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6화
약속 시간에 맞추어 에르네스트의 집 앞으로 마중을 나갔다.
멀리서부터 집 근처 가로수 아래에 서 있는 에르네스트가 보였다. 셔츠 차림에 서류 가방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조금 더 어른스러워 보인다. 차가 근처로 가니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난 창문을 내리고 그를 반겼다.
“에르네스트.”
“안녕.”
그는 손을 슥 흔들더니 차 문을 열고는 내 옆자리에 탔다.
밖에 오래 있었던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마실 것이라도 준비를 해 오는 건데.
“덥죠, 오래 기다리셨나요?”
“방금 나왔어.”
에르네스트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말하더니 나와 빅토르에게 감사인사부터 전했다.
“덕분에 편하게 가네. 고마워. 빅토르도 고맙습니다.”
“겸사겸사죠.”
빅토르는 피식 웃으며 그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난 에르네스트를 간접적으로나마 도와주기로 했기 때문에 이렇게 스튜디오까지 데려다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제가 제안드린 일이니까요. 데려다드려야죠.”
“지하철로 가도 되는데.”
“덥잖아요?”
“……너 더운 거 싫어했던가?”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난 스마트폰으로 다시 한 번 시간과 약속을 확인하고는 그에게 말했다.
“그보다…… 제 소개 없이 혼자 가셔서도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잘 해주셨겠지만, 첫날이니 직접 소개해드리고 싶기도 해서요.”
“……그래?”
괜한 일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내가 옆에서 소개해준다면 두 사람이 조금 더 쉽게 친해질 수 있을 테고, 에르네스트도 원하는 도움을 쉽게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이유가 충분한데, 난 콩쿠르 DVD 건으로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상담해야 할 일이 있기도 했다.
스튜디오로 향하는 차 안에서 우리는 그리 말이 많지 않았다. 그는 이 방문에 확실한 용건을 가지고 있었고 난 거기에 직접적인 관심을 두지 않기로 정해놓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것저것 잡담을 하자면 할 이야기도 많겠지만, 조용히 간다고 해서 어색하거나 불편한 기분은 아니었다.
좌석에 편하게 앉아 밖을 내다보던 에르네스트는 문득 입을 열었다.
“아무튼 난 생각도 못했었어.”
“정말요?”
“그래. 작곡과 선생님도 작곡 프로그램은 다뤄본 적 없다고 하시니까 그냥 좀 막막하더라고. 에이전시에 물어봐도 알아보겠다고만 하고.”
활동을 많이 하는 연주자답게 에르네스트의 인맥은 꽤 화려한 편이었다. 하지만 전부 다 클래식 음악, 그중에서도 기악 연주에 관련된 사람들이다 보니 작곡용 프로그램을 다루는 일에 대한 조언을 구하긴 영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방법을 찾자면 분명 찾을 수 있었을 텐데, 그 전에 내가 이렇게 도움이 될 분을 소개해줄 수 있다는 게 기쁘다.
“잘되었네요.”
“잘되게 해 주었으니 잘해 볼게.”
에르네스트는 내게 모종의 기대를 받고 있다는 걸 느끼는지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리 부담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전 시간은 도로가 그리 막히지 않아 스튜디오까지 평소보다 조금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
익숙한 계단을 올랐다. 등 뒤에서 날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늘 거의 혼자서 오르던 계단을 둘이서 걸으니 묘한 기분이 든다. 앞서 걷던 내가 뒤를 돌아보자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들었다. 난 말없이 웃으며 다시 계산을 디뎠다.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조용했다. 베로니카 과장님은 또 외근으로 바쁜 모양이었다. 최근 일이 많이 늘었다는 건 사실인 것 같았다.
맞이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당황하진 않았다. 이 스튜디오는 늘 이런 분위기였다. 난 자연스레 마스터링룸 쪽으로 다가가선 문을 노크했다.
“실례합니다.”
급히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문이 열렸다. 그곳엔 깊게 들어간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있었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은 날 발견하더니 화색을 띠었다. 기분 좋게 웃으며 그가 날 반겼다.
“하하하, 어서 오시죠. 타티아나.”
그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향했다. 에르네스트는 따라 들어오다가 멈칫했다. 두 사람의 시선도 마주한다.
서로를 알아보려는 듯한 눈빛. 엄중한 침묵이 퍼진다. 난 혹시라도 어색해지지 않도록 정확한 타이밍에 끼어들며 에르네스트의 옆에 섰다.
“아, 소개드릴게요. 전화로 말씀드렸던 제 친구예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프로듀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잘 부탁합니다. 에우테르페 레코즈의 마카로프라 합니다.”
“저야말로요.”
에르네스트도 악수를 받았다. 그저 그것뿐이었는데도 분위기가 확 바뀌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 친구로서 소개해주는 게 상당히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았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큭큭거리며 웃더니 안쪽의 테이블을 가리켰다.
“차부터 한 잔 마시고 이야기하도록 하죠. 타티아나는 허브티였고…… 무엇으로 드릴까요?”
“커피로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하죠.”
잠시 앉아서 기다리니 프로듀서가 차를 가지고 왔다.
짧은 티타임을 즐기며 난 프로듀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근 있었던 일들이나 진행 중인 음악들 등, 간단히 안부를 묻는 대화였다.
그렇게 차를 몇 모금 마셨을 때,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에르네스트 쪽으로 대화의 방향을 돌려놓았다.
“자…… 작곡 프로그램을 배우신다고?”
“배운 건 아니고…… 대회에 출품할 협주곡 음원을 만들어야 할 일이 있어서 독학 중입니다.”
“곡은 다 쓰신 겁니까?”
“예. 악보를 가져왔습니다.”
“보여 주시죠.”
에르네스트는 가지고 온 서류 가방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난 보지 못했던 그의 협주곡 악보였다.
내 초견과 시창 능력은 계속 발전해오고 있어서, 이젠 악보를 슬쩍 스쳐 지나가듯 보기만 해도 읽어지는 것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난 그쪽을 바라보지 않으려 했다.
난 찻잔만 기울이고,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빠르게 악보를 넘기며 읽어나갔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몇 페이지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리 긴 협주곡 같진 않다.
마침내 악보를 다 본 프로듀서는 다시 책상에 탁탁 쳐서 깔끔하게 악보를 정리하더니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이건 그냥 제가 만들어드려도 되겠는데요?”
“……네?”
뭔가 예상 못한 이야기에 에르네스트가 되물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악보를 슥 일견하곤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양손은 깍지를 끼고 허리를 굽힌 그의 모습은 음향 엔지니어이자 프로듀서로서 베테랑처럼 보였다. 그는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 말했다.
“이미 완성된 악보잖습니까. 이제 종이에서 모니터로 입력만 하면 되는 일이죠. 작곡가분들이 악보를 음원으로 만들어달란 의뢰는 종종 있는 의뢰이기도 하고…….”
비단 클래식 음악뿐만이 아니라 프로그램으로 작곡하는 곡들은 세상에 정말 많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정말 전문가로서 그런 일들을 여럿 다루어 본 것이 분명했다.
전문가적인 눈빛을 띠며 그가 제안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에르네스트.”
만약 받아들인다면 이곳에서 악보를 주고 그에게 맡기면 모든 게 해결된다. 음반 역시 곧바로 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에르네스트가 지금까지 이 일로 골치를 썩어 왔다면 이만큼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하던 에르네스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음……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배워야 할 때 배워놓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못 할 것 같아서요.”
아무 생각 없이 듣고만 있던 난 에르네스트의 대답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냥 편할 대로 해도 괜찮다. 다른 작곡가들도 그리한다고 하고, 큰 문제가 될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난 지금 에르네스트가 음악가로서 이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도 그런 부분에선 나와 마음이 잘 맞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하하핫!”
기분 좋게 웃던 그는 전문가로서의 태도를 내려놓고는 보다 친근하게 다가왔다.
“혹시나 했는데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다행이군요.”
“역시 번거롭…….”
“사실은 가르쳐드리는 쪽이 훨씬 번거롭죠. 저로선 그냥 만들어드리고 마는 게 시간상 훨씬 이득입니다.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의뢰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예 그는 솔직한 모습으로 솔직한 이야기를 했다.
이참에 에르네스트라는 연주자를 완전히 자신의 고객으로 만들어 놓을 수도 있었다는 모종의 자신감이 엿보인다.
에르네스트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프로듀서는 긴 웃음을 흘리더니 들고 있던 찻잔을 흔들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가르쳐줄 수 있는데도 가르쳐주지 않고 계속 못 하게 두는 건 음악가로서 지양해야 할 일이죠. 이런 이유에 대해 타티아나가 종종 하던 말이 있었는데…….”
그가 고개를 까딱이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공리에 위배한다 하였죠? 타티아나.”
솔직히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것이 많아서 난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최근엔 에르네스트에게 했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들으니 약간 건방진 것 같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제 생각일 뿐이에요.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비지니스를 하셔야 하는 분이니까…….”
“하지만 그 전에 음악가임은 마찬가지죠.”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진 이미 잘 안다는 듯 프로듀서가 말했다. 난 어쩔 수 없이 웃고 말았다.
그렇게 에르네스트의 결정을 듣고, 이젠 프로듀서의 결정이 정해졌다.
“좋습니다. 속성으로 노하우만 알차게 가르쳐드리죠. 장담컨대 에르네스트가 감을 잡기까지 얼마 안 걸릴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레슨비는…….”
“하하, 음악 프로듀싱 교육은 따로 하고 있지 않으니 그쪽은 받지 않겠습니다. 나중에 혹 생각이 있으시면 음반 쪽으로 문의나 주시죠.”
에우테르페 레코즈는 아직 영세 음반사에 가까운 곳인데도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그런 부분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난 그런 그의 수혜를 받은 또 한 사람이기도 했다. 작년부터 어쿠스틱 엔지니어링에 대해 이것저것 배우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난 그 강의의 수준이 굉장히 높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작곡 프로그램에 대한 것도 아마 마찬가지겠지.
이래서 괜찮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당연히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자선사업가가 아니고 이 가치 있는 교육은 마냥 무료가 아니다. 음반에 대한 이야기도 살짝 끼워 넣는 걸 보니 음반제작사로서 원하는 것이 있어 보인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사실 우리도 비용을 지불하고 교육을 받는 쪽이 편하다. 연주자로서 음반을 기획하는 쪽이 시간과 에너지 소모가 훨씬 더 크니까.
하지만 음악가로서 주고받을 수 있는 것들의 크기를 따진다면 이쪽이 서로에게 훨씬 이득이었다. 서로가 손해인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균형과 공동체 의식이 우리 사이에 존재했다.
에르네스트 역시 그 부분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전속계약 중인 음반사가 있거나 하진 않은 몸이니 문제가 될 일은 없으리라.
“……고맙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제가 쓰는 시스템과 프로그램을 보여드리죠.”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곧장 에르네스트를 데리고 마스터링룸 정중앙에 있는 시설로 향했다. 그러고는 의자를 하나 가지고 와선 에르네스트를 옆에 앉혔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기초적인 세팅부터 가르쳐드리죠.”
악보와 노트를 가져다 놓고 화면을 보면서 가르쳐준다. 에르네스트는 처음엔 그냥 가만히 듣기만 하더니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부턴 적극적으로 질문도 하며 배우기 시작했다. 프로듀서 역시 열성적인 학생에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
난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서 차를 홀짝이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건 약간 슬펐지만, 시시각각 그가 작곡가로서 또 하나의 도구를 완성해가는 장면을 지켜보는 건 그냥 그 자체만으로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