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5화
순간적으로 그런 말이 나왔다.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다. 그저 바로 옆에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두고 왜 굳이 어려운 방법을 지금 고집하는지 의아했을 뿐이다.
물론 작곡 프로그램을 잘 활용하게 된다면 앞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곳이 많겠지. 현대의 작곡 프로그램은 그 자체로 악기나 다름없다. 에르네스트는 특히 다양한 재능이 많은 사람이니까 다룰 수 있는 것을 늘려 놓는 건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방법을 당장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협주곡을 출품하면서 참고 음원을 첨부해야 한다면 투 피아노 버전을 녹음해서 제출해도 된다. 아마 오케스트라를 바로 대동할 수 없는 대다수의 작곡가들이 그런 방법으로 대회에 출품했을 것이다. 난 그 부분에 대해서 충분히 도와줄 수 있는 의사를 지니고 있었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나오니 뭔가 이상하게 따지는 것 같은 말투가 되어버렸다. 왜 이런 말이 나오는지 잘 모르겠다.
에르네스트도 살짝 놀란 것 같았다. 난 일단 빠르게 이유를 덧붙였다.
“아, 그게…… 제가 요즘 협주곡 연습을 하고 있어서요. 그런 의미에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말하다 보니 이번엔 뭔가 변명하는 것 같다.
여러 생각이 엉켜 있다. 지금 뭘 하고 싶은 건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에르네스트가 곤란해하고 싶다면 도와주고 싶은 건 분명한 진심이었지만, 당연히 그의 새 협주곡이 들어보고 싶기도 하고 직접 연주해보고 싶기도 했다. 한 번 들어보지도 않은 곡인데 이미 기대감에 차 있다.
그런 스스로를 되짚어보면서, 난 새삼 그에게 거는 기대가 많음을 느꼈다.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에르네스트를 보니 내가 너무 앞서나간 게 아닌가 싶다.
작곡가에게 한 곡의 음악은 정말 중요한 것인데, 이렇게 멋대로 도움을 가장하여 내가 원하는대로 하려고 하는 건 나쁜 짓이었다.
“싫으신가요?”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에르네스트가 혹시나 불쾌해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후회감이 차오른다. 괜한 참견을 한 걸까.
하지만 걱정과 달리 그는 내 말을 듣고는 갑자기 피식 웃고는 훨씬 편해진 모습으로 차분히 이야기했다.
“그렇게 말해주는 건 고맙지만, 괜찮아. 타티아나. 너도 스케줄이 빠듯하잖아. 얼마 전엔 리빈스크에도 갔다 왔다면서.”
“어차피 협주곡 연습을 하는 것이니…….”
“이건 그리고 네게 부탁하면 안 되는 일이야.”
내겐 도움을 구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대답이었다.
확실히 알아들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내 마음속엔 기묘한 마음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멋대로 굴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이 대답을 듣고 나니 다시금 체념하기보단 약간 오기가 생겼다.
남아있는 카드도 하나 더 있으니, 나쁜 짓을 살짝만 더 해 볼 생각이다.
“제 쪽에서 부탁드리면요?”
“?”
“아까 그러셨잖아요. 뭐든 하겠다고.”
말로 그렇게 했다고 해서 덥석 저번 겨울의 표리 때처럼 내게 헌정해달라고 하는 건 무례한 것을 넘어서서 염치가 없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난 그가 긋고 있는 선을 감안하며 음원 제작을 도울 수 있게 해달라 말했다. 이것도 상당한 억지이긴 하지만, 혹시 들어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거절할 땐 확실히 거절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래도 안 돼.”
“…….”
“미안.”
구두 약속이라도 꼭 지키는 에르네스트가 이렇게 미안하다고 하면서까지 거절하는 것이라면 분명 이유가 있겠지. 내가 더 이상 난감하게 만드는 건 안 될 일이다.
그렇게 속으론 납득하면서도 일부러 삐뚜름하게 이야기했다.
“이렇게까지 말씀드렸는데 괜찮다 하신다면…… 괜찮은 거겠죠. 혼자서도 잘 되시나 보네요.”
“……타티아나.”
“좋아요.”
에르네스트가 다시 한 번 미안하다고 하려는 순간, 난 그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이어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적어도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소개해드릴 수 있게 해 주세요.”
“……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에르네스트에게 내 음반을 준 적도 있지만, 그 일은 서로의 음반을 주고받는 것으로 마무리되어서 내가 드나드는 에우테르페 레코즈의 스튜디오에 그를 데리고 갈 일은 없었다.
마카로프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에르네스트가 당혹스러워하며 물었다.
“그게 누군데?”
“도움이 안 되는 저와 달리, 도움이 될 분이요.”
이전에 스튜디오에 갔을 때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여러 종류의 작곡 프로그램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본 적 있었다. 만약 에르네스트가 작곡 프로그램을 잘 다루길 원한다면 지금 가장 도움이 될 사람이었다.
이것도 안 된다고 거절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상하거나 실망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역시 충분히 생각한 끝에 대답하는 것일 테니까. 그렇다면 또 다른 방법이 있진 않을지 찾아서 물어볼 테다.
내가 힘겨워할 때 그가 옆에 있어 주었던 것처럼, 그에 대한 보답이 될 수 있다면 어떤 것이든 기쁠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이렇게 노력 중이라는 걸 그에게 구태여 알리고 싶진 않아서 짐짓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래도 내 눈은 계속 그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혹시나 곤란해할까 싶었기에.
그런 내 모습을 본 에르네스트는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해해줘서 고마워.”
“…….”
굳이 프로듀서를 소개해주겠다고 한 시점에서, 내가 정말로 화가 나거나 한 것이 아니라는 걸 에르네스트가 모를 리 없었다.
어차피 들킬 속내이긴 했지만, 이제 와서 덥석 인정하는 건 재미없다. 난 시원스레 이야기하지 않고 그에게 말했다.
“소스를 저어 주세요.”
“알겠어.”
에르네스트는 키득거리더니 내 옆에 와선 냄비를 받아 갔다. 그리고 능숙하게 가스불 위에 올리곤 국자로 휘휘 젓기 시작했다.
가만 그의 모습을 보던 나 역시 멈춰 있던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내가 직접적으로 무언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뿐이겠지. 꾸준히 요리를 배워 둔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음악이 아닌 것으로 무언가 해 줄 수 있다는 것도 기쁜 일이었으니까.
***
점심 식사를 마치고 짧은 티타임도 가지고 나니 이 집에 있을 명분이 사라졌다. 물론 이유야 무엇이든 더 만들어서 있을 수 있겠지만, 오늘은 잠시 방문하기로 했던 것이니 이쯤에서 돌아가기로 했다.
사샤와 에르네스트의 배웅을 받으며 차에 오르자 소로킨이 차를 출발시켰다. 조용히 나아가는 차 안에서 난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깨달았다.
바로 스마트폰을 든 나는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번에 아나스타샤와 함께 스튜디오에 찾아간 뒤로 꽤 오랜만이었다.
몇 번 신호가 가고, 그가 전화를 받았다. 반가운 인사가 들려왔다.
- 타티아나. 잘 지냈습니까?
“예, 마카로프 프로듀서도 잘 지내셨나요?”
- 물론이죠.
그는 쾌활하게 이야기했다. 전화 너머로 마우스 소리 비슷한 것이 들려온다. 아마 지금도 무언가 하고 있는 중인 것 같다.
- 타티아나 덕분에 오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일도 늘었군요. 음반도 꾸준히 잘 나가고 있고요.
“기쁘네요.”
- 하하하.
음반 관련해선 전부 그에게 맡겨두고 있었는데, 매번 내게 돌아오는 몫을 보면 계속 구매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정말 늦지 않게 두 번째 음반을 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물론 내년까진 음반이 아니라 콩쿠르가 우선이었지만.
마카로프 프로듀서도 그 점은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먼저 말하기도 했고.
- 어쩌면 곧 찾아주시지 않을까 했는데, 이렇게 전화를 주셨군요. 역시 콩쿠르 예비 심사용 DVD 제작 때문입니까?
“아? 그건 아니고요…….”
아직 난 프로그램을 정하지도 못했다.
슬슬 본론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서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그게…… 작곡 프로그램 등으로 미디 음원을 만들려 하는데 도움을 구할 수 있을까 해서요.”
내 말을 듣자마자 프로듀서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 작곡 프로그램? 타티아나, 작곡도 합니까?
“아뇨, 제가 아니라 친구 이야기예요.”
- 친구라면 누구?
“에르네스트라고 해요.”
- 아, 정말입니까!?
한 번도 소개하거나 한 일은 없는데도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알은체를 했다. 어쩌면 이야기가 조금 편해질지도 모르겠다. 난 그에게 물었다.
“그를 아시나요?”
- 알다마다요.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를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최근엔 분명 작곡가로서 공부도 병행하겠다 했었죠?
“예, 맞아요.”
역시 음악 업계에 있는 사람이니만큼 소문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에르네스트의 이야기는 다른 소문들보다 조금 빨리 퍼지고 있기도 하고.
피아노만 연주할 때도 엄청나게 이목을 끌었던 그가 작곡까지 하겠다고 나섰을 때 이미 크게 보도한 언론들도 몇 군데나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실질적으로 인터뷰 등에서 그러한 사실을 밝히진 않았지만, 내 리사이틀에 소나타를 헌정한 일 등으로 이미 작곡가로서도 이름이 언급되고 있었다.
난 그런 사실 등을 프로듀서가 알고 있다고 전제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최근엔 협주곡을 작곡했다고 해요.”
- ……작곡 공부 시작한 지 이제 반년 조금 넘은 것 아닙니까?
“아마 본격적으론 그렇죠?”
- 역시 그쪽으로도 재능이 많긴 한가 보군요. 궁금한데요.
그는 놀라면서도 동시에 흥미를 보였다. 프로듀서로서 연주자 에르네스트에게도 관심이 있지만, 작곡이라면 더욱 전문 분야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그는 내 이야기에서 의아한 점을 짚어 물어보았다.
- 그런데 작곡만 하는 것이라면 굳이 프로그램을 쓸 이유가 없을 텐데요.
“이번에 대회에 출품을 하려 하는데 음원을 요구한다고 해서요.”
- 아, 음원.
“예, 그래서 제가 피아노로 오케스트라 파트를 맡아 도와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 그보단 프로그램으로 하길 원하는 것 같아요.”
- 흠…… 장단점이 있긴 하죠.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한 번에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고 그렇게 중립적으로 이야기했다. 그의 입장에선 작곡가로서 그렇게 하는 것도 이해가 가는 듯했다.
난 그 장단점이 무엇인지 바로 묻고 싶기도 했지만, 그건 내가 들어야 할 대답이 아니라 에르네스트가 들어야 할 것이었다.
프로듀서는 잠시 스케줄을 확인하는지 말이 없더니, 곧 내게 말했다.
- 그럼 모레 오후 즈음 방문해달라 전해주시겠습니까? 아니면 같이 오실 수 있으면 가장 좋고요. 타티아나도 음원을 준비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이니.
“그렇게 할게요.”
-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타티아나.
“예, 당일에 연락 또 드릴게요.”
난 짧게 이야기하고는 전화를 마무리 지었다.
이번 일이 에르네스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