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1화
입구를 막 나서자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인사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오늘 스튜디오에 6시간 가까이 있었다. 우리도 피곤하긴 했지만 우릴 상대한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피로도는 우리보다 훨씬 심하겠지. 게다가 그 시간에 대한 대가를 지금 프로듀서는 하나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난 오늘 일을 잊지 않겠다 생각하며 그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
“많이 배웠습니다.”
에르네스트도 정중한 태도로 인사했다. 그도 오늘 프로듀서가 내어 준 호의가 일반적인 호의가 아니라는 걸 분명히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우리의 감사를 받고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히죽 웃더니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저야말로 많은 공부가 되는 하루였던 것 같습니다. 타티아나, 에르네스트.”
대체 무슨 공부요? 난 거꾸로 묻고 싶을 정도였다.
우리 둘의 나이를 합쳐도 마카로프 프로듀서보다 적고, 프로듀서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음악과 함께 하면서 정말 깊이 있고 수준 높은 실력을 갖추게 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면 배우는 쪽은 우리 쪽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도움을 주면서도 스스로 무언가 또 느낀 바가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오늘 하루에 대해 어느 정도는 즉각 보답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해 본다.
“…….”
계단을 내려오니 저녁이었다. 해가 긴 시기라 아직 어둡진 않았지만 길게 뻗어오는 햇살이 건물을 휘감고 그림자를 길게 만들었다.
빅토르에겐 미리 전화를 해 두었더니 이미 검은 벤츠가 우리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난 먼저 차에 올라탔고, 그 뒤로 에르네스트가 따라 탔다.
“친구분 먼저 모셔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 부탁드릴게요. 빅토르.”
솔직한 마음으론 같이 저녁식사라도 하고 싶지만, 6시간 동안 집중한 그에겐 휴식 또한 필요했다. 오늘 얻은 것들에 대한 정리도 필요할 테고…… 오늘 오랫동안 함께 있었으니 각자의 시간을 가질 필요도 있었다.
난 오늘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꼽아 보다가 문득 웃음이 터져서 쿡 하고 웃었다. 에르네스트가 혼자서 왜 웃냐는 듯 돌아본다. 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에르네스트.”
“응.”
“잘 되었네요.”
그는 짚이는 게 너무 많은지 바로 대화를 받지 못하고 되물었다.
“뭐가?”
“선물도 받으셨잖아요?”
“그건…….”
에르네스트는 말을 머뭇거렸다.
이번에 그가 처음 본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신디사이저를 선물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심지어 그 신디사이저는 수십 만 루블이 넘는 고급 제품이었고,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거기에 끼워 준 전자음원은 그보다 더 비쌌다. 전자악기를 제대로 쓰려면 필요한 것들이 생각보다 꽤 많았다.
굳이 준다면 신디사이저만 받아 갈 생각을 했던 에르네스트는 자꾸 무언가가 추가되자 나중엔 약간 골치 아파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다 받기로 결정되었으니 상관없었다.
그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난 기분이 좋았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단순히 내 친구라는 이유로 그렇게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 오늘 있는 모든 것들은 그가 에르네스트를 정말 높게 평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처음 에르네스트를 잘 알고 있었을 프로듀서에겐 분명 높은 기준치가 예상되어 있었을 텐데, 분명 그것을 월등히 상회했겠지.
그런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그만큼 오늘 에르네스트가 보여 준 것들은 굉장했다. 처음 다뤄 본 신디사이저로 오케스트라 파트를 소화해 내고, 그 후로도 굉장한 장래성을 몇 번이나 증명해 냈다. 친구로서 너무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아깐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나에게만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솔직히 빚지는 느낌이라 마냥 좋지만은 않은데. 사회에 공짜란 없더라고.”
그는 현실감각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다. 프로듀서가 돌려받을 것을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고 느끼면서도 정말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아하하하, 당연히 그렇죠.”
“그런데 왜 안 말렸어?”
“그 빚을 갚는 과정이 결코 나쁘진 않을 테니까요.”
“…….”
프로듀서가 만약 무언가 요구한다면 그건 분명 금전이 아닌 음악적인 부분일 테지. 그건 우리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발전이나 도전이 될 수 있었다. 어떤 경우를 생각해 보더라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에르네스트는 내가 너무 확고하게 이야기하는 게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굉장히 믿고 있네.”
“신뢰할 만한 분이에요.”
“그래……?”
의뭉스럽게 말하고 있긴 하지만 이미 그도 마카로프라는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두 사람이 친해져도 분명 좋을 것이다. 난 그런 광경을 상상하며 미소 지었다.
그렇게 신디사이저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난 갑자기 잊고 있던 것이 떠올라서 가방을 뒤적였다.
“아, 맞아. 선물이 또 있어요.”
“……뭐?”
“여기요.”
내 가방 안엔 마지막에 마카로프가 준 시디 두 장이 있었다. 난 그중 하나를 에르네스트에게 건네주었다.
“오늘 했었던 협주곡 리허설 녹음이에요. 아까 프로듀서가 챙겨 주셨거든요.”
리허설을 굳이 수고스럽게 시디로 만들 이유는 없겠지만,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이것도 추억이고 시간이 흘러 다시 들어 보면 느낌이 다를 것이라면서 만들어 주었다. 난 그 느낌을 에르네스트도 같이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두 장을 받은 걸 테고.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오케스트라 파트를 연주했다는 건 까맣게 잊었는지 바보 같은 소리를 했다.
“이건 네 곡이잖아.”
“…….”
그걸 제가 지금 몰라서 가져가라고 하는 것 같나요?
정 싫다면 나도 상관없다. 두 장 모두 가져가야지.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다.
“필요 없으시나요?”
“필요 없단 건 아니고.”
에르네스트는 돌연 태도를 싹 바꾸더니 음반을 가지고 가서 자신의 서류가방 안에 넣었다. 정말 필요 없다고 했다면 화를 낼 뻔했는데 다행이었다.
오늘 연주한 음반을 나누어 갖고, 우린 잠시 말없이 서로 반대편 차창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들이 기록으로 분명히 남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어쩐지 지금은 환상처럼 다 휘날려 버릴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난 그런 기분에 휩쓸리지 않으려하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고마웠어요. 에르네스트.”
에르네스트는 조용히 날 보더니 장난스런 어투로 말했다.
“내가 할 말 뺏지 마.”
“……예?”
멀거니 되물어도 그는 낮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에르네스트의 집 앞에 차가 닿을 때까지 대화를 나누며 오늘의 만남을 마무리했다.
***
얼마나 연습에 매달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몇 시야 도대체?”
아나스타샤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연습실에 있던 시계는 치워 버린 지 오래였다. 그녀는 꺼진 스마트폰에 전원을 켰다.
시간을 확인하니 연습실에서 8시간 가까이 앉아 있었다. 물론 그사이 나가서 식사를 하기도 했지만 그것 말고는 온전히 연습에만 투자한 것이다.
스마트폰을 켜니 점심 후로 온 메시지들이 있었다. 집에 언제 오냐는 일리야의 메시지부터 발렌티나의 것까지. 아나스타샤는 웃으며 먼저 일리야에게 답장했다.
[갈 때 되면 갈 테니 신경 꺼.]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간 악우처럼 지낸 남매 사이에 고운 말이 나오긴 힘들었다.
당연히 일리야의 반응도 비슷했다.
[연습실 가 있는 건 맞긴 하냐?]
“…….”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초래한 메시지라는 걸 알면서도 약간 화가 나는 걸 느꼈다. 지금 여기가 연습실이 아니면 뭔데?
그녀는 인상을 잔뜩 쓰면서 피아노를 뒤로 하고 셀피를 찍어 보냈다. 마음 같아선 가운뎃손가락이라도 세우고 싶었지만 그걸 일리야가 그대로 어머니에게 보여 준다면 혼나는 건 아나스타샤였기에 꾹 눌러 참았다. 어떻게 그걸 아냐면, 이미 당해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발렌티나였다. 그녀는 아나스타샤와 함께 쇼팽 콩쿠르에 나가기로 한 후로는 종종 이렇게 상의를 해 오곤 했다. 경쟁은 무대에 올라서 하는 거고 아직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라는 것 같다.
하지만 신청서에 보낼 사진을 여름인 지금 찍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물으면 뭐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수영장에 가서 찍기라도 하려고?]
[대회 프로필을 누가 그렇게 찍니!? 너 바보야 진짜!?]
“……누가 누구더러 바보래?”
쇼팽 콩쿠르 신청서엔 여러 서류와 사진, DVD가 들어가야 했다.
서류야 어려울 것 딱히 없었다. 자기소개, 생년월일을 증명하는 공식 문서, 음악학 증명서 및 주요 대회 수상 이력 증명서, 지난 3년간의 예술 활동 증명서, 교육자나 후원자의 추천서 등인데 하나하나 준비하면 된다.
짧은 자기소개를 직접 써야 한다는 건 약간 막막하긴 했지만 A4용지 절반 정도면 되니 그리 어렵지 않다.
그리고 사진 3장은 나중에 친구들과 함께 찍을 예정이었다. 사진관에 가서 대회 프로필로 쓸 사진이라고 하면 된다. 계절까지 따져가면서 복잡하게 준비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DVD가 남아 있었다.
“…….”
예선으로 보낼 DVD 안에는 대회 첫 스테이지에 올릴 레퍼토리 4곡을 녹화하면 된다. 속도나 음량을 편집하지 않고 손이 보이도록. 몇 번 해 봤기 때문에 익숙하다.
문제는 레퍼토리인데 쇼팽의 에튀드와 녹턴, 발라드, 뱃노래, 스케르초, 환상곡 등에서 특별히 추려낸 36곡 중에서 골라야 한다.
이 곡들은 DVD로도 녹화하고 폴란드 바르샤바에 가게 되면 첫 스테이지 무대에 올라 그대로 연주해야 하는 곡들이다. 때문에 이 선택으로 모든 것이 갈릴 수도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다시 한번 36곡의 목록을 확인하고 하나하나 짚고, 다시 생각나는 것들을 연주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들어도 혼자 하는 것이다 보니 마음에 드는 곡이 있긴 해도 어느 몇 곡이 탁월하다고 바로 꼽을 수 없었다. 녹화하면 또 어떻게 들릴지도 확실치 않고.
스마트폰으로 녹화해서 들어 본다 한들 음질이 너무 나빠서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 학교의 녹화시설도 연습을 이유로 사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고.
조금 고민하던 아나스타샤는 학교 밖의 스튜디오로 눈을 돌려보기로 했다. 연주를 녹음해 볼 수 있게 해 주고, 가능하다면 조언도 조금 해 줄 수 있는 곳. 마침 딱 한 곳이 떠올랐다. 아나스타샤는 스마트폰 화면을 눌러 전화를 걸었다.
“아, 마카로프. 안녕하세요.”
그녀의 인사에 마카로프도 반갑게 인사해 왔다.
- 하하, 이게 어쩐 일인지. 잘 지냈습니까? 아나스타샤.
“예, 마카로프는요?”
- 저도 요즘 찾는 분들이 많아 즐겁군요.
한창 바쁜 것 같은데 그래도 전화할 시간은 있는 것같이 느껴진다. 마카로프가 웃으며 물었다.
- 절 찾으실 일이라도?
“아…… 그게 녹화를 할 수 있을까 해서요.”
- 녹음이 아니라 녹화? 아, DVD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역시 경력이 오래된 프로듀서다웠다.
아나스타샤는 일단 리허설부터 부탁하려 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마카로프의 말이 먼저 신경 쓰였다.
- 타티아나도 얼마 전 DVD 건으로 왔다 갔었습니다. 아직 시간이 꽤 있는 걸로 아는데 일찍 준비하시는군요.
“타티아나가요?”
- 예. 이번엔 에르네스트와 함께 왔었죠. 처음 봤는데, 듣던 대로더군요.
타티아나가 스튜디오에 갔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한참 전부터 마카로프와 친분이 있었으므로.
그런데 에르네스트를 데리고 갔다는 건 약간 의아했다.
두 사람이 계속 친밀해지고 있다는 건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승부에 대해선 냉정하고 철두철미한 두 사람이 콩쿠르 DVD를 같이 준비한다는 건 쉬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아나스타샤가 확인하듯 물었다.
“두 사람이 같이 녹화했나요?”
- 아뇨.
마카로프는 다시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 타티아나는 리허설을 녹음 한 후 상의만 했고 에르네스트는 아예 다른 용건이었습니다. 작곡 대회에 출품할 곡의 음원을 시퀀서sequencer로 만들고자 하더군요. 전 그 분야에서 나름 밥 먹고 살 정도는 되니 도와줄 수 있었고요.
“아…….”
아나스타샤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작곡 프로그램을 다루는 걸 가르쳐 줄 사람을 찾고 있었고, 타티아나가 마카로프를 소개해 준 것 같았다.
그 모든 것을 바로 이해하면서도 아나스타샤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그럼 그 애들이 각자 연주는 하고 갔겠네요. 어떻게 생각해요? 마카로프.”
누가 봐도 두 사람은 더할 나위 없는 천재들이다.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 대단함은 더더욱 두드러진다. 마카로프는 어떻게 봤을까. 아나스타샤는 그 대답이 한 번쯤은 듣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