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59화 (659/1,277)

##  659화

이곳에서 내가 특별히 원하는 건 없었다.

그랜드 피아노가 제대로 두 대 배치되어 있는 듀오 연습실이라면 모를까, 저렇게 즉석에서 바로 설치한 신디사이저에 많은 것을 바라면 안 된다.

‘리허설이니까…….’

간단히 생각하기로 했다.

조건은 열악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에르네스트가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하지 말자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난 상황이나 조건 등을 그리 따지지 않는 연주자이기도 하고.

얼마 전 리빈스크에서 카밀레의 딸 달리아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 썼던 디지털 피아노는 사실 그리 마음에 드는 물건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쓸 만했고, 좋은 기억을 나누는 데엔 충분했다. 이번에도 주어진 것들을 잘 써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옆을 보니 에르네스트는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배운 대로 신디사이저를 조작하고 있었다. 처음이라 했으니 익숙할 리가 없는데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조용히 그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돌리더니 나와 눈을 마주했다. 난 그에게 물었다.

“준비되셨나요?”

“대충.”

“대충이면 안 되는데요.”

“……미안. 처음 만져 보는 거라.”

“불안해요.”

“일단 해 보자. 리허설이잖아? 그래서 무슨 곡 할 건데?”

“…….”

나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려고 했었는데, 에르네스트는 뭔가 열심히 하려는 건지 아닌 건지 잘 모르겠다.

난 눈을 슬쩍 흘기곤 곡 이름을 불러 주었다. 그는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준비해 준 전자악보에 악보를 띄웠고, 난 가지고 온 악보를 펼쳤다.

그가 악보를 확인하기까지 몇 분 정도.

이윽고 준비를 마친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시작하자.”

“알겠어요.”

가볍지만 허투루 하는 일 없도록, 난 손을 들어 올려 건반 위에 내려놓았다.

몇 번이나 연습했었던 협주곡의 첫 마디가 울린다. 피아노로 시작되는 선율은 감미롭게 흐르며 주위를 맴돌다가, 녹음용 메인 부스의 방음벽에 닿았다. 주파수에 따라 어떤 음들은 살아남고 어떤 음들은 사라져간다.

피아노의 소리가 이 방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예민하게 느끼면서, 난 적절히 음색을 조정했다. 조금 더 포근하게 우리 주변을 덮는 것처럼.

그렇게 구사해낸 음악은 첫 주제에 잘 어울리면서 동시에 이 방에도 적절하게 어우러졌다.

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피아노를 연주했다. 다음은 에르네스트가 오케스트라로 지원할 차례였다. 신디사이저의 스피커에서 쏟아질 전자음원에 놀라지 않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순서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도 순간 미스 터치를 할 뻔했다.

‘!!?’

오케스트라 파트 연주는 신디사이저에서 나오지 않았다. 부스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프로듀서가 신디사이저와 스피커를 연결한 것 같은데, 그럼 미리 말을 해 줬어야지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지금 나오는 소리는 피아노의 것이 아니었다.

긴 트럼펫 소리가 뿜어져 나오고, 그 뒤를 이어 몇 번을 더 짧게 불다가 갑자기 목관이 선율을 이어간다. 어떤 악기인지 분명히 구분이 가능했다. 큰 기대 하지 않았던 전자음악의 음색은 예상보다 훨씬 자연스러웠다.

난 이게 실제로 연주하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리기까지 했다. 에르네스트는 이쪽은 보지도 않고 신디사이저의 건반을 연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피아노를 다루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귀로는 저음의 바순과 고음의 트럼펫이 동시에 들리는 걸 보니 왼손이 바순, 오른손이 트럼펫을 맡고 있는 것 같은데…… 신디사이저는 건반을 좌우로 나누어서 저렇게 소리가 나도록 설정할 수도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잠시 뒤엔 몇 개의 악기가 동시에 들렸다. 페달과 레가토로 악기들을 하나씩 잡아 놓고 나머지를 하나씩 연주한다. 귀로 듣고 눈으로 확인하고도 믿기 어려웠다.

에르네스트는 한 번에 여러 개의 악기를 다루어야 하므로 저음역대와 중음역대 그리고 고음역대를 훨씬 더 분명하게 나누고 있었다.

그 소리는 크고 웅장해서 날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

지금까지 계속 피아노 연주자로 살면서도 처음 보는 광경에 넋이 나가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이 정말 좁았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난 그 좁은 세상에 깊게 손을 집어넣은 대가로, 손에 쥐게 된 것들이 조금 있었다.

건반 위에 살짝 풀어헤친다.

‘둘…….’

이 곡은 내게 두 개의 선율을 허락한다.

난 그 선율들을 분명하게 이어 나가며 천천히 타이밍을 기다렸다. 무턱대고 무기로 사용했다간 비웃음당하고 무너질 뿐이다. 해가 저물면 달이 떠오르는 것처럼 기다리면 당연한 때가 온다.

이윽고 달이 떴다.

곡이 내게 주도권을 허락하는 때가 왔다. 난 건반을 휘두르며 두 선율의 사냥개로 하여금 귀에 들리는 음원들의 뒤를 쫓게 했다.

두 줄기의 파동이 달려 나가 부스 안을 떠도는 소리들과 나란히 어울리다가 콱 물고 흔든다.

거대한 스피커로 사방에서 울려 대는 건 전혀 상관없었다. 오케스트라 한가운데에 파묻히게 되면 이렇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 이 소리의 포위는 오케스트라에 비하면 약하다. 난 그 모든 것을 꿰뚫으며 선율이 옆에 있는 에르네스트를 향하게 했다.

에르네스트의 소리도 약간 변화했다. 내 음악을 의식한 낌새가 분명하게 느껴진다. 전자음원임에도 이런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이 우수한 장비들과 그것을 다루는 연주자의 실력을 가늠케 했다.

난 감탄하며 더더욱 솔로 피아노를 밀어붙였다.

“……!”

소리를 쏘아 보내고, 되돌아온 것을 쳐 낸다. 잠자코 숨죽이며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선 그전까지의 모든 것을 폭풍 속으로 던져 넣어 버린다. 몇 초 사이에 낮밤이 바뀌고 날씨가 뒤집힌다.

정신없이 눈으론 다음 악보를 읽고 손을 움직이며 내 소리를 듣고 피드백하며, 동시에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는 다양한 소리들을 해석하고 다음 총보를 눈에 넣으며 대비한다.

에르네스트가 다양한 악기 소리를 전자음원으로 낸다면 나는 피아노 한 대로 주법과 터치를 바꿔 가며 다채로운 음색을 만들어냈다.

분명 피아노 협주곡을 피아노 듀오로 리허설하는 자리였는데 어느샌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와 에르네스트는 우리들만의 장난을 치고 있었다. 늘 해 왔던 놀이이지만 조금 더 까다롭고 조금 더 즐겁다.

그리고 그 놀이로 깨닫게 된 음악적 에센스는 홀로 하는 연습 몇 회 분량을 월등히 뛰어넘고 있었다.

지금까지 놓치고 있었던 포인트와 음색, 이미지. 그 모든 것들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즉각 반영해낸다. 에르네스트의 반응 역시 서로의 생각을 읽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빨랐다.

우리의 놀이는 10분가량 되는 1악장을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후…….”

“…….”

같은 음악을 공유하면서 호흡까지 박자에 종속되어 버린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긴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본다.

에르네스트는 더 할 거냐며 턱을 까딱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장 이 곡의 2악장과 3악장을 넘어서 다른 협주곡들도 더 해 보고 싶었다. 에르네스트가 지닌 음악적 역량을 이렇게도 확인할 수 있다는 게 너무나 기쁘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물어볼 것이 있었다.

“……뭐예요?”

“뭐가.”

“신디사이저는 처음인 것 아니었나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서 묻자 그가 당연한 소리를 왜 하냐며 어깨를 으쓱했다.

“처음이지.”

“그런데 어찌 그리 잘 다루시나요?”

“건반 악기는 피아노 말고도 이것저것 다뤄 본 적이 있어서. 이건 약간 오르간과 비슷한 느낌으로 접근하니까 쓸 만하던데. 어색하긴 하지만.”

“오르간이요??”

오늘 그는 정말 날 여러 번 놀라게 한다.

오르간이라니 대체 언제? 그를 알고 지낸 지도 이제 2년이 다 되어서 어느 정도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란 생각이 들었다.

“에르네스트, 오르간도 연주할 줄 아세요?”

“약간. 그간 보여 줄 일이 없었겠네.”

“그…… 이것저것이라면 다른 악기는 또 어떤 것들이 있나요?”

“글쎄, 하프시코드나 클라비코드도 조금. 아, 하머클라비어는 보여 준 적 있었잖아.”

하머클라비어? 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에르네스트가 섭섭하다는 듯 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아.”

난 그제야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기억을 떠올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내가 여전히 피아노 소리에 대한 기준을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을 무렵, 그는 날 오래된 피아노들이 있는 살롱풍 연습실로 데리고 가선 하머클라비어로 베토벤의 소나타를 원전 연주해 준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깊게 생각은 못 했었다. 난 중얼거리며 말했다.

“세상에……. 그래도 생각도 못 했어요. 그때도…… 그냥 그 자리에서 바로 연주하신 걸로…….”

“다 비슷비슷하긴 하지. 타티아나 너도 그때 에라르 피아노를 바로 쳤었잖아?”

“그건 그래도 피아노잖아요…….”

에르네스트는 쉽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피아노와 오르간은 물론이고 하프시코드나 클라비코드도 모두 완전히 다른 악기였다. 물론 같은 건반을 눌러 연주하는 악기이니 소리를 내는 것 정도는 같은 요령으로 할 수 있겠지만, 깊게 들어가 음악을 구사하려 한다면 필요한 감각이나 주법이 전혀 다르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현존하는 거의 모든 건반악기들을 두루 다룰 줄 아는 것 같았다. 그만큼 다양한 주법을 섭렵하고 있을 테니, 처음 접한 신디사이저에 빠르게 익숙해질 수 있었던 것도 이해가 간다.

어깨의 힘을 풀며 나도 모르게 말했다.

“졌어요, 정말. 설마 건반악기 전반을 모두 다루실 줄은…….”

“이거 대결 같은 거였어?”

“그건 아니지만요…….”

난 중얼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이미 자타공인하는 천재이지만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피아노로는 같은 연령대에 비견할 사람이 드물 정도로 뛰어나고,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건반악기들을 전부 다루고 심지어 작곡가로서의 역량도 일취월장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는 훨씬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 가겠지.

“아하하.”

“왜?”

“이젠 다루실 수 있는 건반악기 목록에 신디사이저도 들어가겠네요?”

“조금 더 써 보고. 지금까진 누가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고 만질 기회도 별로 없었거든.”

당연히 중앙음악학교에선 배울 일이 없고, 에르네스트를 아는 누구나 그를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라 생각한다. 에르네스트가 음악을 연주할 때면 항상 콘서트 그랜드 피아노가 주어진다. 아마 그는 업라이트 피아노도 드물게 만져 봤을 테지.

그러나 그는 자신을 주어진 조건에 옭아매지 않았다. 자신 있게 발을 내디뎌 자신의 한계를 넓힌다.

난 그가 반드시 그랜드 피아노에만 집중해야 한다 생각하지 않는다. 연주자이기에 앞서 음악가로서 에르네스트가 작곡에도 도전하겠다는 걸 응원하게 된 이후로 난 그가 무엇을 하든 괜찮다고 보는 편이었다.

나 없이 혼자서 협주곡을 작곡하든 신디사이저를 연주하든 상관없다. 그저 그가 음악가로서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그래도 혹시 가능하다면…… 그 편린이나마 내가 향유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바라보니 에르네스트는 즐겁다는 듯 웃었다.

난 속내를 꺼내지 않고 그에게 말했다.

“그럼 지금 더 써 보죠. 다음 악장 시작해도 괜찮을까요?”

“그래.”

에르네스트는 픽 웃더니 다시 신디사이저를 조작했다. 난 그가 뭘 하는지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그가 날 위해 또 무언가 놀랄 만한 솜씨를 준비하고 있다면 피아노 건반으로 응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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