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1화
1시간 하고 5분 쉬는 식으로 3시간 동안 이어진 연습은 굉장히 하드했다.
연주회가 없는 리허설임에도 불구하고 아르투르는 세상에서 가장 큰 연주회에 나가는 것처럼 철저하게 지휘자의 역할에 집중했고, 나 역시 그런 그에게 조금이라도 모자람 없도록 최선을 다해 협연에 집중했다.
단원들 누구 하나 싫은 소리를 하거나 이 리허설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았다. 이 리허설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난 그렇게 생각해 준다는 것에 정말 감사했다.
점심식사 후에도 리허설은 쭉 이어졌다.
이번엔 내가 준비한 레퍼토리가 아닌 오케스트라에서 요구하는 협주곡이었다. 그런데 이 또한 협주곡임은 마찬가지였으므로, 난 어느 하나 손해 볼 것이 없었다.
다만 익숙하지 않은 곡들을 바로바로 연주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일반적인 솔로곡이라면 그래도 조금 낫겠지만 고난도의 협주곡을 거의 초견으로 연주하는 건 그 어떤 연주자에게도 악몽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집중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며 악보를 읽어 내렸다. 내가 맡아야 하는 선율들을 빠르게 캐치해두고 오케스트라의 흐름 또한 읽는다. 그 모든 것들은 곧장 현실에 끌어내릴 수도 있어야 했다.
물론 종종 미스가 생기고 아티큘레이션에 빈틈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래도 난 못하겠다고 난색을 표하지 않았다. 피아노 협연자로서의 기량을 아낌없이 펼치며 뒤처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방금 그게 초견이라고요?”
“제대로 연주해 본 건 처음이에요.”
“…….”
아르투르는 지휘봉을 내려놓고 날 바라보았다. 뭔가 무서운 눈빛이었다.
설마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나 이곡저곡 실험해보고 싶다는 건 아니겠지? 여기서 더 심해지면 그건 괴롭힘이다.
난 지금도 충분히 힘들다는 뜻으로 힘없이 웃어보였다. 그제야 아르투르가 고개를 젓더니 다시 오케스트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뒤로도 아르투르의 의견을 중점으로 한 레퍼토리 리허설이 계속되었다. 난 어쩐지 그 전부가 오케스트라와 날 동시에 연습시키기 위한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긴 리허설은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다.
“……힘들어.”
“나 팔 마비 온 거 같은데.”
아르투르의 여기까지 하잔 말이 떨어지자마자 곳곳에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 역시 머리도 아프고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시간으로만 따지자면 6시간 남짓 되는 연습이었지만 체감으로는 족히 24시간은 음악에만 파묻혀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그 체감만큼 얻게 된 것도 굉장히 많았다. 오케스트라와 합을 맞추는 느낌을 다시 체득한 것은 물론이고 아르투르의 지휘 스타일과 해석 등에서 협주곡을 다루는 방법을 따라 배우게 된 것도 있었다. 이런 건 정말 직접 부딪혀보지 않고선 도저히 배울 수 없는 값진 경험들이었다.
난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아르투르는 이마의 땀을 닦아 내며 악보를 이리저리 넘겨 보더니, 문득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쉽군요.”
“……예?”
마음에 안 들었던 부분이 있었던 걸까?
혹시 그렇다면 기탄없이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럼 다음엔 그 부분은 훨씬 더 좋은 연주를 보여줄 수 있을 테니까.
그런 기대를 담고 다음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피식 웃으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 피아노 협주곡을 무대에 못 올린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아.”
겨우 이틀 사이에 리빈스크 시립 오케스트라와 6곡도 넘는 협주곡을 리허설했다. 그 정도면 음악회 두 번은 하고도 남을 정도의 레퍼토리였다.
하지만 우리 약속은 여기까지였다. 이 곡들은 단지 경험으로 남을 뿐이다.
못내 아쉬웠는지 단원 중 한 명이 불쑥 말했다.
“그냥 하면 안 됩니까?”
“안 할 겁니다.”
아르투르는 딱 잘라 말했다.
물론 지휘자인 그가 하고자 한다면 작게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 역시 아르투르가 부탁한다면 리빈스크에 며칠 정도는 더 머물 수도 있겠지. 이들과 하루 종일 협주곡을 연습하고 밤에는 달리아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도 있는, 그런 나날을 조금 더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런 어리광은 오늘에서 그쳐야 한다.
“대신…… 내년 콩쿠르가 끝난 뒤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군요.”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가 무언가 할 순 있겠지. 그런 믿음이 분명 존재하기에 서로 아쉬움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연주회를 약식으로 해 버린다면 분명 더더욱 큰 아쉬움이 남게 될 것이다. 아르투르는 이미 스케줄이 차 있는 오케스트라를 더 짜내어서 불충분한 연주회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다면 제대로. 모두가 준비된 상태에서 하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연주회였다.
이미 미래를 바라보는 것 같은 눈으로 아르투르가 제안했다.
“타티아나, 내년에 다시 한 번 리빈스크에 찾아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는 내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라는 국제 콩쿠르에 나가서 마주하게 될 무대들. 아르투르는 그 무대들에 대한 연습을 시켜 주었다. 난 그 점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꼭 올게요!”
“약속한 겁니다?”
“분명히 약속드릴게요.”
가능하다면 콩쿠르에서 좋은 결과를 얻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그래야만 보다 넓은 홀에서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 있을 테니까. 나 혼자라면 별 상관 없지만 이 훌륭한 오케스트라와 함께라면 어쩐지 욕심이 난다.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아르투르 역시 미련 없이 지휘봉을 옆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우리는 내년을 기약했다.
아르투르가 상황을 정리하듯 이야기했다.
“그럼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와 하는 특별 리허설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인사가 들려왔다.
내게도 몇 명의 단원들이 다가왔다.
“타티아나. 오늘 정말 좋았어요.”
방금 있었던 리허설에 대한 만족과, 곧 모스크바로 떠나야 하는 나에 대한 인사가 함께 하고 있었다.
나 역시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저도요. 함께해서 영광이었어요.”
또 만났을 땐 무대에 설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으로 단원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콩쿠르 잘 준비하란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은 것 같다.
첼로를 껴안고 있던 카밀레는 날 보더니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내년도 좋고…… 언제든 환영이야. 타티아나. 다시 봤으면 좋겠네.”
“예, 카밀레. 아이들 보러 올게요.”
“응.”
그 말에 카밀레는 굉장히 기뻐했다. 난 언젠가 보게 될 달리아가 얼마나 자라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케스트라와 작별인사를 하고 배웅을 받으며 밖으로 나오자 빅토르가 이미 차를 준비시켜 둔 상태였다.
“인사는 마치셨습니까?”
“예.”
“아쉬우신가 보군요.”
“좋은 사람들이었으니깐요.”
사람들도 실력도 모두 좋았다. 그러니 또 만날 수 있겠지.
난 조용히 차에 올라 옆을 돌아보았다. 리빈스크 시립 오케스트라의 사람들이 모두 나와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차는 틴팅이 너무 짙다. 때문에 창문을 약간 내리고 얼굴을 비추었다. 저편에 서 있던 카밀레가 잘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나 역시 마주 흔들어 주었다.
곧 소로킨이 차를 출발시켰다. 조용히 나아가는 차는 그대로 모스크바로 향한다.
“…….”
겨우 이틀 사이에 꽤 정이 든 도시를 바라보며 난 상념에 잠겼다.
다음에도 이런 멋진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예전 같으면 좋은 오케스트라를 찾아다닐 생각을 했을 것 같다. 실력 좋고 협조적이고 유연한 오케스트라를 찾고 싶은 건 모든 연주자들의 희망일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다르다.
우선 내가 좋은 협연자가 되어 주어야만 했다. 내 스스로가 그리 협조하고 싶지 않은 협연자라면 세상 그 어떤 훌륭한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더라도 엉망인 연주밖에 할 수 없게 되겠지. 그러므로 모든 방법은 내가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니 잠시 풀어놓았던 피로감이 등 뒤로 스멀거리며 올라왔다.
“주무십니까? 아가씨.”
빅토르가 슬쩍 날 불렀다. 내가 자각 없이 잠드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 묻는 것 같다.
난 짧게 웃었다. 지금은 당장 기절이라도 할 것 같다.
“지금부터 자려고요.”
“……주무시죠.”
“제가 잔다고 해도 신경 쓰지 마세요. 소로킨의 대화 상대도 되어 주시고요. 아시겠죠?”
대체 어떻게 신경을 안 쓰냐는 듯 빅토르가 룸미러 너머로 이야기하는 것 같았지만, 난 이미 말을 하면서 수마에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캄캄한 어둠이 덮쳐 온다. 하지만 난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리허설했던 피아노 협주곡이 쉬지 않고 머릿속에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그 희미한 벨벳처럼 흐르는 협주곡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
이틀간의 리허설을 마치고 향한 곳은 중앙음악학교였다.
연주회 없이 이렇게 선생님 앞에 서니 약간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무대에 오른 것을 선생님도 보시고 거기에 대한 어떠한 평을 해 주실 텐데, 이번엔 리허설룸에서 계속 리허설만 했기 때문에 선생님은 내가 오케스트라와 어떤 연습을 했는지 전혀 모른다.
그래서 난 차분하게 처음 했었던 협주곡부터 선생님에게 말씀드렸다. 얼마나 준비해 갔고, 또 어떻게 맞추었는지, 될 수 있는 한 주관적인 관점은 배제하면서 이야기하려 했다.
“아…… 그리고 단원 중 한 분의 집에서 묵었어요.”
“오? 어쩌다가?”
“말씀드리자면 긴데…….”
난 어떻게 하면 카밀레에 대해서도 좋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잠깐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이야기를 빠뜨리는 건 카밀레에 대한 변호가 아니라 이틀간 있었던 추억과 의미의 빛을 바라게 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난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다. 왜 카밀레가 처음엔 리허설에 참여하지 않으려 했는지, 그리고 거기에 대한 조건으로 레슨을 붙였는지.
중요한 건 내가 겪은 일들을 어떻게 대처하여 어떤 결과가 이루어졌는지였다.
그렇게 짧고도 긴 이야기를 마치고 나자, 미하일 선생님은 나지막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참 난감한 상황이었을 텐데. 너다운 방식으로 해결했구나. 타티아나.”
“……저다운 방식이요?”
“하하, 그래. 난 그게 정말 마음에 든다.”
나다운 방식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신뢰가 가득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과 마주하자 마음에 안도가 차오른다. 스스로의 방침에 후회는 없지만 다시 선생님에게 확인받은 기분. 적어도 크게 어긋나거나 틀리진 않았겠구나.
선생님의 한마디는 내게 있어서 그만큼 의미가 컸다. 늘 독선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삶에 있어서 최소한의 지표가 될 무언가가 있다는 건 정말 다행이었다.
보다 편안해진 마음으로 마주 미소를 짓자 미하일 선생님은 찻잔을 기울이시곤 다음 본론을 꺼냈다.
“아무튼…… 그럼 다음 오케스트라와 이야기를 해 봐도 괜찮겠지? 물론 크게 부담이 가지 않도록 하마.”
난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 상관없었다.
“전 괜찮아요. 내일도 출발할 수 있는걸요?”
“하하하, 당분간은 리빈스크 오케스트라와 한 리허설에서 얻은 것들을 정돈해서 네 것으로 만들어야지. 일단은 신경 쓰지 말고 연습에 집중하고 있거라.”
“아…… 알겠습니다.”
너무 마음만 앞서는 것도 좋지 않다. 난 빠르게 수긍하며 연습한 협주곡들의 수준을 개선하는 데에 얼마나 걸릴지 계산해 보았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협주곡들을 떠올리던 나는 문득 생각이 나서 선생님을 불렀다.
“아, 선생님.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래, 뭐지?”
“다음은 연주회를 했으면 좋겠어요. 모두들 리허설 끝에 연주회를 하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 아쉬워했거든요.”
리허설룸에서 엮어낸 음악이 단지 그 한정된 곳에서 청중 없이 흩어져 버린다는 건 참 아쉬운 일이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다음엔 부디 무대에까지 오를 수 있었으면 한다.
“그 아쉬움을 느낄 수 있다는 걸 보니, 정말 제대로 하고 온 것 같구나.”
내 말에 미하일 선생님은 비로소 마침내 완전히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