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2화
종종 제3자의 시선이나 관점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을 입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경 안 써. 상관없어.
그 말을 누가 듣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입을 통해 세상에 나온 말들은 도로 귀로 들어와 생각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말의 힘이란 그런 식으로 사람을 무장시켜 준다.
아나스타샤는 쿨해지고 싶었다. 신경 쓰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입 밖으로 나온 건 두 친구들을 굉장히 신경 쓰는 말이었다.
이젠 너무 많이 와 버렸다.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없고 상관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어느 정도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매듭을 지을 때가 오리라는 것도.
그 전에, 두 사람이 스튜디오에서 무엇을 했는지 또 마카로프는 그 광경을 어떻게 보았을지 듣고 싶었다.
그녀는 이 관심을 단순히 흥미나 질투의 발로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건 일종의 확인이었다.
-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전화 너머의 마카로프는 그대로 되묻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나스타샤는 스마트폰을 붙잡고 조용히 기다렸다. 지금 마카로프가 떠올리고 있을 생각을 그대로 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마카로프는 그녀의 생각을 뛰어넘어 거꾸로 물었다.
- 혹시 같은 대회라 신경 쓰입니까? 아나스타샤.
“그건…….”
아나스타샤는 말을 흐렸다.
마카로프는 아나스타샤의 질문을 콩쿠르 참가자의 입장에서 나온 경쟁심리라 보는 듯했다. 그리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기도 했다.
제3자의 눈으론 이렇게 보이겠구나. 아나스타샤는 서서히 머리가 식는 것을 느꼈다.
가볍게 그녀가 다시 말했다.
“약간요.”
- 그럴 만도 하죠. 두 사람은 대단하다는 말로 간단히 표현하기도 어려울 정도이니 말이죠. 오늘 여러 번 놀랐습니다. 정말.
“그래요?”
- 하지만 너무 걱정하진 마시죠.
“걱정이요?”
그녀가 되묻자 마카로프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 전 아나스타샤의 음악도 들어 보지 않았습니까? 그 실력은 충분히 세계에 먹힐 만한 실력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음악에 집중하시면 될 겁니다.
“…….”
- 제 귀를 믿으시죠.
아나스타샤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는 충족되는 부분이 있었다.
마카로프는 넉살 좋게 말하고 있지만 마냥 던지고 보는 립서비스를 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식견이나 감식안에 대해 상당한 프라이드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어느 정도는 평가라 받아들여도 되는 말이었다.
그에게도 입장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두 사람에 견주어서 어느 정도라고 정확하게 말하고 있진 않았지만, 그래도 최소한 발치 근처에 따라왔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
아직 몇 개월 더 남았다. 타티아나는 퀸 엘리자베스에서 분명 좋은 성적을 거두겠지. 따라서 아나스타샤가 신경 쓸 것은 쇼팽 콩쿠르에 올 다른 경쟁자들뿐이었다. 거기엔 분명 에르네스트도 있을 테고.
지금 당장은 속주 말곤 자신이 없다. 하지만 몇 개월이 더 남아 있었다. 그사이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쇼팽을 훨씬 더 확고하고 예리하게 가다듬어 선보일 생각이었다.
그사이 에르네스트는 콩쿠르를 두 개 동시에 참가하면서 작곡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그 애가 아무리 천재라곤 하지만 그래도 그 정도로 여러 가지를 한다면 아무래도 빈틈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나스타샤는 그 빈틈을 찌르는 것이 다른 누가 아닌 자신이 되기를 바랐다.
진짜 천재성의 증명일지 만용일지 그건 내년 즈음 드러나겠지.
- 그래서, 언제쯤 오실 예정이십니까?
“예?”
홀로 생각에 잠겨 있던 아나스타샤는 깜짝 놀라 말했다. 마카로프에게 전화를 왜 걸었었더라?
마카로프는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 준비하신 곡들을 녹화해 보고 싶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적당한 때를 골라 보시죠.
“어…… 제가 맞출게요.”
- 흠, 그렇다면 모레 쯤 어떻습니까?
“좋아요.”
어차피 방학이라 음악에 쓸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게 마카로프와 약속을 정한 아나스타샤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검은 피아노만이 그녀의 앞에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괜히 손을 들어 건반을 한 번 눌러 보았다. 타티아나가 이렇게 연습하는 걸 본 뒤로 아나스타샤는 종종 자신의 터치 감각과 음색을 이런 식으로 확인해 보곤 했다.
처음엔 대체 무슨 연습인지 감도 잡을 수 없었지만 하다 보니까 기존엔 몰랐던 아주 미세한 감각들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건 그녀가 보다 곡을 세심하게 다루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되어주었다.
이렇게 여러 준비를 마친 곡을 가지고 가서 녹화를 해 보고, 가능하다면 여러 피드백을 받아 보고 가장 좋은 곡으로 자신 있게 쇼팽 콩쿠르에 나갈 생각이다.
에르네스트나 발렌티나도 각자 쇼팽을 준비해 오겠지. 벌써부터 신경이 쓰이고 온갖 생각이 다 든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입을 열어 말했다.
“신경 안 써.”
일부러 말한 그 말은 그대로 그녀의 귀로 돌아와 어지럽던 머릿속을 꽉 눌러 붙잡아 주었다.
***
에우테르페 레코즈의 스튜디오를 찾은 아나스타샤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우뚝 멈춰 섰다.
“…….”
마카로프와 무언가 이야기를 하던 한 남자가 이쪽을 돌아본다. 스튜디오의 어두운 조명 탓일까, 1초 정도 누구인지 못 알아봤다.
하지만 그 얼굴에 떠오르는 감정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당혹과 반가움 등. 그런 감정들을 읽을 수 있는 건 두 사람이 오랜 친구이기 때문이리라.
에르네스트와 눈을 마주한 아나스타샤가 이윽고 상황을 파악했을 때, 마카로프가 인사를 건네왔다.
“오셨습니까? 아나스타샤.”
“안녕하세요.”
조금 놀라긴 했지만 괜찮았다. 에르네스트가 엊그제 왔다 갔다는 사실은 미리 듣기도 했고, 그렇다면 오늘 올 수도 있었겠지. 그리 이상한 건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유연하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너도 안녕, 에르네스트.”
“안녕. 오랜만이네 뭔가.”
실제로 마지막으로 본 건 이주일쯤 전이니 오랜만이라 해도 이상한 건 아닌 걸까? 오랜만의 기준을 어디다 두어야 할까 생각하던 아나스타샤는 그냥 간단히 정리했다.
“방학이니까.”
“그렇긴 하지.”
“여긴 어쩐 일이야?”
“요즘 프로듀서에게 작곡 프로그램을 배우고 있어서.”
아, 그거 한다고 했었지.
콩쿠르를 두 개나 준비하면 미친 듯이 피아노에만 몰두해도 어떨지 모르겠는데 넌 그런 건 쉽다는 것처럼 작곡도 하고 있지.
아나스타샤는 그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꽤 있었지만 모두 꾹 눌러버리면서 말했다.
“그러니?”
“넌?”
“나?”
“그래. 오늘 어쩐 일인데?”
한 작곡가의 곡들만을 다루는 콩쿠르에 올릴 곡들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아나스타샤는 머리가 복잡해서 도움을 구하러 왔다. 괜히 그 사실을 그대로 말해 주기 싫었다.
하지만 스튜디오에서 두 사람이 우연히 마주한 것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건 아나스타샤가 아니라 마카로프였다.
“미안합니다. 원래 있었던 일정입니다. 아나스타샤 양의 DVD녹화 리허설이 예정되어 있었거든요.”
“제가 갑자기 찾아오지 말 걸 그랬군요.”
“아뇨, 일찍 오셨길래 한두 시간 정도는 봐 드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죠. 그러다 보니 이렇게 시간이 겹쳤고.”
이 스튜디오의 오늘 오후 일정은 아나스타샤에게 있었던 게 맞았다. 다만 그 전에 잠시 찾아온 에르네스트를 가르치다 보니 시간이 길어져서 이렇게 마주하게 된 것이다.
마카로프는 상황을 설명하고는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교습은 여기까지 할까요.”
“알겠습니다.”
학교에서 레슨을 받을 때도 종종 그 전 타임의 학생과 이렇게 마주할 때가 있었다. 정해진 스케줄대로 하면 되니까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도 이해했는지 지체 없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럼 지금부턴 아나스타샤 네 시간이네. 난 가 볼게.”
“……바로 가?”
“그럼 가지 뭐 해? 여기서 네 연주 구경할까?”
부스에 들어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이 에르네스트가 그 모습을 고스란히 바라본다? 이전 같았으면 별 상관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꺼려진다. 아나스타샤는 그에게 보여선 안 될 곡들을 몇 곡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에르네스트가 없는 편이 좋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가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바로 가 버린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복잡한 심경으로 잠시 생각해 보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대체 어떤 마음인지 스스로도 잘 모를 지경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스스로에게 살짝 짜증이 나서, 짧게 대답했다.
“싫어.”
“그러니까 갈게.”
“…….”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에르네스트가 웃더니 한 걸음 더 나섰다. 이대로 아나스타샤와 스쳐 지나가서 스튜디오를 나가면 된다는 것 같다.
그런데 그 뒤를 마카로프가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에르네스트.”
에르네스트가 멈춰 서자 마카로프는 두 16살을 바라보며 제안했다.
“어차피 아나스타샤는 연주를 할 예정이니 잠시 더 배우고 가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이에요?”
“한 악기에서 나오는 다중 소스 믹싱은 실제 연주가 있는 사이 실시간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는 게 가장 빨라서요.”
“…….”
아나스타샤는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녹음되어 있는 음악이 아니라 즉석에서 연주되는 생음악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엔 지금 상황이 적절하다는 걸 단어와 뉘앙스만으로 알아들었다.
두 사람이 이곳 컨트롤룸에서 프로그램 교습을 해야 한다면 연주자가 따로 필요하다는 건 납득할 만한 이유였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잠시 멈칫하더니 아나스타샤를 보지 않고 마카로프에게 말했다.
“저 애는 그리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왜 그렇죠?”
“그야…… 우리가 쇼팽 콩쿠르에서 만날 수도 있으니 말이죠.”
그 또한 납득할 만한 이유였다. 아나스타샤는 정말 그 이유로 에르네스트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싶지 않기도 했고.
하지만 그 이유가 조금 유치하다는 생각 정도는 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카로프가 다시 물어왔을 때 아나스타샤는 소극적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아나스타샤.”
“약간요.”
“하하하.”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 마카로프는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전까지 하던 음악가를 보는 눈이 아니라, 한참이나 어린 학생들을 보는 눈빛이다.
물론 거기에 낮잡아보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되레 약간 흐뭇해하는 것 같이 보일 정도였다.
아나스타샤가 의아한 얼굴을 기울이자 마카로프가 이야기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쇼팽 콩쿠르에 두 사람만 출전합니까? 세상 수많은 천재들이 그 자리에 나올 테고, 내년에 열일곱 살일 두 분은 그 틈에서 서로를 보고 있을 틈이 없을 텐데요.”
“…….”
“지금 서로 돕는 게 좋을 겁니다. 각자 최고의 연주를 할 수 있도록.”
순간 아나스타샤는 지금 자신 안에 오만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당연히 다른 참가자들이 많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계속 에르네스트만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3자의 눈으로 본다면 두 사람이 서로를 의식하는 건 그저 우스운 일이었다. 둘 다 예선에서 떨어져 버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곳이 바로 쇼팽 콩쿠르인 까닭이다.
마카로프의 말은 어느 하나 틀린 것이 없었다. 조금 냉정해진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리곤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진 알겠는데, 에르네스트가 음악 프로그램 다루는 걸 도와주는 게 내년 콩쿠르랑 상관이 있나요?”
“이렇게 익힌 것들이 피아노에 반영되지 않으리라 생각하신다면 큰 오해입니다.”
그 또한 아나스타샤가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는 모르는 것에 대해선 말하지 않기로 하고, 보다 분명한 것을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럼 전 뭘 얻어 갈 수 있는데요?”
“저뿐만 아니라 에르네스트도 아나스타샤가 준비한 곡에 대한 피드백을 해 줄 수 있겠죠.”
마카로프로선 그게 상당히 큰 도움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분명 누군가에게 그리해 주는 걸 직접 본 것 같은 말투였다. 아나스타샤는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그 대상이 타티아나라는 것을 직감했다.
에르네스트의 음악성은 두말할 것 없이 뛰어나니 분명 도움이 조금이라도 되겠지.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지금은 그런 걸 필요로 하지 않았다.
“피드백 같은 건 필요 없어요. 그냥…… 신경 안 쓸 테니까 마음대로 해요 그러면.”
이제 와서 싫다고 하기엔 너무 늦었다. 이런 상황들을 계속 회피하려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고.
에르네스트가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을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직 친구로서 예의를 지켜주고 있으니까. 아나스타샤도 동등하게 대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을 정한 아나스타샤가 말하자 에르네스트가 다시 한 번 물었다.
“괜찮은 거지? 아나스타샤.”
“그냥 피아노 치는 건데 뭘? 아무거나 칠 거야.”
“……그래.”
“대신 너무 이것저것 다 할 생각은 하지 마.”
“무슨 소리야?”
“듣기만 하라고. 내 음악을 네 마음대로 고치지 말고.”
혹시나 프로그램으로 변조나 합성 같은 것도 할까 싶어서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말했다.
“그럴 생각 없어.”
평소 같았으면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을 에르네스트는 어쩐지 힘없는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 목소리는 생각치도 못할 정도로 상냥해서, 아나스타샤는 어떤 말도 더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