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45화 (645/1,277)

##  645화

내 결정이 떨어지자마자 모든 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미하일 선생님은 곧장 오케스트라 측과 정확한 일정을 상의했고, 난 리허설할 곡들을 준비했다.

그렇게 준비한 협주곡이 세 곡이나 되었다. 오케스트라가 받아 준다고 한다면 세 곡을 전부 리허설할 생각이었다.

이건 학생이 할 수 있는 정석적인 커리큘럼에선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콩쿠르에 올릴 협주곡을 두 곡 정해서 그 곡들만 집중적으로 연습해도 모자랄 판에, 속성으로 이것저것 건드리고 다니는 건 시간낭비밖에 되지 않으니까.

그러나 제대로만 한다면 원하는 것들을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 미하일 선생님은 내게 다양한 협주곡 연주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고, 한 학생에게 줄 수 있는 것 이상의 기회들을 몰아 주셨다. 내가 할 수 있음을 믿고 진행하시는 일이었다.

최대한 많은 기회를 붙잡아서 내 것으로 만들고, 거기에서 결론을 도출해내 콩쿠르 무대에 올릴 생각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협주곡들이 어떤 형태를 하고 있을진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건 분명해 보였다.

“…….”

난 긴 한숨을 내쉬며 아침 연습을 마치고 손을 내렸다.

홀로 연주하는 협주곡 총보 연습은 굉장한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거기에다가 오늘은 조금 더 신경 써서 하느라 피로감이 더했다.

그러나 피곤하다고 쉬러 갈 순 없었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건반 덮개를 덮고 일어섰다.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벨카가 내 움직임에 따라 일어선다. 슬슬 연습 끝났으면 같이 아침 산책이나 가자고 하는 것 같다.

“미안해요, 내일까진 산책 못 해요.”

“……?”

갑자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묻는 듯 벨카가 올려다본다. 난 그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마음 같아선 같이 데리고 가고 싶지만…… 놀러 가는 게 아니라서요.”

이렇게 조곤조곤 달래면 벨카는 어리광을 부리지 않고 잘 알아듣는 편이었다. 함께 놀지 못한다는 걸 이해한 벨카는 다시 슥 뒤돌아선 자신의 방석 쪽에 엎드려 크게 하품을 했다. 이참에 한숨 더 잘 모양이다.

살그머니 연습실 문을 닫고 나온 뒤엔 내 방으로 돌아가 떠날 채비를 했다.

악기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피아노 연주자가 챙겨야 할 물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저 옷가지 약간과 개인용품 정도다.

물론 내가 부탁한다면 예고르가 이 방을 통째로 옮겨다 줄지도 모르겠지만, 겨우 이틀이다. 가볍게 갔다가 가볍게 올 생각이다.

“…….”

준비를 끝내니 작은 가방과 캐리어 하나가 전부였다.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짐을 확인하고, 난 캐리어를 끌고 저택 밖으로 나왔다.

“아가씨, 절 부르시지 그러셨습니까.”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소로킨이 말했다. 난 그냥 미소로 답했다.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소로킨은 내게 캐리어를 받아 트렁크에 넣고, 뒷문을 열어 주었다. 차에 올라타자 조수석에 앉아서 무언가 보고 있던 빅토르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오셨습니까?”

“예, 빅토르. 준비 다 되었어요.”

“빠르시군요. 음, 보안 관련해서 잠시 확인할 것이 있어서…… 죄송하지만 10분 후에 출발하겠습니다.”

“아…… 알겠어요.”

빅토르는 어떤 보안인지 깊게 이야기하지 않았고 나 역시 더 묻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그가 애써 주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시간이 남는 사이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잠깐 모스크바를 떠나 있을 거라고 친구들에게 말해 놓았더니 그사이에도 메시지가 몇 개 와 있었다.

[슬슬 출발할 때지? 잘 갔다 와. 타티아나.]

여행길이었다면 아나스타샤도 같이 갔을 텐데, 아쉽게 되었다. 그녀 역시 아쉬워하는 것 같았지만 짧은 인사로 그 감정을 대신하고 있었다.

난 잘 갔다 오겠다고 답장하고는 다음 메시지를 열었다. 발렌티나에게서도 비슷한 내용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두 사람과 이런저런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자, 빅토르가 내게 말했다.

“아가씨, 출발하겠습니다.”

소로킨이 조용히 차를 출발시켰다.

난 친구들에게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스마트폰 화면을 껐다. 앞으로의 여정 동안 놀면서 시간을 보낼 순 없었다.

태블릿 컴퓨터를 꺼내서 지금부터 가야 할 곳에 대해 다시 한 번 검색해 보았다.

모스크바 북동쪽의 야로슬라블 주. 조금 더 정확하게는 그 주의 가장 위쪽에 위치한 리빈스크라는 작은 도시였다. 차로 가면 5시간 정도 걸린다.

2관 규모의 시립 오케스트라가 있긴 하지만 상주 콘서트홀은 없어서 대신 리빈스키 드라마 극장을 홀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연습도 그 드라마 극장의 리허설룸에서 하게 될 것 같은데. 시설이 어떤진 정확히 알아볼 수 없었다.

선생님을 통해서 이것저것 따져보는 것도 실례인 것 같고, 어쨌든 피아노 한 대만 있다면 리허설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할 테니 일단 가서 볼 생각이었다.

“……협조해 주신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니까.”

난 중얼거리며 이번엔 화면에 악보를 띄웠다. 오늘 준비한 협주곡의 총보였다. 난 다시 한 번 집중하며 악보를 머릿속에 있는 선율과 일치시켜 나갔다.

소로킨도 빅토르도 룸미러로 힐긋 이쪽을 보기만 할 뿐 말을 걸거나 하진 않았다.

***

그대로 자 버렸다.

“……지, 지금 어디죠?”

“거의 다 왔습니다.”

소로킨이 무심하게 이야기했다. 난 기대어 자느라 살짝 헝클어진 머리를 빗어 내리며 급히 생각에 잠겼다.

악보를 보다 만 태블릿 컴퓨터를 보니까 2시간 정도 있다가 눈을 감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3시간 가까이 차에서 잔 것이다.

집중하고 있을 땐 이런 경우가 잘 없는데. 왜 자버린 거지. 수마가 물러가고 제정신이 들고 상황이 파악되자 갑자기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선다.

난 불편한 자세로 있으면서 혹시 목이나 다른 어딘가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싶어 짧게 스트레칭을 해 보았다. 그런데 시트가 얼마나 편안했는지 전혀 결리는 곳이 없었다. 역시 마사지 기능까지 달린 시트다웠다.

기지개를 켜다가 볼썽사납게 하품이 나오려고 해서 입을 막았다. 앞에 있는 빅토르가 킥킥거렸다. 난 볼멘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왜 깨워 주지 않으셨나요?”

“깨워 달라 하시지 않으셨으니까요.”

“…….”

맞는 말이긴 하지만…… 뭔가 억울했다. 의도치 않게 자버렸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3시간이나 손해를 보고 집중력도 약간 풀어진 느낌이었다. 이대로 오케스트라를 만났다가 못미더운 모습이라도 보이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앞선다.

그런데 빅토르는 그런 내 걱정은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는 듯 편하게 이야기했다.

“잠깐 주무시면서 피로나 긴장은 다 풀리셨습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중요하죠. 그럼 5시간 내내 차에서 그 조그마한 화면을 보고 계시다가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설 생각이셨습니까?”

“…….”

할 말이 없었다. 빅토르의 말대로 차 안에서 무언가를 본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체력을 소모한다. 하물며 음표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총보라면 더더욱 그렇다.

쉬는 것 또한 연주자에겐 준비 과정의 일환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난 충분히 잘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잘 알면서도 괜한 투정을 부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난 빅토르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제가 원했던 것이 아니라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잠들었다는 것 때문에 약간 날카로워져 있었어요.”

스스로를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한다는 건 언제나 경계해야 할 일이었다. 습관처럼 몸에 깃든 경계심이 내 신경을 예리하게 만들었다.

“하하,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빅토르는 별것 아니라는 듯 웃어넘겼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나 혼자 왜 이러고 있는가 싶었다.

조금 마음을 편안하게 두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숲이 보인다. 꽤 멀리 나왔다는 것을 풍경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절로 기분이 나아진다.

한참 동안 그렇게 밖을 보며 구경하다 보니 점점 도시 외곽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인구가 많다고 할 순 없는 도시라 그런지 크고 높은 건물들이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오래된, 예스러운 건물들이었다. 그렇게 모인 건물들이 이루는 도시는 묘한 매력을 보여주었다.

“리빈스크입니다.”

조금 더 도심으로 들어서자 강을 따라 도로가 나 있었다. 볼가 강이었다. 저 강을 따라 올라가면 거대한 리빈스크 저수지도 나온다. 한번 가보고 싶기도 하지만, 이제 슬슬 목적지에 다다를 때였다.

소로킨이 천천히 차를 세웠다. 차가 설 때도 한 번 덜컥이지도 않는다. 저 운전실력 덕분에 한 번도 깨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차가 완전히 멈춰 서자 소로킨이 먼저 차에서 내려 뒷문을 열어주었다. 난 오랫동안 앉아 있던 몸을 그제야 펼 수 있었다.

“…….”

모스크바와는 완전히 다른 도시가 눈앞에 가득 들어왔다.

5시간이나 걸렸으니 오래 걸리기도 했지만, 겨우 그 정도 만에 이렇게나 다른 도시에 올 수 있다는 건 색다른 느낌이기도 했다.

어리숙하게 보이지 않아야 한단 생각은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두리번거리게 된다. 당장 발을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대신 빅토르가 길을 알려 주었다.

“이쪽입니다.”

“아, 고마워요.”

난 살짝 앞서가는 빅토르를 따라 걸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이 거리에 익숙해져 가는 기분이 들었다. 스무 걸음쯤 걸었을 때, 난 흥미진진한 기분으로 거리를 즐길 수 있었다.

점심식사는 빅토르가 미리 예약해 둔 식당에서 했다.

그렇게 날 앉혀 놓은 빅토르는 할 일이 있다면서 휙 나가 버렸다. 어떤 상황에서든 반드시 한 명은 경호를 맡고 있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난 조금 울적하긴 했지만, 그래도 소로킨과 식사를 할 수 있어서 나쁘진 않았다.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와 함께 식사하는 날 보면서 점원은 조금 궁금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다가와서 무언가 묻거나 하진 않았다. 소로킨은 말을 걸기 어려워 보이는 사람이긴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빅토르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뭐라도 입에 넣긴 했는지 모르겠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니 빅토르는 껄껄 웃으며 걱정 말라 답했다.

그는 자신의 일보단 내 일부터 생각하라는 듯 말했다.

“바로 약속 장소로 가시면 시간에 맞을 것 같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이곤 그가 가리키는 건물로 향했다.

처음 보는 수십 명의 음악가들과 마주할 때였다. 몇 번이고 겪었던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익숙해지거나 여유롭게 되는 것은 아니다.

점점 시간과 거리가 가까워져 올수록 느슨해져 있던 신경이 조여져 온다. 첫 인사로 건네야 할 말들, 정중한 부탁, 리허설을 위해 준비해 온 협주곡들. 그리고 똑같이 연습을 도와주길 바란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두서없이 차오르는 생각과 걱정들을 차분히 정리하면서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건물 앞에 다다랐을 때, 한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알지 못하는 사람인데도 그 사람에게 눈길이 갔다. 그 역시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더니, 깜짝 놀라며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뱉어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내 이름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듣는다는 건 꽤 신기한 기분이 든다. 난 그 기분을 그에게도 전해 주기로 했다.

“요나스 비슈나이카스. 맞으신가요?”

“아, 예. 맞습니다.”

이미 이곳에 오기 전에 리빈스크 시립 오케스트라에 대해선 공부했기 때문에 악장을 몰라보는 일은 없었다.

나이는 36세. 리투아니아 출신의 그는 유능한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많은 이력과 수상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내가 먼저 나서며 악수를 권하자 그는 무심결에 내 악수를 받으려다가 무슨 이유인지 화들짝 놀랐다. 그러더니 이번엔 왼손을 내밀었다가, 그것도 매너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허둥거린다.

난 잠시 의아했지만, 곧 그가 고개를 돌려 오른손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 맡는 것을 보고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담배 냄새 정도는 큰 문제도 아니다. 난 갈 곳을 잃고 헤매는 요나스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그는 흠칫 놀랐으나 곧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