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44화 (644/1,277)

##  644화

전화를 끊자마자 난 바로 피아노를 덮고 나갈 채비를 했다.

빅토르에게 부탁하자 그가 의아해했다.

“요 며칠 정해진 레슨은 없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휴가에서 돌아온 그가 너무 열성적으로 내게 어디 나가지 않느냐고 물어보길래 난 당분간 외출 예정이 없다고 못 박아 둔 후였다. 그렇게 말하고 겨우 얼마 지났다고 나가겠다고 하니 내 고집을 아는 그로서는 궁금해할 만도 했다.

난 그에게 어떻게 하면 잘 설명해 줄 수 있을지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레슨이 아니라…… 글쎄요, 이것도 넓은 의미에선 레슨인 걸까요?”

“……넓은 의미요?”

내년 콩쿠르에 앞서 오케스트라들과 협연 혹은 리허설이라도 할 수 있도록 미하일 선생님이 주선 중이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빅토르는 단번에 이해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내 머리 너머를 바라보던 그는 문득 아련하게 중얼거렸다.

“감개가 무량하군요……. 내년이면 국제 콩쿠르에 나가게 되시다니.”

빅토르의 눈엔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날 칭찬해 주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안도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7년 전부터 날 지켜온 사람이었다. 내가 이 저택에 왔을 때부터,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고는 다신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그냥 말로만 그렇게 안심시켜 놓고는 대충 해도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예전의 난 예민하고 다루기 어려운 아이였으니까. 게다가 외부에서 온 사람이니 일부러 친해져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내내 지켜주었다. 경호원 그 이상으로 내 도움이 되어 주려 애썼다. 내 기억 속엔 그 모든 것들이 감사의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저야말로요. 20대 초반이었던 빅토르가 벌써 서른…….”

그런 오랜 추억은 내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장난기도 끌어냈다.

빅토르는 배신감을 느끼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잠깐만요, 아가씨. 제 감동을 그렇게 짓밟으셔도 되는 겁니까?”

“저도 감동 중인걸요?”

“어디 아가씨는 서른 살 안 되실 줄 아십니까?”

“……예?”

예상치 못한 빅토르의 반격에 얼빠진 소리를 내자, 그가 재빨리 사과했다.

“제가 주제를 모르고 경망되게 그만, 죄송합니다.”

“아뇨…… 아뇨.”

난 어이가 없거나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그냥 빅토르도 그런 미래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을 뿐이다.

내 주위를 감싸는 불안감은 지난봄 이후로 많이 옅어졌지만 여전히 일부분 남아 있다. 검은 새와 내가 함께 운명을 이겨냈을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연하다는 듯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무언가 보장받는 기분이 든다.

난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을 종종 하곤 해요. 어쩌면 문제없이 나이를 먹을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요.”

“……아가씨.”

“후후후, 좋아지고 있는 것 아닐까요?”

긍정적인 생각은 좋다. 생각하고 되뇔 때마다 현실에 가깝게 있다는 기분이 들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같이 된다.

지금부터 또 십여 년 뒤를 생각하고 있으니, 당연히 눈앞의 이 사람 역시도 그 안에 있었다. 그런데 문득 걱정이 들었다.

“그나저나 어떡해요? 빅토르.”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어디 숨겨 둔 애인 없나요?”

“푸흡, 예?”

“있어야 다행인데.”

너무 되바라진 질문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나로선 그의 스케줄을 조절하는 등 함께 협조하며 진지하게 고민해 주어야 할 일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지금까지 봐선 정말 숨겨 두지 않은 이상 없는 것 같다. 그는 늘 저택의 고용인 숙소에서 머물고 있었고, 내 부탁을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넘긴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을 만날 여건이 나오질 않는다.

난 진짜로 진지한데, 빅토르는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정말 어색한지 내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며 말했다.

“아가씨…… 그런 이야기는 저와 하실 만한 이야기가 아닌…….”

“왜 아닌가요? 빅토르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이야기잖아요.”

“……미치겠네.”

옆을 보던 빅토르는 급기야 천장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이야기하기 싫은가 보다.

그렇게 싫다면 굳이 더 이러쿵저러쿵할 생각은 없었다. 그에게도 나와 공유하기 싫은 프라이버시 정도는 당연히 있을 테고, 일정 수준 넘어서 파고드는 건 에티켓 위반이니까. 이미 많이 파고든 건가?

걱정되는 눈빛으로 올려다보니 이윽고 고개를 내린 빅토르가 내 얼굴을 보고는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가씨가 그런 관심을 가지실 줄은 몰랐습니다.”

“음…… 글쎄요, 사실 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빅토르가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삶이 저로 인해 제한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요.”

빅토르는 말없이 날 바라보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눈이 내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예카테리나와 이야기했을 때도 느꼈고 그 뒤에도 몇 번 느꼈지만 난 아직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명확하지 않은 사람이다.

하지만 빅토르는 다르다. 소로킨이 가정을 가진 것처럼 그 역시 여유만 있다면 언제든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같이 좋은 사람이 불안증에 떠는 나 때문에 덩달아 여유도 없이 7년이나 되는 세월을 묶여 있다는 건 뭔가 잘못되었단 생각이 든다.

“…….”

난 빅토르가 입을 열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그는 한참이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이윽고 미소와 함께 말했다.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따뜻한 미소였다.

“감사하지만…… 아가씨. 몇 년이나마 더 산 제가 한 말씀만 드리자면, 진정 누군가로 인해 삶이 제한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예……?”

“자신의 삶을 제한할 수 있는 건 다른 누가 아닌 본인 스스로뿐이죠.”

천천히 음미하듯 그의 말을 곱씹었다.

그 말대로였다. 그가 만약 정말로 내 곁에 있는 걸 원하지 않았다면 진즉 그만뒀을 것이다. 어떠한 무력으로 잡아둘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두 던져버린다면 언제든 어디로든 도망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는 던져버리지 않고 약속을 지키고 스스로를 속박했다. 그를 하여금 그렇게 만든 건 외부의 일이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결정한 건 그 자신이었다.

그 말은 이해했다. 내가 그에게 뭔가를 강제했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고, 어쨌든 자기 결정과 책임이라는 거지. 그럼에도 난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당연했다.

“무슨 말인진 알았어요. 하지만…….”

“하하, 아가씨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 정도도 이해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에요.”

“그렇습니까? 다행이네요.”

다분히 얕잡아보는 말투이지만 기분 나쁘지 않다. 지금은 분명 모르겠지만 언젠가 이해하리라 생각하는 믿음이 가득한 미소가 빅토르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때문에 난 말꼬리를 잡고 더 따지지 못하고 얌전히 침묵했다. 이상하리만치 마음은 금방 차분해졌다.

웃기만 하던 빅토르는 곧 옆에 있던 차 키를 휙 낚아채더니 빙글 돌리며 말했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예.”

난 그의 숙소를 나와 다시 내 방으로 향했다.

빅토르와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머리에 천천히 맴돌다가, 곧 깊은 곳 어딘가에 내려앉았다.

일단은 미하일 선생님과 해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 지금은 거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

학교에 도착한 나는 익숙한 복도를 따라 걸었다. 계단을 오르고 옆으로 돌아 몇 걸음 더 걸으면 곧 미하일 선생님의 레슨실이었다.

오늘도 난 단정한 교복 차림이었다. 다시 한 번 복장을 점검하고, 짧게 노크했다. 곧바로 들어오란 소리가 있었다.

“앉으렴.”

미하일 선생님은 곧장 차를 타선 내 앞에 한 잔 내어 주셨다. 늘 즐겨 마시는 캐모마일 차였다. 한 모금 머금으니 비로소 선생님과 이야기할 준비가 된 기분이 든다.

선생님은 잠시 노트북을 보며 무언가 더 정리하시는 것 같더니, 이윽고 노트북을 덮으며 말씀하셨다.

“요즘 어떻니. 타티아나.”

“좋아요.”

그 뒤로도 왜 좋은지 할 말은 많았다.

“독주곡 레퍼토리를 다시 점검하면서 특히 라흐마니노프에 시간을 조금 들여 봤는데 결과가 괜찮은 것 같아요. 나중에 들어 주시면 좋겠어요.”

“그래, 그리고?”

“협주곡도 두 곡이나 더 늘렸어요. 슬슬 정리가 마무리되면 곡을 선정해도 어떨까……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구나. 그리고?”

“어…….”

그간 연습하면서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이야기해도 미하일 선생님은 귀담아듣지 않으시는 것 같았다.

왜 좋은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던 나는 정말 좋았던 기억들에 대해 떠올렸다.

“다른 친구들과 콩쿠르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어요.”

“어떤 이야기?”

“어떤 콩쿠르에 참가할지…… 그런 이야기요.”

그리고 그 이야기의 끝엔 에르네스트가 있었다.

난 그런 결정이 하루아침에 내려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때문에 미하일 선생님에게 살짝 물어보았다.

“선생님, 혹시 에르네스트에 대해선 들으셨나요?”

물끄러미 날 보던 미하일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구세프가 말해 주었지. 두 콩쿠르 모두 참가한다고.”

“언제 말씀해 주신 건가요?”

“몇 달 되었지? 그래서 집중적으로 연습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몇 달 전이라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가 시작되기도 한참 전이었다. 이미 처음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에르네스트는 결정이 다 나와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왜 그렇게 피곤해 보였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에 비해 난 불과 얼마 전에 결정을 내렸고 아직 프로그램을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청사진도 전혀 없었다.

미하일 선생님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괜찮단다. 타티아나. 지금도 전혀 늦지 않았으니.”

“별로…… 늦었다고 생각한 건 아니에요.”

“하하, 그렇니.”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적당한 때 아닐까. 난 그런 생각을 하며 창밖을 일견했다. 여름의 햇빛에 나뭇잎이 빛나고 있었다.

미하일 선생님은 내 시선을 따라 보다가, 다시 내 집중력을 되찾아갔다.

“그럼 본론을 이야기하자. 리빈스크라는 도시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야로슬라블 주에 있는데.”

이 넓은 러시아 땅의 모든 도시를 알고 있진 못하지만 북동쪽의 야로슬라블 주라면 당연히 알고 있었다. 차로도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지금 왜 그곳의 도시 이름이 나오는지에 대해선 고민할 것도 없었다.

“예, 그곳에 있는 오케스트라인가요?”

“그래.”

그리 멀지 않은 가까운 곳의 오케스트라부터 시작하려는 것 같았다.

미하일 선생님은 안경을 고쳐 쓰며 이야기했다.

“그 오케스트라의 악장이 네 연주를 감명 깊게 들었다고 하더구나. 어떻게든 협연을 추진해 보려고 했지만…… 일단 스케줄이 있어서 그건 힘들게 되었고.”

차로 목을 축인 선생님은 손가락을 치켜들며 이어 말했다.

“대신 리허설만이라도 괜찮다면 할 수 있을 것 같다는데, 결정은 네가 내리면 된단다.”

정말 내게 형편 좋은 상황이었다. 난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전에 말씀하셨듯 리허설만 하는 거네요?”

“그래. 많은 도움이 되겠지.”

아직 제대로 일정이 나온 건 없지만 수십 명의 오케스트라를 대동하고 내가 하고 싶은 리허설만 골라서 하고는 무대에 서지 않고 그만할 수 있는 기회였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이점만 가득했다.

난 양심이 쿡쿡 쑤시는 것을 못 본 척하고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저도 무언가 도울 수 있을까요?”

“돕다니?”

“일방적으로 제 연습만 도움 받는 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역시 그렇게 완벽히 일방적인 이야기는 세상에 있을 수 없었다. 미하일 선생님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먼저 그런 말을 해 주니 고맙구나.”

그리고 간단히 그쪽 오케스트라의 요구사항을 전달해 주셨다.

“금전적인 이야기는 일절 없었단다. 네 연습에 대한 대가로 그런 걸 바라는 것 같진 않고…… 대신 그쪽에서도 연습을 몇 번 도와 달라 할 것 같구나.”

“아…… 그런 이야기를 하셨나요?”

“언질은 주던데, 아마 그냥 지나가진 않겠지.”

뭔가 구체적이진 않지만 아마 비슷한 걸 바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쪽의 악장께서 날 마음에 들어 하셨다고 하니까, 피아노 반주를 필요로 하실려나?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겠니? 타티아나.”

그런 건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되레 덧붙여 받는 것에 가까웠다. 높은 수준의 바이올린 연주자와 합주할 기회가 어디 많겠는가? 난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얼마든지요.”

미하일 선생님은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