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58화 (658/1,277)

##  658화

마카로프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는 메인부스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분명 필요할 거라 생각해서 피아노를 조율해 놓고 마이크도 확실하게 세팅을 완료해 놓았다. 마카로프는 항상 타티아나가 오기로 한 날은 특별히 피아노를 더 신경 써서 준비해 놓곤 했다.

거기에 혹시 몰라 촬영용 카메라를 놓고 이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예선 곡 목록까지 모두 뽑아두었다. 타티아나가 필요로 한다면 무엇이든 마카로프는 제공해 줄 수 있었다.

“…….”

마카로프는 사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에르네스트를 가르치는 것도 좋긴 했지만, 작년부터 마카로프의 음악관을 사로잡고 있었던 건 늘 타티아나였다.

그녀가 보여 주었던 서슬 퍼런 집념과 음악성은 몇 단계를 거쳐 한계를 뛰어넘으면서, 근래 들어 보다 성숙하고 우아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 함께하며 심지어 데이터로 남길 수도 있다는 것에 마카로프는 직업적 자부심을 느꼈다.

오늘 역시 그 시간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잠시 피아노를 써도 괜찮을까요? 프로듀서.”

두 사람은 합의가 끝났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가온 타티아나가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그녀는 어떤 곡을 연주할지 먼저 설명하거나 상의하지 않는다. 일단 연주한다. 그다음 감상을 물어볼 뿐이다.

마카로프는 흔쾌히 수락하며 메인부스로 그녀를 인도했다. 타티아나는 싱글 부스가 아닌 것에 대해 의아함을 표하지도 않았다. 준비된 무대를 향해 걸어 나가는 피아니스트의 행보와도 같았다.

잠시 후 그녀가 커다란 합주용 메인부스 한가운데 위치한 피아노 앞에 앉았고, 마카로프는 그녀를 향해 집중된 모든 녹음용 마이크의 전원을 켜고 준비를 완료시켰다.

부스 밖에 서 있는 에르네스트는 팔짱을 끼고 그 안을 지켜보았다.

“시작하십시오.”

“…….”

마카로프의 말이 떨어지고, 타티아나는 흔히 하는 웜업도 없이 바로 본 연주에 들어갔다.

오른손이 흐늘거리는가 싶더니 곧 무시무시한 속도로 건반을 휘두른다. 트릴인지 스케일인지 분간이 잘 안 갈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그럼에도 모든 음들이 귓속에 정확하게 파고든다.

‘모슈코프스키…….’

19세기 독일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모리츠 모슈코프스키의 에튀드 op.72의 6번째 곡이었다.

프란츠 리스트와 피아노 듀엣 협주곡을 연주했을 정도로 수준 높은 기교와, 전 유럽인들에게 사랑받은 곡들을 여럿 써 낸 작곡가로서의 우수함까지. 모슈코프스키는 당대에 굉장히 유명한 음악가 중 한 명이었다.

그런 그가 남긴 수십 곡의 에튀드들은 높은 기교와 음악성을 필요로 하는 곡으로서 지금도 여러 피아니스트들의 손에서 연주되곤 한다.

타티아나는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입혔다.

이전에 아나스타샤가 보여 주었던 기교를 의식한 것인지 속도감이 한층 더 빨라졌다. 하지만 음이 뭉개지는 일은 전혀 없이 훨씬 선명해지고 있었다.

“…….”

무엇이든 빠르면 흐릿해진다. 사람의 눈은 굉장히 둔해서 한순간에 인지할 수 있는 세상의 한계가 한정되어 있다. 때문에 그보다 빠르면 잔상을 느끼고 제대로 볼 수 없게 된다.

귀 역시 마찬가지로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 한계는 눈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0.0004초. 사람의 귀가 구분할 수 있는 순간이다. 그 사실을 확실하게 자각할 수 있도록 타티아나는 귀에 1초에 수십 개의 음들을 쏟아붓는다.

마카로프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주입되는 음악에 휩쓸리면서 순간적으로 시간이 길게 늘어나 세상의 프레임이 분리되어 세세하게 보이는 것 같은 착각마저 느꼈다.

단순히 빠른 음악을 듣는다고 해서 이런 느낌이 들진 않는다. 타티아나가 음악과 시간을 다루는 기술이 예상을 초월할 정도로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이 음악은 타티아나가 기교적인 성과를 거두면서 동시에 쟁취하려고 한 어떤 지점일 것이다. 마카로프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그녀의 음악을 기록하는 그래프만을 화면이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걸 그냥 흘려보내듯 친다고.’

스스로가 얼마나 뛰어난지 증명하기엔 이 곡 하나면 충분할 것 같은데, 타티아나는 그리 힘을 들이지도 않고 휘리릭 건반을 쳐 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풀지도 않고 바로 연주에 임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곡은 정말로 그저 연습곡으로 쓰일 뿐이었다.

“…….”

순식간에 연주를 마친 타티아나는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마카로프에게 다음 곡을 연주해도 되겠느냐고 묻는 표시였다. 마카로프는 마이크로 이어서 해도 좋다고 말했고, 타티아나는 다음 곡을 시작했다.

일요일 아침. 맑게 울리는 교회 종소리가 연달아 울리고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온다. 아이들의 발소리와 웃음소리가 양옆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스카를라티의 소나타 K380이었다.

먼저 모슈코프스키의 에튀드로 기교를 보이고 웜업도 마쳤으니 그다음은 분명 더 기교적인 곡을 꺼내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마카로프는 예상 못한 선곡에 약간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타티아나의 연주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분명 그렇게 어려운 곡은 아니다. 요즘은 동네 어린애들도 이 정도는 친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똑같이 쉬운 곡도 얼마나 어렵고 수준 높게 연주할 수 있는지를 보이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피아니스트로서의 역량을 방증했다.

차라리 어려운 곡을 어렵게 연주하는 편이 낫다. 음표 하나만으로도 실력을 보일 수 있다는 건 말처럼 그리 쉬운 게 아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당연하다는 듯 해내고 있었다. 그녀가 평소 음색에 얼마나 신경 쓰고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가, 그 결실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

주말 아침을 연상케 하는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곡은 금세 끝났다. 두 곡을 모두 합쳐 기록된 건 겨우 5분 정도. 하지만 정말 중요한 5분이었다. 마카로프는 분명하게 모든 녹음 파일들을 저장하고 화면을 지켜보았다.

연주를 마친 타티아나는 손목을 살짝 스트레칭하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잠시 숨을 멈췄다가, 피아노 쪽으로 내쉬는 것과 동시에 손 역시 건반 쪽으로 내뻗는다.

‘……하.’

타티아나는 다음 독주곡을 연주하고, 또 다음 곡을, 그리고 또 다음 곡을 연주했다. 오래된 동화를 이야기해 주는 이야기꾼처럼, 그녀의 레퍼토리는 정말 끝이 없는 것처럼 이어져 나갔다.

미리 준비도 딱히 하지 않았으니 순간적인 센스로 선곡해서 연주하는 것인데도 이 전체의 프로그램에 스토리와 흐름이 느껴진다.

시대를 꿰뚫고 구조를 쌓는다. 마카로프는 이 전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도 잘 모를 지경이었다. 그저 타티아나라는 피아니스트가 노래하는 한 이야기라고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렇게 열 곡 가까이 곡들을 쏟아낸 타티아나는 그제야 고개를 흔들더니 손을 놓았다. 잠시 쉬려는 것 같았다.

마카로프는 할 말이 정말 많았다. 지금 녹음한 것을 같이 들으면서 감상을 전하고 이야기를 하려면 녹음한 것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각오하고 있는 마카로프가 무색하게 갑자기 부스의 문이 벌컥 열렸다.

가만히 보고만 있던 에르네스트가 부스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타티아나에게 말했다.

“그만할 거야?”

타티아나는 그를 보더니 당황해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1시간 되지 않았나요?”

“정확하네?”

“제가 연주자잖아요?”

지난 1시간을 음악으로 지배하고 있던 건 그 누구도 아닌 타티아나였다. 그녀 정도로 정교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면 연주를 마친 시간을 아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1시간쯤 되면 약간의 오차가 생기긴 한다.

“그런데 아직 1분 정도 남아 있어.”

“……그래요?”

“응.”

“1분짜리 곡은…… 무엇으로 해야 할까요. 추천해 주시겠어요?”

타티아나는 별로 개의치 않는 투로 그렇게 물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말했다.

“협주곡 하자.”

“예?”

그제야 그녀가 당혹스러움을 표했다.

1분을 남겨 놓고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 올려다본다.

“그렇게 짧은 협주곡이 어디 있나요?”

“없지. 그런데 꼭 1시간에 맞춰서 끝낼 필요는 없잖아? 좀 길어질 수도 있는 거지. 연습이 늘 그런 것처럼. 안 그래?”

“저기…….”

에르네스트의 말대로 정한 시간이 딱 끝나자마자 피아노에서 손을 놓아 버리는 피아니스트는 없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말이 59분이지 내내 한 번도 쉬지 않고 독주곡들을 연달아 연주한 피아니스트에겐 더더욱.

타티아나도 너무 당당한 그의 말에 말문이 막힌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결국 한숨을 작게 내쉬며 말했다.

“……알았어요. 처음부터 이러실 생각이었죠?”

그녀의 물음에 에르네스트는 웃기만 했다. 타티아나는 얄밉다는 듯 눈을 흘겼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함께 연주하자고 제안하는 연주자들을 결코 거부하지 않는다.

그렇게 투 피아노 협주곡 리허설은 정해졌다. 타티아나는 주위를 휙 둘러보더니 물었다.

“그나저나 피아노는 어떻게……?”

“그건 제가 준비하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마카로프가 바로 끼어들었다.

그는 부스로 들어가선 두 사람을 데리고 스튜디오에 있는 악기창고로 향했다. 그곳엔 수많은 악기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간혹 악기를 필요로 하는 연주자들이 있으면 대여해 주는 용도였다.

그리고 제일 눈에 띄는 건 벽에 있는 선반에 놓인 수십 개의 건반들이었다.

“신디사이저라면 종류별로 다 구비해 놓고 있어서. 에르네스트. 원하는 메이커라도 있습니까?”

“어…… 이런 건 잘 몰라서. 프로듀서가 추천해 주시죠.”

“하하, 그럼 롤랜드로.”

정한 신디사이저를 선반에서 내린 다음, 부스로 가지고 와서 설치하는 데까지 몇 분. 이젠 정말 1시간이 지났지만 신디사이저까지 설치된 상황에 시간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신디사이저의 건반을 몇 번 눌러 보더니 마카로프에게 물었다.

“이거 다른 악기 소리도 낼 수 있는 거죠?”

“맞습니다. 오케스트라에 들어가는 악기라면 전부 가능합니다. 다만 지금 바로 다루기엔 조금 어려울 테니…….”

“대충 가르쳐 주세요. 트럼펫과 퍼커션만.”

이 전문가용 신디사이저는 쉽게 다룰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카로프는 아까 전 에르네스트가 모든 것들을 배워 나가는 속도를 보고는 어느 정도 믿음을 가졌다. 그 손에서 이 신디사이저가 어떻게 다루어질지 기대되었다.

“그럼 이 버튼들의 설정을…….”

마카로프는 일단 자신이 할 수 있는 대로 편하게 신디사이저를 세팅해 주고 간략하게 설명했다. 에르네스트는 진지한 얼굴로 그의 설명을 듣고, 몇 번 눌러서 확인해 보기도 했다.

이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진 그의 천재성과 역량에 달린 일이다.

그 광경을 타티아나는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익숙하지도 않은 악기를 다룬다는 것에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녀를 보고는 걱정 말라는 듯 건반을 툭툭 쳤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지.”

“……이런 말은 죄송하지만 전자 트럼펫보단 그냥 전자 피아노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타티아나는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현으로 소리를 내는 악기를 다루는 그녀로선 전자 악기에 큰 기대가 없는 게 당연하기도 했다. 실제로도 그 차이는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고.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지금 주어진 것이 이 악기라면 최대한 활용해 보겠다는 것 같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협주가 시작된다.

“…….”

마카로프는 숨죽인 채 화면을 바라보았다.

척 봐도 천재에 속하는 에르네스트를 가르치면서 느꼈던 고양감도 좋았다. 작곡 프로그램이나 음향 시스템 등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에르네스트보다 몇 배는 더 시간을 들여야지 간신히 어느 정도 배운다. 그에 비하면 에르네스트는 그야말로 가르칠 맛 나는 수강생이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그저 컴퓨터로 작곡을 배우려 하는 작곡가가 아니었다.

러시아의 젊은 천재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천재 피아니스트. 그 이름은 몇 년도 전부터 러시아 전역에 떠들썩하게 울렸으며 지금 역시 전혀 퇴색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의 도전은 아무 근거도 없이 시작되지 않는다.

“……!”

타티아나의 솔로 피아노로 시작된 음악은 곧 에르네스트가 신디사이저로 화려하게 이어받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마카로프는 놀라움을 넘어 황당함마저 느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걸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던 에르네스트는 다이얼과 버튼 실시간으로 조작해 가면서 한 번에 몇 개나 되는 악기들의 섹션을 연주하며 타티아나의 소리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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