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7화
난 일방적으로 내 볼일만 마치고 떠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미하일 선생님으로부터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조건 자체가 내게만 좋게 되어 있기 때문에 불공평하단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오케스트라에서 무언가 요구한다면 적절히 맞춰 들어줄 생각이었다.
나로선 44명의 단원 모두와 접촉해서 이야기할 수 없으니 그 대표라 할 수 있는 악장이나 지휘자와 의견이 맞다면 함께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고, 악장인 요나스가 음악적인 부분만 교환하자는 쪽으로 이야기를 했으니 아마 피아노 연주자로서 무언가 도와줄 수 있으리라 여겼다.
“…….”
하지만 리허설에 반대하는 단원이 있었다.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니 요나스는 미안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미리 단원 모두에게 알리고 동의를 구해 놓지 않은 것에 대해 자기 책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투였다.
그러니 그냥 그에게 맡겨도 된다. 단원 한 명이 돌아가든 아니면 설득되어 함께하든 내겐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 여기서 지켜보다가 상황이 결정된 다음 하기로 했던 리허설을 해도 별문제는 없을 테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셨다면, 제대로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그러나 난 차를 타고 5시간을 달려 이곳, 리빈스크에 온 이유를 다시 떠올렸다.
그저 손가락을 움직여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협주곡을 연습하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다.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음악가 집단과 함께 어울려 음악을 이루고 무대를 준비하는 직전까지의 모든 과정들. 그 속에서 마주할 수 있는 트러블과 화합. 비단 음악적 교류뿐만이 아니라 인간적인 교류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경험이 필요했던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첼리스트 한 명의 문제라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음악에 충실한 건 음악가로서 갖추어야 할 바람직한 소양이니까. 하지만 지금도 그렇게 행동하는 건 일부러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신 미하일 선생님이 바라시는 바가 아닐 터다.
그저 내 잘못이 아니란 이유로 이 상황을 외면해 버린다면 이 자리에 선 의미가 퇴색된다.
그런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밖으로 나와 두 사람과 마주했다.
하지만 막 돌아가려던 첼리스트는 시니컬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별로 당황하진 않았어요. 그보단 당신이야말로 당황했을 것 같은데, 미안해요. 딱히 감정이 있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못 하겠을 뿐이지.”
그녀가 날 개인적으로 싫어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저 오해가 약간 있을 뿐이다. 난 일단 그녀와 이야기를 해 보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다.
“타티아나라 불러 주세요.”
“그렇게 막 부를 생각은 별로 없는데.”
“당신이란 대명사 말고 이름이 좋다고 생각해요.”
“……그럼 저도 카밀레라고 불러요.”
“감사해요. 카밀레.”
카밀레가 아무 말도 없이 리허설룸을 휙 나가 버렸을 땐 정말 당황했었는데, 서로 이름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꽉 막힌 분위기는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부드러워졌음을 눈치챈 건 카밀레 역시 마찬가지였다. 뭔가 대화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에 반발하듯 그녀가 다시 첼로 가방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무튼, 나같이 비협조적인 사람은 잊고 다른 단원들과 잘 해 봐요. 다들 실력 괜찮으니까 아마 실망하진 않을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난 더더욱 카밀레를 붙잡고 싶어졌다. 그녀가 정말로 이 상황을 싫어서 피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진 않다는 확신이 든 까닭이다.
***
타티아나를 보며 카밀레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그냥 소개가 끝나자마자 리허설룸을 나와 버린 걸 보고 꽤 놀랐을 텐데도, 타티아나는 문제가 있다면 해결하려는 의지를 용기 있게 보여 주었다. 이런 연주자는 결코 흔치 않다. 그 어떤 오케스트라와 만나더라도 사랑받고 잘 할 연주자였다.
그런 아이에게 카밀레는 다른 조건이나 현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해도 끔찍한 어른으로 보일 것 같았다. 돈은 많을 것 같으니 오케스트라를 빌리고 싶다면 돈으로 사라. 그런 말을 할 순 없었다.
그러니 이미 첫인상을 망친 그녀는 조용히 사라지는 편이 나았다. 리허설을 하고자 한다면 타티아나와 협조할 수 있는 요나스와 다른 단원들이 즐겁게 했으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보기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또 영리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요나스.”
슬쩍 이야기의 흐름을 건네자 요나스가 기다렸다는 듯 이어받아 카밀레를 다시 한 번 옭아매었다.
“전 우리 오케스트라의 역량을 전부 보여 주는 데엔 카밀레가 필수적이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리빈스크가 자랑하는 오케스트라의 완전한 실력을 보고 싶어요.”
미리 연습이라도 해 놓은 듯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더니, 타티아나가 마지막으로 대화를 끌어당기듯 말했다.
“카밀레. 저와 함께 리허설해 주실 수 없으시나요.”
카밀레는 거기에 끌어당겨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저런 띄워 주기에 넘어간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녀가 말없이 바라보자 타티아나가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제가 공평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아요. 그러니 요구하실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요구할 것?”
“피아노 연주자가 필요하지 않으시나요?”
아까 말했던 음악적 교류인가 그걸 말하는 건가?
카밀레가 약간 미심쩍어하는 모습을 보이자 타티아나는 조금 더 자신 있게 말했다.
“전 첼로 반주도 많이 해 봤어요. 악보만 있다면 어떤 반주든 해 보일게요.”
“…….”
이 애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아는 걸까?
유망한 신예 피아니스트로 한창 이름을 날리고 있나 본데, 그렇다고 해서 전문 첼리스트의 상대가 바로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카밀레는 자신의 요구를 제대로 받아 주지 못하고 백기를 든 반주자들도 몇 명이나 안다.
생각나는 첼로 소나타가 몇 곡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가서 확인해 보자고 할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만에 하나 타티아나가 반주에 실패한다면 상황은 점점 더 꼬이기만 할 테니까. 지금 카밀레는 타티아나와 싸우고 있는 게 아니었다.
카밀레는 복잡하게 일을 처리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타티아나가 자신을 포기해 줄지 가만 살펴보았다.
경호원을 데리고 다니기도 하고, 말씨도 바르고 행동도 차분한 걸로 보아 곱게 자란 테가 물씬 풍긴다. 그리고 자신의 음악엔 자부심이 있어서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보인다.
이곳에서 바로 해결할 수 없는 귀찮은 일을 안겨 준다면 난색을 표하며 피하지 않을까. 약간의 편견과 궁금증. 카밀레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제안했다.
“그걸로는 부족하죠. 정 그러면 연습해 가는 만큼 가르쳐 주는 건 어때요.”
“예?”
“저희 집 애가 일곱 살인데 피아노를 하거든요? 레슨이라도 해 주실래요?”
한참이나 나이가 많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타티아나 한 명을 위해 움직이는 것을 생각한다면 나름 공정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카밀레의 말투는 타티아나를 음악가로서가 아니라 보모로서 원한다는 말과 비슷하게 들렸다. 듣기에 따라선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된다면…….
“그러면 되나요?”
“?”
“오늘 일정상……. 혹시 댁에 피아노가 있다면 저녁에 가도 될까요?”
예상했던 반응과 전혀 달랐다. 타티아나는 마치 모든 게 해결된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카밀레는 아차 싶었다. 타티아나가 이 정도로 귀찮은 일을 마다 않는 성격일 줄은 미처 몰랐다. 이렇게 되자 원래 타티아나를 난처하게 하려고 했던 카밀레가 되레 난감해졌다.
“아니…… 왜 어렵게 그래요? 그냥 돈으로 사요. 아까 들었잖아요?”
그냥 얼버무리고 넘어갈 타이밍마저 놓쳐 버린 카밀레는 당황한 나머지 말실수까지 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엔 요나스가 그녀의 말을 냉정하게 받았다.
“그건 안 돼. 카밀레.”
“……뭐?”
“우린 이미 타티아나의 선생인 미하일 표도로비치와 금전이 오가지 않는 합의를 봤어. 그런데 막상 불러놓고서 이야기를 바꿔 버리는 건 말이 안 돼. 엄청난 비난을 받을걸.”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옳은 말이었다. 카밀레는 오케스트라의 명예가 실추될 일은 전혀 바라지 않았다.
요나스가 고개를 까딱였다.
“이해했지?”
“……연주회는?”
“그것도 마찬가지야. 우리 오케스트라는 타티아나와 협연하지 않기로 했어. 이미 정해진 일이야.”
“그럼 어쩌란 거야?”
자기도 모르게 카밀레가 목소리를 높이자 요나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뭘 어떻게 해? 네 집에 가서 아이들을 레슨해 주면 괜찮다고 한 건 너잖아?”
“그건 그냥 농담으로…….”
“타티아나도 나도 진지하게 널 설득하려고 하고 있는데, 카밀레 넌 그저 농담을 하고 있었던 거야?”
“…….”
이젠 도저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카밀레는 결국 이 두 사람에게 넘어가 주기로 했다.
“할게, 하면 되잖아.”
짧게 답하니 타티아나와 요나스는 기뻐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두면 하이파이브라도 할 기세라 카밀레는 짐짓 인상을 쓰며 휙 뒤돌았다.
***
카밀레가 간과했던 것이 세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타티아나의 실력이 상상 이상으로 뛰어났다는 점이었다.
“오늘 리허설 좋았어! 타티아나.”
“두 번 만에 이 정도 퀄리티 내기 정말 어려운데. 우리 좀 잘 맞는 거 같네?”
“후후, 저도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단원들이 모두 만족한 얼굴로 타티아나에게 한마디씩 건넸다. 그냥 입 발린 칭찬이 아니라 모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찬사였다.
겸허하게 칭찬을 받아들이는 타티아나를 보며 카밀레 역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리허설은 3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처음 만난 협연자와 오케스트라가, 한 음악을 놓고 고치고 협조해야 하는 부분들을 빠르게 짚어나가면서 확인하기만 해도 그 정도 시간은 훌쩍 지나가 버리고 만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한 번 연주하고는 이 오케스트라의 특색과 지휘자의 성향을 어느 정도 이해한 듯 보였고, 그다음 두 번째 되는 연주에선 거의 끊이지 않고 원활한 협주를 가능케 했다.
그렇게 3시간 동안 리허설한 협주곡이 두 곡. 심지어 모두 상당한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이 정도면 그냥 유망한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프로 반열에 오른 피아니스트들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카밀레는 이제 와서야 타티아나와 첼로 소나타를 연주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두 번째 간과했던 것은, 타티아나가 카밀레의 피아노 레슨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단 점이다.
“카밀레가 초대했다고 그랬지?”
“예, 자제분 피아노 레슨으로요.”
“설마 그냥 레슨만 받겠어? 리빈스크 사람들이 그렇게 매정하진 않아.”
타티아나가 리허설에 대한 대가로 피아니스트가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해주겠다고 제안했음을 모르는 단원은 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타티아나에게 이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미 리허설만으로도 충분히 공정하게 서로의 음악을 주고받았음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타티아나에게 교환조건을 제시한 건 카밀레뿐이었다.
카밀레는 뒤늦게 전부 없던 일로 하고 싶었다. 적어도 딸의 피아노 레슨은 취소하고 첼로 소나타 합주로 대신하고 싶었다.
하지만 모두가 재미있어하며 이야기를 멋대로 기정사실화시켰다. 44명의 단원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돌다 보니 타티아나는 오늘 카밀레의 집에서 레슨을 해 주고 저녁식사도 하고 그대로 하루 묵는 것으로 되어 버렸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마지막 세 번째로 그녀가 몰랐던 것은 타티아나가 베르체노프 콘체른의 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타티아나.”
“예, 카밀레.”
“오늘 불편할 거예요 분명. 안 그래도 피곤할 텐데…… 그냥 호텔에 가서 묵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어쩐지 곱게 자란 것 싶더라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카밀레도 베르체노프라는 이름은 몇 번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런 곳의 사람을 초대하려는 생각을 하니 머리가 핑 돈다. 리빈스크 시장쯤은 되어야 초대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해서 그렇게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호텔 예약은 이미 취소했어요.”
“예?”
어차피 빈방은 많을 테니 새로 잡으면 되지 않냐고 말할 틈도 없었다. 타티아나가 이어 말했다.
“잘 곳이 없어졌으니 카밀레가 절 내치신다면 전 길거리에서 자야 할 거예요. 여름이니 버틸 만할지도 모르겠지만…….”
“……타티아나.”
“예?”
“솔직히 말해 봐요. 성격 보통 넘죠?”
처음 봤을 땐 선생 잘 만난 운 좋은 학생으로, 그 후엔 올곧고 사랑스러운 연주자라 생각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지닌 면면은 그저 그뿐만이 아니었다.
카밀레의 질문에 타티아나는 배시시 웃으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카밀레는 이 아이에게서 벗어날 수 없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