서슬 퍼런 예기를 느끼고 있었다.
지금 그 칼날이 턱밑까지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결정을 말해 준다면 거기에 맞추어 대응할 생각인가? 따라와서 끝장을 볼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리 무섭거나 긴장되진 않았다. 예상했던 것이기 때문일까.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이렇게 직접 물어봐 주는 게 고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왜, 알려 줘?”
- 응.
“알려 주면 어떻게 할 건데?”
- ……응?
약간 호기로운 기분이 들어서 한껏 떠보듯 물어보자 아나스타샤는 똑같이 되받아치지 않고 되물었다.
- 뭘 어떻게 해?
“…….”
경기장을 고르라는 말 아니었나?
에르네스트는 또 헷갈려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아나스타샤의 태도에 아리송한 부분이 많아서 아무것도 확정 짓지 않고 있었던 터라 더더욱 어지럽다.
정말 순수한 의도로 궁금했던 것이라면 지금까지 했던 생각들이 모두 망상에 불과해진다.
에르네스트는 복잡하게 굴지 않기로 생각하며 말했다.
“아니야…… 그냥, 그런 질문이라면 묻기 전에 먼저 말해 주는 게 맞지 않아?”
- 먼저 말해야 하는 거니?
“싫으면 관둬.”
흥정하려는 생각은 없었는데 말을 하다 보니 그런 식으로 나왔다. 에르네스트는 살짝 후회하면서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나스타샤는 생각외로 흔쾌히 대답해 주었다.
-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나갈 거야.
에르네스트는 스마트폰을 귀에 붙인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에게 사전에 들은 바는 없지만 음악이라면 많이 들었다. 그런데 퀸 엘리자베스? 예상외였다.
“의왼데.”
- 의외라니?
“혹시 퀸 엘리자베스에 나가서 알캉을 연주할 생각이야?”
아나스타샤는 근래 테크닉적으로 큰 성장을 이루었다. 그녀의 연주를 들어 본 에르네스트는 예전 생각을 하다간 큰코다칠 거란 사실을 분명히 직시했다.
지금 당장 알캉을 놓고 아나스타샤와 속주 대결을 한다면 이길 자신이 없었다. 물론 그녀의 주 무기에 정면으로 마주할 생각은 없으니 그런 대결은 성사될 수 없겠지만, 그 정도로 아나스타샤는 만만찮은 피아니스트였다.
하지만 그녀의 기술은 특정한 목적과 공격성을 머금고 있다.
“난 네가 콩쿠르를 목적으로 그 곡들을 익히진 않았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피아니스트와의 대결을 염두에 둔 기술적 숙련, 그건 당연히 피아니스트들끼리 자웅을 겨루게 되는 콩쿠르에서도 중요시 여겨지는 부분이다. 그러나 청중과 심사위원에겐 전혀 향하지 않고 오로지 같은 피아니스트에게 향하는 음악은 평가에 불리한 점이 훨씬 많았다.
때문에 진지하게 콩쿠르를 생각한다면 알캉을 잠시 눌러 놓고 보다 차분하게 연주할 수 있는 쇼팽을 택하는 쪽이 나으리라 생각했다.
아나스타샤는 잠시 말이 없더니 삐뚜름하게 대답했다.
- 무슨 소리니? 내가 알캉으로 미국 가서 대상 받은 거 잊었어?
“아, 그렇긴 하지.”
미국보단 벨기에가 훨씬 더 딱딱하고 엄격한 기준으로 네 음악을 평가하리란 이야기는 굳이 더 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 역시 그 정도도 모를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는 대답과 거기에 대한 생각 등으로 침묵하던 에르네스트는 상황이 어색해지기 전에 말을 꺼냈다.
“아무튼…… 그럼 나도 퀸 엘리자베스로 할까?”
- 뭐? 왜?
“네가 거기 나간다고 하니까.”
어쩌면 그녀가 바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해 본 말이었는데, 벌컥 화를 내는 목소리가 귀를 찌른다.
- 바보 같은 소리 마. 내 신경을 왜 써?
무어라 변명하기도 전에 아나스타샤가 빠르게 쏘아붙였다.
- 예전에 네가 네 입으로 했던 말도 잊었니? 친구를 따라서 선택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했잖아?
“……그랬었지?”
- 그럼 그대로 지켜. 신경 쓰지 말고 하라고.
딱 부러지는 목소리.
에르네스트는 여전히 아나스타샤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모든 것을 망치려 들려고 하진 않는다는 것 정도는 전해졌다.
조금 미안해졌다. 에르네스트는 사과의 의미로 원래 말할 생각 없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래도 상관없었어. 난 두 콩쿠르 모두 나갈 생각이거든.”
사실 꽤 오래전에 결정했던 일이었다. 이미 구세프와 상담을 통해 어느 정도 계획도 잡아 두고 있었다.
물론 아나스타샤로선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기성을 냈다.
- 뭐라고? 둘 다?
“그래. 쇼팽도 퀸 엘리자베스도.”
자신감에 미친 소리처럼 들릴 게 분명했다.
이렇게 대형 콩쿠르들이 겹칠 때 모두 참가하는 연주자들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전 세계적으로 따져 보아도 몇 명에 불과했다.
에르네스트가 또래 중에선 좋은 기량을 보여 주고 있긴 하지만, 최연소 나이에 두 거대 콩쿠르에 모두 나가겠다는 건 오만하게 비춰질 여지도 상당했다.
에르네스트로선 단순하게 피아노로 모든 걸 끝내겠다는 생각이 아니었으므로 승산을 보고 도전한 것이었지만, 친구들이 보기엔 어떨지 모르겠다. 어쩌면 쓴소리라도 조금 들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아나스타샤가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엔 실망이나 비난이 담겨 있지 않았다. 뭔가 시원하다는 듯,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 우리가 이럴까 저럴까 고민할 때도 넌 고민이 없구나.
“훨씬 더 많이 고민하고 결정한 거니 걱정 안 해도 돼.”
- 걱정? 아하핫, 무슨 걱정? 절대 안 하니 걱정 마.
서로 걱정 말라고 하는 이상한 광경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저도 모르게 나지막이 웃었다.
아나스타샤는 잘 알겠다는 듯 이어 말했다.
- 그럼 나도 솔직히 말할까? 난 쇼팽 콩쿠르에 나갈 생각이야.
어쩐지 조금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그냥 장난쳐 본 것이었다.
“그럼 아까 그건 거짓말이었네.”
- 아니?
“?”
- 네가 거꾸로 질문할 때 내가 어디에 나갈 거냐고 묻지 않았잖아?
무슨 말장난인가 싶어 인상을 쓰며 이전에 했던 이야기들을 떠올려 본 에르네스트는 곧 그녀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주어를 분명하게 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단둘이 이야기하면서 그렇게 빠져나가는 건 말이 안 된다.
한마디 하려던 에르네스트는 그다음 이어진 아나스타샤의 말에 당황했다.
- 퀸 엘리자베스에 나가겠다고 한 건 타티아나 이야기야.
“……타티아나?”
- 응. 옆에 있거든.
둘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어? 피아노 연습하고 있었다는 것도 거짓말이었나?
에르네스트는 전화 너머로 한 방 맞은 듯한 기분으로 멍하니 섰다. 그 당혹스러움을 아나스타샤는 놓치지 않았다.
- 네가 둘 다 나갈 거라고 하니까…… 엄청 궁금해하는데? 전화 바꿔 줄까?
“……잠깐만. 갑자기 바꾸지 말…….”
- 여기 있어. 타티아나.
바람 스치는 소리, 허공을 스치다가 다시 무언가 부드러운 것에 착 하고 닿는 소리.
그리고 곧 단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에르네스트, 진짜예요?
그 목소리는 의아해하지도 추궁하지도 않았지만 에르네스트는 당황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네.”
- ???
타티아나의 당혹스러움이 전파를 타고 전해져 왔다. 에르네스트는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머리를 쓰다가 그냥 기절해버리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