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3화
아나스타샤가 하는 전화 통화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가 주고받는 대화로 어렴풋이 에르네스트가 두 콩쿠르에 모두 참가하겠다고 했다는 것 정도는 추측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든 것은 부러움이었다.
그의 실력은 물론이고 그 자신감도 나로선 참 상상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터무니없이 뜬구름 잡는 희망사항도 아니다. 예전엔 오만함이 조금 앞서 있어서 걱정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지금 에르네스트는 충분히 객관적이고 철저한 계산 끝에 그런 계산을 내렸으리라.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것뿐인데도 난 그의 결정을 듣자마자 막연히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호기심이 든다.
정말로 두 거대 콩쿠르에 동시 참가해서 어느 정도 결과를 낼 생각이라면 준비하고 있는 것들이 상당히 많을 텐데, 어디까지 준비한 걸까? 심지어 작곡 공부까지 하면서.
퀸 엘리자베스에도 온다면 분명 같은 무대에서 제한된 자리를 두고 경쟁할 수도 있겠지. 그런 생각만 해도 심장이 뛴다.
공평한 시간을 살면서 음악가란 어디까지 가능한지에 대해 에르네스트는 살아 있는 증명이기도 했다. 난 그 가능성에 흥미가 많았고, 그 결과를 직접 보고 싶었다.
“…….”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이라곤 전부 그런 생각뿐이었다. 궁금하고 관심이 가고 고양된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난데없이 거리를 두는 경어를 쓰면서 날 당황하게 했다.
“……저기.”
지금까지 내가 경어를 써 온 건 모두와 어느 정도의 선을 지키고 있기 위함이었다. 마음이 느슨해져서 멋대로 할 수 없도록, 스스로를 경계하고자 하는 울타리였다.
물론 이제는 가끔 울타리를 넘나들기도 한다. 따지고 보자면 그냥 격식을 차리는 경어가 익숙해져 버린 탓에 바꾸지 못하는 것이 훨씬 더 컸다. 친구들 역시 내가 그들을 정말 아끼고 있음을 잘 알기에 별말 않고 있고.
그런데 막상 반대로 에르네스트로부터 거리감을 느끼니까 약간 충격이었다. 갑자기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생각부터 들고 말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주저하고 있자 에르네스트 쪽에서 먼저 대답이 돌아왔다.
- 진짜지, 그럼 가짜겠어?
시치미를 뚝 떼는 어투. 방금 전의 모든 건 없던 일로 하겠다는 의미였다.
이제 와서 그의 의도를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잠자코 따라 주기로 했다.
“그, 그렇죠? 방금 듣고는 조금 놀라서…….”
- 너무 까부는 것 같아?
“예? 아, 아뇨! 전혀요!”
왜 이렇게 말하기 어렵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그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본다면 일정이 겹치는 두 콩쿠르에 참가한다는 걸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아니었다.
오해를 사는 일 없이, 분명한 진심이 들리도록 이야기했다.
“부럽다고 생각했어요. 전…… 그렇게 전부 참가하는 건 상상도 못 했으니깐요.”
결정에 대한 어떤 평가를 떠나서 그냥 내가 느끼는 기분 그대로를 전했더니 에르네스트로서도 그게 거짓이 아님을 이해한 듯했다.
잠시 후 에르네스트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 그런 말을 할 줄은 나야말로 상상하지 못했네.
“그렇다면 어떤…….”
다른 말은 어떤 말이 있을까 잠시 궁리해 보던 내 추리는 에르네스트가 혹시 내게서 일반적인 반응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단 곳에 닿았다.
약간 걱정하는 것 같은 뉘앙스가 느껴지긴 했었어.
“제가 나무라기라도 하리라 생각하셨나요?”
- ……
에르네스트는 말이 없다.
난 그가 당황해서 자기도 모르게 경어로 답했다는 걸 확신하고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하하핫, 설마 그래서? 정말로?”
- 뭐가? 왜 웃는데?
“그…… 후후.”
계속 모르쇠로 일관하는 그를 조금 놀리고 싶기도 했지만, 지금 옆에서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말을 잘못 할 순 없었다. 단어 한두 개를 잘못 말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들은 전부 유추해내고 말 테니까.
아나스타샤가 퀸 엘리자베스에 출전하겠다고 장난친 것에도 넘어갔던 것 같고, 에르네스트에게 장난을 치는 건 여기에서 끊는 게 좋을 것 같다. 난 웃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 ……아나스타샤 아직 옆에 있지?
“예. 발렌티나도.”
- 부탁할게.
무엇에 대한 부탁인진 더 묻지 않아도 명확했다.
어차피 난 그에게 맨날 경어를 쓰니까 이상하다고 보면 내 쪽이 훨씬 이상했고, 잘못 말한 실수에 대해서라면 류보비가 날 잘못 불렀던 것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그를 안심시켜 주기로 했다.
“물론이죠. 전 입이 무거운 편이랍니다.”
- 나도 알아.
에르네스트는 중얼거리더니 얼른 더 중요한 주제를 가져왔다.
- 아무튼……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로 결정했다고?
“예. 아마 바뀌진 않을 것 같아요.”
- 그래……
“벨기에의 무대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그랬으면 좋겠다. 그 정도 되는 무대에서 친구와 진심으로 경쟁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었다.
물론 경쟁에 따른 결과가 정해지겠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더라도 에르네스트가 날 시기하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그가 명예를 아는 연주자로서 얼마나 믿음직스러운진 이미 2년 전에 확신했다.
물론 나 역시 그 상황이 닥친다 하더라도 생각이 바뀔 것 같진 않았고.
그렇다면 남는 건 무대에 섰다는 기록과 결과였다. 그 모든 것들은 역사에, 그리고 기억에 영원히 새겨지게 되겠지.
수십 년 후에도 에르네스트가 날 그런 강한 연주자로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그 시간에 있든 없든.
- 글쎄, 그 전에 학교에서 보게 되잖아.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대충 얼버무리며 답했다. 난 다시 한 번 재촉했다.
“확답까진 안 바랄게요. 긍정적으로 말해 주세요.”
- 응. 긍정해.
“그게 뭐예요?”
엉뚱한 소리에 웃어버렸다.
에르네스트도 따라 웃더니 슬슬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는지 천천히 말했다.
- 어쨌든…… 애들이랑 놀다가 이야기 나와서 물어본 거라면 이야기 끝났지?
“아,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았네요. 미안해요.”
- 아니 뭐…… 아나스타샤가 폰 달라고 하고 있지 않나 해서.
“글쎄요? 궁금해하고 있는 것 같긴 해요.
- 절대 말해 주지 마.
“후후, 그럴게요.”
옆을 보니 두 사람은 각자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지만 신경은 이쪽으로 향해 있는 것 같았다. 정말 이젠 전화를 끊을 때였다.
“그럼 이만 끊을게요. 에르네스트.”
- 그래.
문득 그의 미소가 스쳐 지나간다.
- 네 연주 기대할게.
에르네스트는 짧게 고하고는 툭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난 잠잠해진 화면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아나스타샤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받으며 물었다.
“궁금하네. 뭐야? 입을 무겁게 해야 할 이야기라니?”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방금 내가 입 밖으로 뱉은 모든 말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서 말해 보라는 듯 은근한 눈빛이 날 간지럽히는 것 같다. 잠깐 정신을 놓으면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어버릴지도 모른다. 난 일부러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말했다.
“신의를 지켜야 하니 안 돼요.”
“나에 대한 신의도 지켜 줘. 타티아나. 나 믿지?”
“믿고 있어요.”
“……응?”
“아나스타샤라면 절 비겁자로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조금 비겁했을까? 내 말에 아나스타샤는 할 말을 잃고 머뭇거리더니 다시 빨대를 입에 물었다. 별로 안 남은 커피가 순식간에 사라져 간다.
발렌티나가 갑자기 감탄했다는 듯 끼어들었다.
“너 정말 말 잘한다, 타티아나.”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는걸요.”
“아냐, 아나스타샤를 입 다물게 하는 건 세상에서 네가 제일 잘할…… 아! 커피 튄다고!”
막 신나서 이야기하던 발렌티나를 향해 아나스타샤가 빨대를 들고 찌르려 했다. 빨대는 별로 아프지 않겠지만 그 끝에 맺힌 커피 방울이 두려운지 발렌티나는 허둥지둥 옆으로 피신했다.
발렌티나를 혼내준 뒤에야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젓더니 조금 더 느긋하게 의자에 앉으며 다리를 교차시켰다.
“뭐 어쨌든 상관없긴 해. 그 애는 두 콩쿠르에서 우리 모두를 상대해야 할 테니까.”
얕보고 있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낮은 목소리. 난 잠시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게 전화를 바꿔 주기 전에도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쓰지 말고 하라고. 그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르네스트가 했었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두 사람 역시 서로의 말과 음악에 영향을 받으며 바뀌어 가고 있었다. 언젠가 큰 무대에서 만나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로 멋지게 되어 있겠지. 난 그때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올 정도였다.
“왜 그렇게 보니?”
“부러워서요.”
“……아까도 그러던데, 뭐가 그렇게 부럽니?”
“그냥, 전부 다요.”
본래 이 시대의 정당한 주역들이 맞이할 미래 또한 기대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그 자리에 있고 싶다. 그렇게 이 대단한 아이들의 곁에서 조금이라도 함께하고, 역할을 다하려면 나 역시 최선을 다해야겠지.
에르네스트가 기대한다고 말해 주었으니 거기에 부응해야지. 잘한다면 기회가 올 것이다. 그 기회를 허투루 할 생각은 없다. 내가 지닌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서 최선의 연주를 할 작정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막연하면서도 확고한,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는데, 아나스타샤는 내게 말을 걸어서 그 기분을 잠시 흩트려 놓았다.
“그 애는 지금 우릴 부러워할걸.”
“그럴까요?”
“그러니까 이 시간만은 즐기지 않을래? 아무 생각 말고.”
잠깐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음악과 콩쿠르에 대한 대화로 넘어가 버리긴 했지만, 오늘 우리는 연습에 지쳐 쇼핑을 하러 나온 연주자들이었다.
흔히 쉴 때도 음악을 들으며 쉬는 게 연주자들이긴 하지만, 가끔은 정말 아예 음악을 손에서 놓아 버리는 것도 제대로 된 휴식 방법이었다.
오늘 음악 이야기는 여기까지. 지금부턴 다시 연주자 휴업이다.
발렌티나도 그 말이 맞다는 듯 활기차게 일어섰다.
***
음악이나 콩쿠르 등 모든 것들을 놓고 놀러 다닌 시간이 있다면, 당연히 다시 양손 가득 쥐고 발걸음을 내디뎌야 할 시간이 이어진다.
휴식 시간은 단순히 시간을 허비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리프레쉬가 되어 주었다. 이 또한 연습에 분명한 도움이 된다. 하지만 절대적인 시간의 투자는 역시 피아노 앞에 앉아 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난 다시 쭉 연습실에서 피아노와 함께했다. 그사이 빅토르가 휴가에서 돌아오기도 하고 9학년 2학기 성적표가 날아오기도 하는 등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내 일과에 큰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
“…….”
악보를 읽어 머릿속에 새기고, 피아노를 연습하여 손가락 마디마디에 새긴다.
작곡가에 대한 연구와 레퍼런스 연주의 분석 또한 어설프게 하지 않았다.
이전에 비해 내 인문학적 지식의 깊이는 꽤 깊어져 있었다. 러시아어와 영어 등 읽을 수 있는 문자가 많아지다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알게 된 여러 지식을 기반으로 다시 작곡가를 해석하고 음악에 파고들면 새롭게 읽히는 것들이 많다.
그것들을 다시 음악으로 갈무리하여 손끝에 매달아 본다. 흔들거리다가 툭 떨어져버리는 것이 있는가 반면 얇고 투명하게 손끝에 맺히는 것도 있었다.
그렇게 얻어 낸 한 방울의 음악은 특별한 울림으로 표현되고, 연속되는 음악들은 곧 소나기가 되어 피아노에 내렸다가 연못으로 고여 반짝거린다.
난 페달을 통해 그 연못에 발끝을 지그시 담갔다. 상쾌한 기분에 머리끝까지 저릿하다.
“……후.”
멈추고 있던 숨을 내쉬고,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 정도에서 만족할 순 없었다.
조금 더 선명하고 다채롭게. 다시 한 번 음악을 추출해낸다.
늘 하던 연습이지만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오늘을 마지막으로 내일 무대에 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난 연습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며칠 정도 흘렀을 때, 미하일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