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60화 (660/1,277)

##  660화

1악장을 끝낸 후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다시 2악장 연주로 들어갔다.

에르네스트가 다루는 신디사이저와 4개의 스피커에서 쏟아져 나오는 음원의 폭격.

타티아나는 그 중심부에서 포화에 집중당하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음악으로 반격한다.

어떻게 보면 두 연주자가 끊임없이 경쟁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협주곡을 뜻하는 콘체르토concerto의 어원은 경쟁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나오기도 했고.

하지만 이 경쟁은 무작정 맞서는 싸움과 다르다.

오랜 시간 쌓아올려진 시스템과 규칙이 품위와 질서를 이루었다. 협주곡의 작곡가는 어떻게 하면 연주자들이 화려하게 실력을 보일 수 있을지 고려하며 곡을 쓴다. 두 사람의 경쟁적인 연주가 그 자체로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

음악적인 감상만으로도 마카로프는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프로듀서로서의 입장으로 기술적인 감상을 하자면, 정말 기절하고 싶을 정도였다.

타티아나의 기교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가 어지간한 비르투오조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우수하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 이제 와서 뭘 보더라도 그렇게까지 놀라진 않는다.

어느 날 타티아나가 손을 쓰지 않고 초능력으로 건반을 움직인다 하더라도 그는 그저 타티아나라면 할 수 있을 줄 알았다고 생각해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르네스트의 경우엔 조금 달랐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수준은 이미 최고급이라 할 수 있으니 타티아나와 비슷하리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건 그냥 뛰어난 피아니스트라 해서 가능한 연주가 아니다.

지금도 그는 신디사이저의 건반을 연타하는 도중에도 이따금 손을 뻗어 다이얼을 움직이면서 미세하게 소리들을 컨트롤하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기계적 음향 효과를 이끌어내야 하는 키보디스트들도 저런 연주를 하려면 오랜 시간을 들여 배워야만 한다. 물론 제품마다 모두 다르니 따로 익숙해져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오늘 처음 만져 본 낯선 신디사이저를 가지고도 설명 한 번만 듣고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있었다.

자신의 악기를 가지고 다니지 못하는 피아노 연주자들이 어디에서나 잘 적응하는 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 수준은 상식을 뛰어넘어 있었다.

처음엔 에르네스트가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냉정하게 연주를 지켜본 마카로프는 그가 철저하게 배운 부분들만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연주를 하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미리 배우고 왔다면 다른 버릇이나 기교 등이 무의식중에서라도 나오기 마련인데, 에르네스트에겐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프로듀서로서 잔뼈가 굵은 마카로프는 그 누구보다 그 부분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프로 피아니스트의 손놀림으로 건반을 연주하며, 마카로프에게 배운 그대로 신디사이저를 조작해서 그 소리를 다른 악기로 변모시킨다. 그뿐인데도 그 모든 것들이 합쳐지자 거의 마술 같은 효과를 이루며 에르네스트는 홀로 오케스트라가 되어 있었다.

타티아나가 종종 피아노 단독으로 오케스트라적인 효과를 내는 것과는 다르게 훨씬 적극적이고 분명한 연주였다. 일반적인 피아니스트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엄청난 재능에다가 노력, 그리고 작곡이라는 분야에까지 넓게 손을 뻗는 탐구심이 합쳐진 결과였다.

‘대체…….’

천재라는 말조차 너무 단순한 평가였다.

아는 키보디스트들을 모조리 다 데려와서 지금 이 연주를 보여 주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고 싶을 정도였다.

마카로프는 헛웃음을 흘리다가, 이 순간에 함께한다는 것에 감사하며 녹음 중인 화면을 응시했다. 오늘은 첫날인데도 이 정도였다. 다음엔 대체 어떨지 상상도 잘 가지 않는다.

“…….”

그렇게 두 사람의 연주는 계속 이어졌다.

30분짜리 협주곡을 하나 마친 후엔 40분짜리를 하나 더 쉬지 않고 연주한다.

이미 타티아나의 연주 시간은 2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강골인 피아니스트들도 지쳐서 손에 힘이 빠질 텐데, 타티아나는 처음보다 더 강한 소리를 또렷하게 쏟아내고 있었다.

마카로프는 작년의 타티아나를 떠올렸다. 그때도 그녀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 1번을 몇 번이고 연주하면서도 지친 기색을 거의 보이지 않고, 마지막 녹음 때 최고로 좋은 음악을 연주하고는 그제야 쓰러졌다.

저런 연주자들은 스스로 만족하기 전까진 집중력을 끊어 내지 못한다. 밖에서 누군가가 말려 주어야 한다. 마카로프는 그 누구도 맡기 싫은 그 역할을, 다름 아닌 자신이 맡아야 함을 깨달았다.

음악가로서의 욕심보다 어른으로서의 여유가 이번엔 조금 더 앞선다. 그만큼 마카로프는 타티아나를 아끼기도 했다.

두 번째 협주곡이 마무리되자마자 마카로프가 부스 문을 열고 들어서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 어떻습니까? 타티아나.”

순간 타티아나의 얼굴에 아쉬움이 맺혔으나, 마카로프의 말을 듣고 무언가 자각한 것 같았다. 곧게 서 있던 자세가 일순 흐트러졌을 뿐인데, 순식간에 연주자로서의 집중력이 빠져나가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타티아나가 헤실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녹음은 어떤가요?”

“전부 잘 되었습니다.”

“그럼…… 괜찮아요.”

이내 만족한 듯 그녀가 고개를 다시 숙이고 심호흡을 하며 손을 스트레칭했다. 아직 여력이야 있겠지만 꽤나 지친 듯하다.

그런 그녀보단 조금 덜 지친 에르네스트는 연주 도중엔 시험 삼아 써 볼 수 없었던 기능들을 이것저것 활용해 보면서 신디사이저 건반을 누르고 있었다. 각종 이펙터와 필터 등을 그가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면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잠시 건반을 가지고 놀던 그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확실히 이거 재밌긴 하네. 새 장난감을 얻은 기분이야.”

그러면서 신디사이저 옆을 툭 친다.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에게 신디사이저는 장난감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충분히 흥미가 돋는 장난감에 속하는 듯했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던 에르네스트는 순간 마카로프를 바라보더니 농담조를 이어나가며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내 건 아니지만.”

마카로프는 농담으로 받지 않았다.

“드릴까요? 그 장난감.”

“네?”

난데없는 제안에 에르네스트가 되물었다. 적이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다. 마카로프는 그가 정말 마음에 들었기에 하는 말이었으므로 괜한 소리는 하지 않기로 했다.

“원하신다면 드리도록 하죠. 아마 작곡을 계속하신다면 가지고 있는 게 조금은 유리할 겁니다.”

“집에 그랜드 피아노 있어요.”

“피아노를 종류별로 몇 대쯤 가지고 있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죠.”

모든 건반악기들은 각기 다른 악기나 다름없다. 마카로프는 심지어 신디사이저만 수십 개나 수집하고 있었다. 그는 악기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에르네스트 정도 되는 연주자라면 여러 악기를 지닐 자격이 차고 넘친다. 마카로프는 가능하다면 그에게 몇 개라도 더 주고 싶었다. 어차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단 에르네스트가 사용하는 것이 몇 배는 더 가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하나도 덥석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다. 아직 어리긴 하지만 사회활동을 하면서 돈도 깨나 있을 테니 자존심이 있는 모양이다.

“살게요, 그러면.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거 꽤 비싼 모델입니다. 중고라고 해도.”

“싸게 주세요 그럼.”

“하하하, 하지만 그럼 말을 꺼낸 제가 강매하는 게 되잖습니까?”

에르네스트가 먼저 흥미를 보이긴 했지만 주겠다고 말한 건 마카로프 쪽이었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판다고 하면 마카로프야말로 창피하게 된다.

마음속 결정을 완전히 마친 마카로프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가져가시죠. 원래 진짜 유명 연주자들은 악기 자기 돈으로 안 삽니다. 다 인도스먼트endorsement 받지.”

“그건 무슨 일반화예요? 돈 주고 사는 사람도 많아요. 그리고 전 제 에이전시에도 그런 건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

“말이 그렇다는 거고, 그냥 가져가란 말입니다.”

“…….”

에르네스트는 잘 모르는 사람에게 빚을 지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 것 같았다. 그렇게 진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걸 아는 눈치였다. 마카로프도 처음 에르네스트를 봤을 땐 그에게서 음악을 받아낼 생각을 했으므로 에르네스트의 우려가 그렇게 틀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마카로프는 딱히 에르네스트에게 직접적으로 바라는 것이 없었다.

이 악기를 건네주는 것만으로도 그는 작곡가로서 성장하는 데에 도움을 얻을 수 있을 테고, 언젠가 반드시 음악계 전체에 음악으로 보답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건 어떠한 바람 같은 것이 아니라 정해진 미래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엄청난 리턴에 비하면 마카로프가 개인적으로 받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그는 에르네스트에게 이 악기를 넘기는 게 무척이나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조건 주고야 말겠다는 진심이 전해졌는지 에르네스트는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까지 진심을 보이는데 여기서 계속 거절하거나 대가를 이야기하는 것도 꽤나 멋없는 짓이라는 걸 깨달은 눈빛이다.

결국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쓰겠습니다.”

“좋습니다. 물건은 트렁크에 들어가지 않을 테니 포장해서 댁으로 보내 드리죠.”

“……알겠습니다.”

에르네스트는 짧게 대답했지만 분명 정중한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마카로프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부디 제대로 써 주길 바랄 뿐이다.

그렇게 에르네스트와 이야기를 마친 마카로프는 덩그러니 앉아 있는 타티아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표정엔 온갖 감정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놀라움과 기쁨, 그리고 자랑스러움. 친구가 선물을 받은 것에 대한 부러움 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음악적 재능과 장래성이 다시 한번 인정받은 것에 대해 그저 기뻐하며 축하할 뿐이었다.

마카로프는 그런 타티아나를 보며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무언가 주고 싶어도 딱히 줄 만한 것이 없었다. 애초에 베르체노프가는 이런 영세 음반사로부터 받을 만한 것이 없다.

그렇다면 왜 타티아나는 지금까지 이곳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가.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마카로프가 줄 수 있는 것 또한 하나뿐이고.

“자, 그럼 차부터 마시고 잠깐 쉬었다가 계속할까요.”

“계속이요?”

이제 끝난 거 아니냐는 듯 타티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마카로프는 컨트롤룸 쪽으로 엄지손가락을 향하며 말했다.

“녹음한 것 들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죠.”

“더 녹음했다간 오늘 집에 못 갈지도 모릅니다. 그럼 아버님에게 미리 전화해 두어야겠죠.”

2시간 녹음한 것들을 들어 보고 분석하면 어쩌면 더 걸릴지도 모른다. 마카로프는 저번에 유리 알렉세예비치로부터 전화를 받았던 일을 떠올렸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말 일찍 보고해 놓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타티아나 역시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건 원치 않는지 약간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저녁 전까지 돌아갈게요…….”

“그럽시다.”

사실 타티아나가 온다는 말을 듣고 이후 스케줄을 모두 비워두었기 때문에 밤을 새워도 상관없지만, 그 또한 그의 욕심이 들어가 있는 바람이다.

마카로프는 나지막이 웃으며 컨트롤룸 쪽으로 손짓했다.

테이블에 두 사람을 앉혀 놓고 마카로프는 녹음된 음원을 재생시켰다. 타티아나가 연주한 독주곡 모음이었다.

그렇게 음악을 틀어놓은 마카로프는 차를 준비해서 테이블로 가지고 갔다.

이미 두 사람은 열띤 토론 중이었다.

“모슈코프스키 에튀드를 포함시킬 거면 6번만으론 모자라. 2번이나 13번도 포함시키는 건 어때?”

“균형이 기울지 않을까요? 기교적 증명은 그 정도면 되리라 생각하는데요.”

“원래 예선 DVD는 에튀드만 잔뜩 넣는 거야. 심지어 하농 스케일 쳐서 보내라는 곳도 있어.”

“하, 하농이요?”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겪은 콩쿠르 등에 대해서 이런저런 경험담을 말해 주었다. 그 이야기는 타티아나는 물론이고 마카로프도 흥미롭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다채롭고 유익한 이야기들이었다.

그 후로도 타티아나의 콩쿠르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 이야기는 따뜻한 찻잔이 몇 번이나 다시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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