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6화
요나스는 제일 먼저 날 극장 안 파우더룸으로 안내했다.
손을 씻고 나오자 어색하게 서 있던 그와 빅토르가 날 바라보았다.
빅토르가 딱히 무슨 이야기를 한 것 같진 않다. 그냥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그는 반걸음 물러서며 나와 요나스가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요나스는 미안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엉망으로 인사해 버렸군요. 망친 첫 인상을 어떻게 쇄신해야 할까요?”
어떤 이야기를 하는진 알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아무것도 망치지 않았다. 첫 인상은 아직 봤다고 할 수도 없었다. 난 요나스의 바이올린 소리를 제대로 못 들어 봤으니까.
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허헛……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그는 손을 들어 턱 부근을 짚더니, 이전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는 듯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 부분은 연주에서도 느끼곤 했습니다.”
내 이전 연주들을 요나스가 듣고 좋게 평가해 주었단 건 이미 미하일 선생님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는 그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했다.
“피아니스트들에게서 냉철하게 자신의 음악을 견지해 나간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많았어도 대담하게 음악을 풀어놓는다는 건 그리 느껴 보지 못했는데……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에게선 바로 느껴졌었죠.”
언젠가 스타니슬라프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난 완전히 다른 곳에서 처음 보는 음악가에게 이런 평가를 받는다는 것에 대해 묘한 기쁨을 느꼈다. 비슷한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건 적어도 내 음악의 언어가 엉망이 아니라는 뜻일지도 모르니까.
분위기가 좋아졌음을 느꼈는지 요나스가 조금 더 편안하게 말을 이었다.
“작년부터 지휘자님에게 좋은 피아니스트를 찾아냈다고 말했던 건 그 때문이었습니다. 뭐…… 스케줄이 안 맞다 보니 이제야 이렇게 만나게 되었지만.”
“스케줄이요?”
“예, 미하일 표도로비치에게 듣기를, 올해는 힘들지도 모르겠다고 들었습니다.”
난 올 상반기에 리사이틀과 메세나 협회 주최의 연주회 등을 하기도 했지만, 그 모든 것은 1학기가 거의 끝나고 나서야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학기 전반은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하일 선생님은 그런 내 문제가 어쩌면 장기화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때문에 작년부터 들어온 많은 제안들을 미루어 오셨던 것이다.
내가 콩쿠르를 결정하자마자 어떻게 갑자기 오케스트라와 하는 연습을 바로 연결해주실 수 있었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선생님이 묵묵히 날 기다려주셨다는 것에 대해 감사를 느낀다.
돌아가면 선생님부터 뵙고 좋은 성과를 전해 드리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자, 요나스 또한 내 표정에서 그러한 의지를 읽어낸 듯하다. 그가 다시 한 번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무튼…… 이렇게 만나 반갑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요나스 비슈나이카스입니다.”
“저도 반가워요. 비슈나이카스.”
이번엔 담배 냄새가 나지 않는 바이올린 연주자의 손이었다. 리투아니아라면 야샤 하이페츠의 출신국이기도 했지. 난 요나스의 바이올린 소리가 궁금해졌다.
짧고 힘 있는 악수가 오가고, 요나스는 만족한 얼굴로 옆쪽을 향해 팔을 펼쳤다.
“자, 그러면 가볼까요. 다른 단원들도 거의 다 모였을 겁니다. 소개해 드리죠.”
“예. 잘 부탁드려요.”
요나스가 먼저 앞장섰고, 난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리빈스크 시립 오케스트라가 기다리고 있는 곳을 향해.
***
리빈스크 시립 오케스트라의 첼리스트 카밀레 스반세이텐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식당에서 오후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에 대해선 이미 합의가 된 사안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만큼은 나와 주었으면 한다고 지휘자와 악장이 강력하게 요청하는 바람에 결국 점심 피크타임만 일하고는 바쁘게 극장으로 출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불합리한 부분은 어디에도 없었다. 카밀레의 공식적인 소속은 어디까지나 오케스트라였고 그것만으론 아이 셋을 키울 생계유지가 힘들어서 일을 늘인 것 또한 그녀의 선택이었으니까.
그래서 카밀레는 언제나 그랬듯 아무 감정도 내색하지 않고 첼로를 챙겼다. 사실 무슨 일인지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그저 피아니스트가 한 명 온다고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자면 기획에 펑크가 나서 대타로 피아니스트를 데리고 온 게 아닌가 싶었다. 때문에 급하게 리허설을 하려는 것이고.
“안녕하세요. 리빈스크 시립 오케스트라 여러분.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 합니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고 보니 한 소녀가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었다. 원숙한 연주자를 생각했던 카밀레는 약간 놀랐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아직 앳된 티가 느껴지는 나이임에도 얼굴도 말씨도 반듯한 게 잘 배운 테가 났다.
그리고 카밀레는 점심에 이미 타티아나를 본 적이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 식사를 하러 왔기 때문이었다.
타티아나는 경호원을 둘이나 대동하고 있었다. 재력이 어느 정도 되어야 그럴 수 있는지 카밀레는 상상도 잘 안 갔다.
어쨌든 기묘한 상황이긴 했지만 중요한 건 협연자로서 얼마나 뛰어난가였다. 경호원을 데리고 이 먼 곳까지 온 걸 보니 장난하는 것 같진 않은데, 어린 연주자가 기대에 얼마나 미칠진 봐야 아는 일이다. 리빈스크 시립 오케스트라의 연주회는 규모가 그리 크진 않았지만 카밀레는 이 오케스트라에 굉장한 애정과 자존감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곳에 몸담은 지 몇 년이 되도록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설명을 듣게 되었다.
“일전에 말씀드렸듯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는 이틀간 저희와 리허설만 하게 될 겁니다. 이는 음악적 교류의 일환으로만 봐 주시고…….”
무슨 소리야?
카밀레는 고개를 기울였다. 타티아나가 어떤 연유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악장 요나스가 열심히 설명해주고 있었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요컨대 우리 스케줄에 추가 연주회는 없고, 저 애는 리허설만 딱 이틀 하고 모스크바로 돌아간다. 그게 끝이었다. 오케스트라를 고용했다면 보통은 일정을 잡고 연주회까지 하는 것이 당연하다. 리허설만 해도 되는 건가?
그리고 무엇보다 카밀레는 그런 식의 계약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듣지 못했다. 살다살다 별 황당한 상황도 다 보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옆의 세묜에게 작게 물었다.
“우리 얼마 받기로 한 건데? 연주회도 안 하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런 거 아니라던데.”
“……그런 거 아닌데 뭔데?”
카밀레가 묻자 세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얼굴로 속닥였다.
“저 애가 원하는 협주곡 리허설을 우리가 도와주고, 반대로 우리가 피아노를 필요로 하면 저 애가 도와주는 그런 계약이라던데.”
“도와준다니? 뭘? 그건 영원히 지속되는 거야?”
“아니, 내일까지지.”
사전에 설명을 들었다면 지금보단 덜 황당했을까? 카밀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다른 단원들은 대충 납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여유를 가지고 보자면 이해할 수도 있었다. 이 오케스트라가 돈 안 되는 일을 하는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하지만 카밀레는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가만 상황을 보자니 요나스가 일단 저 애를 마음에 들어 해서 지휘자 아르투르를 설득하고 이번에 데리고 온 모양인데, 무대에 올리기엔 시간이 부족하니 리허설로 합만 맞춰 볼 생각인 것 같았다.
그렇게 하고 싶다면 혼자 해야 할 일이다. 미리 설명도 제대로 안 하고 44명의 단원들을 연주회가 아닌 일에 전부 끌어들이는 건 월권행위였다.
“아마 서너 곡 정도 레퍼토리를 돌리게 될 것 같은데…… 거기에 대해선 크게 문제없을 것 같고. 그럼, 질문 있으면 받겠습니다.”
요나스가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걸 참고 들어주던 카밀레는 질문 대신 첼로를 들고 리허설룸을 조용히 나갔다.
타티아나는 이 상황이 얼마나 기이한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괜히 그녀에게 따지거나 무안을 줄 필요는 없었다. 그냥 하기 싫으면 나가면 된다. 어차피 리허설이라며?
카밀레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빠져나와 계단 앞에 섰다. 막 내려가려는 찰나, 요나스가 달려왔다.
“카밀레! 잠깐만, 왜 그래?”
“왜 그러냐니?”
카밀레야말로 악장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지금 이러쿵저러쿵 묻는 것도 피곤했다. 그녀는 붙잡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저으며 말했다.
“리허설만 한다며? 그럼 전부 다 필요하진 않은 것 아냐? 어차피 무대에 서지도 않을 건데.”
리허설엔 모든 단원이 반드시 필수적으로 참여할 필요는 없었다. 가급적 오케스트라를 우선시 할 필요는 분명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면 빠진다 해도 크게 탓하지 않는다. 빈자리가 있어도 동료가 메워줄 수 있다는 것이 오케스트라의 장점이기도 하니까.
물론 그러면 오케스트라의 결속력이나 완성도가 낮아지게 되지만, 그건 연주회 무대에 올리게 될 때나 문제가 되는 일이다.
그러니 카밀레는 이번엔 빠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요나스는 필사적으로 그녀를 붙잡았다.
“첼로 파트에서 네가 빠져버리면 균형이 깨져. 오늘은 있어 줘야 해. 카밀레.”
“균형이 좀 깨지는 게 무슨 문제인데. 리허설이잖아.”
“리허설이라고 해서 전부 장난처럼 할 순 없어. 조금 흔들리게 되면 다행이지만 타티아나라면 그걸 더 크게 뒤흔들 거야. 난 악장으로서 오케스트라가 망신당하는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고 싶어.”
이 사람 미쳤나?
카밀레는 평소에 되도록 악장을 존중하려고 했지만 지금 발언은 좀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슨 오케스트라에 단원 몇 명이 빠진다고 해서 리허설에 참사가 날 것처럼 말하고 있다.
황당하다는 투로 그녀가 말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저 애의 연주를 본 적 없지?”
저 애뿐만이 아니라 카밀레는 피아니스트들은 대체적으로 잘 모르는 편이었다. 워낙 첼로에만 집중한 탓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 이름도 처음 듣는데.”
“요 근래 막 유명해지기 시작하긴 했으니까……. 하지만 난 지금 농담하는 게 아냐. 카밀레, 네가 있어야 해.”
요나스는 굉장히 진지했다. 정말 카밀레가 첼로 파트에서 빠져버린다면 다른 단원만으론 역부족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자신을 원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면 마음이 약해지기도 한다. 같은 리투아니아 출신으로서 친분이 있기도 하고. 하지만 이틀간 피아니스트 한 명에게 전 오케스트라가 실질적인 보상도 없이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건 쉬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카밀레는 잘라 말했다.
“그럼 연주회를 하던가.”
“……그건.”
“아니면 난 못해.”
오케스트라를 움직일 생각이라면 두 방법이 있다. 연주회를 하든가, 아니면 돈으로 산다. 수십 명의 음악가들을 한 번에 움직일 수 있는 건 그 정도가 전부였다. 그 외의 방법에 대해선 카밀레는 쉽게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요나스는 다시 한 번 설득조로 말했다.
“조금만 유연하게 생각해. 그냥 평상시 연습에 피아니스트가 한 명 끼어 있다고 생각하면 이상할 것 없잖아.”
“그런 주먹구구식으로 하면 뭐든 상관없겠네. 하지만 난 내가 이 오케스트라의 구성원으로서 믿고 따라가기 위해선 원칙이 있어야 한다고 봐. 원칙이. 연주회를 하지 않는 리허설? 그것도 겨우 이틀? 단물만 빨고 가겠다는 거 아니야?”
“카밀레! 말이 심한 것 아냐?”
말이 조금 심하긴 했다. 타티아나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카밀레는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악장께선 저 애를 높게 사시나 본데…… 라흐마니노프가 살아 돌아왔다고 해도 이런 건 반대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안 할래.”
세상 그 어떤 피아니스트라도 마찬가지였다. 카밀레는 딱딱하게 말했다.
그때였다.
“잠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언제 따라 나왔는지,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가 두 사람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카밀레는 조용히 나가려다가 요나스 때문에 망했다고 생각하며 삐뚜름하게 고개를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