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3화
메인 컨트롤룸의 정면 유리 너머엔 싱글 부스가 위치해 있었다. 독주 악기 녹음을 위해 만들어진 완벽한 공간은 악기 하나와 연주자가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들을 붙잡아 기록한다. 악기의 음악은 물론이고 연주자의 영혼까지도.
에르네스트는 조용히 아나스타샤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자리를 정돈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움직이는 모든 소리가 벌써 화면에 시각화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마이크 세 개가 아나스타샤 양의 음악을 잡아낼 겁니다.”
피아니스트가 아닌 입장에서 이렇게 친구를 보니 기분이 묘하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멍하니 있지 않고 자신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이유를 분명히 떠올려냈다.
“그렇게 입체적으로 잡힌 음악을 합치겠군요. 요령을 알게 되면 가상음원에도 쓸 수 있을 것 같고요.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하하, 이미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데요.”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믹싱 노하우와 프로그램에 대해선 이미 어느 정도 배우긴 했지만, 확실히 이런 건 연주자가 직접 하는 걸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다.
연주가 시작되기 전 마카로프는 화면을 짚어 주면서 에르네스트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빠르게 가르쳐 주었다. 연주자에 움직임에 따라 미세하게 움직이는 모든 그래프들을 관찰하면서 에르네스트는 보다 집중했다.
잠시 후, 아나스타샤가 준비되었다는 신호를 보내왔고 마카로프가 시작해도 좋다는 사인을 보냈다.
아나스타샤의 작은 한숨이 마이크에 잡히고, 그 끝이 미처 사라지기 전에 피아노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그래프가 흔들거렸다.
E메이저의 우아한 노랫소리. 쇼팽 특유의 프랑스 스타일 에센스가 가득 느껴지는 프레이즈가 길게 이어져 나간다.
‘스케르초 4번…….’
쇼팽이 작곡한 4개의 스케르초 중 4번째 곡. 너무나 유명하고 자주 연주되는 곡이다. 당연히 쇼팽의 곡들만 연주할 수 있는 쇼팽 콩쿠르에선 연주자들의 주요 레퍼토리이기도 했다.
흔한 곡이지만 그만큼 다양한 음악성을 가지고 있는 이 곡을, 아나스타샤는 유연하고 수려하게 연주해 나가고 있었다.
“…….”
긴 문장을 조리 있게 말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긴 음악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스케르초 4번이 바로 그러한 곡이었다. 템포 지시는 프레스토presto로 굉장히 빠르면서 정작 곡 자체는 느긋하기 짝이 없이 길게 늘어지고, 모든 음들을 크게 울리게 연주하면서 동시에 또렷하게 선율을 이룰 줄 알아야 한다.
제대로 이 이야기를 이해조차 하지 못한 연주자가 연주한다면 처음엔 빠져들다가도 나중엔 무슨 이야기인지 파악이 되지 않고 이미지가 흐려져 버리기 일쑤이다. 그런 연주는 나중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해 주려면 그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루하거나 어색하지 않게 풀어나갈 수 있는 화술 역시 필요한 기술이다.
아나스타샤는 그 모든 것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쇼팽에 대한 연구와 고찰에서 나오는 머뭇거리지 않는 터치. 그녀만의 목소리라 할 수 있는 음색과 박자. 그 모든 연주의 기반이 되는 레가토 관리 기술이나 루바토 처리.
그녀가 이 음악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진 한 소절만 들어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쇼팽 콩쿠르에 출전하기 위한 자격 증명. 아나스타샤의 연주는 그것을 확실하게 드러냈다. 이 연주는 콩쿠르에 집중하고 있다는 의사 표현 외의 무엇도 아니었다.
“…….”
하지만 정말 그런 냉정한 연주를 하려 했다면 선곡을 스케르초가 아닌 에튀드로 했어야 했다. 콩쿠르를 위해 준비한 곡이지만 이 스케르초는 연주하는 것만으로 너무나 많은 정보를 담아내고 있었다.
평소 그녀를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라면 모를지 몰라도, 아나스타샤의 음악을 오래 전부터 들어온 에르네스트는 그 미세한 감정의 전달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장조의 곡으로 어두운 감정들을 묻어 버리려 하더라도 피아노 소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루바토로부터 아나스타샤가 스스로 느끼는 답답함이 표현되고, 그런 자각에 대한 반발로 나오는 도발적인 태도가 솟아오르는 스케일에서 터져 나온다. 자기방어적인 화려함. 이중성과 혼란. 흔들림과 불안까지.
물론 모든 것들은 전부 스케르초 4번의 음악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편린들일 뿐이니, 이 곡에 대한 몰입과 흉내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 점도 염두에 두면서 그녀의 음악을 들여다보았다.
‘천천히…….’
아나스타샤가 살짝 흘린 음악이 데굴데굴 구르며 발치까지 와선 톡 닿는다.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니 그 음악은 무릎 근처까지 뛰어올랐다가 향기와 함께 사라졌다.
모든 음악은 그녀의 손아귀에서 관리되고 있었지만 몇몇 소리들이 새어 나와 그렇게 에르네스트에게 닿았다. 그는 이런 소리들이 그를 떠보기도 하고, 붙잡아두기도 한다는 것을 느꼈다.
일단 싫어하는 것 같진 않다. 그것만으로도 에르네스트는 어느 정도 안도했다. 그저 적대감이나 공격성만을 표출했다면 그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겠지만, 아나스타샤는 적어도 한 번쯤은 대화를 할 생각이 있어 보였다.
한 번에 이해하긴 힘들겠지만 대화를 하려고 한다는 것은 그것을 이어나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거기까지 확인한 에르네스트는 약간 긴장을 풀어놓으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의 음악이 실시간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는 걸 본 마카로프는 입을 열지 않고 마우스를 움직여 프로그램을 이리저리 조작했다. 에르네스트는 설명 없이 보는 것만으로 그의 가르침을 습득해냈다.
10여분 정도 이어진 연주와 교습으로 에르네스트는 상상 이상으로 많은 것들을 알아갈 수 있었다.
“좋았습니다.”
연주를 마친 아나스타샤를 향해 마카로프가 말했다. 그녀는 잠시 말없이 건반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그 눈빛이 에르네스트에게 와닿는다.
괜히 상황에 휩쓸려서 연주한 것 같다는 후회, 그럼에도 연주자로서의 입장을 저버리지 않고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해낸 것에 대한 후련함. 약간의 기대. 그런 것들을 느낀 에르네스트는 미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 후 아나스타샤가 컨트롤룸으로 돌아왔다.
“훌륭한 연주였어. 아나스타샤.”
“……고마워.”
솔직한 칭찬에 아나스타샤가 조용히 답했다. 주저하던 그녀가 이어 물었다.
“네 교습에 도움은 되었니?”
“충분히.”
“그랬다면…… 다행이네.”
무언가 묻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아 보이면서 동시에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음악이 아닌 목소리에선 느껴지는 것들이 부족했지만, 아나스타샤가 조금 있으면 어떻게 나올지 에르네스트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이쯤하면 되었을 테니 이만 가 보라고 할 것이 뻔했다. 그 전에 그는 선수를 쳤다.
“그럼 다른 곡들도 연주해 볼래.”
“……응?”
“예선 DVD 피드백해 주기로 했잖아. 다른 것도 들어 봐야 4곡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내 추천을 말해 줄 수 있지.”
“그게 좋겠군요.”
마카로프도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아나스타샤는 약간 당황한 듯 눈을 깜빡거렸다. 정말로 더 듣겠다고? 그렇게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당연히 더 듣고말고. 에르네스트는 진지하게 말했다.
“걱정 마. 철저하게 할 테니까.”
“철저? 웃겨 정말.”
아나스타샤는 어이없다는 듯 말하더니 곧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부스 안으로 들어섰다.
처음 마카로프가 그녀의 연주를 교습용 데이터로 활용해도 되겠느냐 제안했을 땐 난색을 표했지만, 에르네스트가 연주한 곡에 대해 진지하게 들어주고 정말 친구이자 연주자 동료로서 응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 듯했다. 에르네스트는 그 믿음을 배신하지 않기로 했다.
“…….”
그 뒤로 1시간 정도 연주가 이어졌다.
에르네스트는 그녀의 음악 속에서 다른 감정을 캐내려 하는 대신 쇼팽 콩쿠르 심사위원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객관적으로 들으려 했다.
그런 입장에서 들어 본 아나스타샤의 쇼팽 레퍼토리는 콩쿠르를 위해 상당히 준비를 많이 한 흔적이 많이 느껴졌다.
연주회에서 선보일 곡들이라면 피아니스트 본연의 음악성을 잔뜩 드러내기만 해도 된다. 하지만 비교가 필요하지 않은 개성만으론 콩쿠르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 타 피아니스트들에 비해 상대적 탁월함을 확실하게 어필할 수 있는 성실한 연주가 어느 정도 균형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아나스타샤는 본래 감각적인 부분이 뛰어나서 교과서적인 연주는 약간 뒤떨어지는 감이 없잖아 있는 피아니스트였는데, 지금 그녀의 쇼팽은 그야말로 균형을 잘 잡고 있었다. 이 곡이라면 누구에게나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에르네스트는 그 모두를 면밀하게 듣고 분석해 보았다.
이윽고 아나스타샤를 불러 테이블 맞은편에 앉힌 후, 에르네스트는 메모를 적어 놓은 노트를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환상곡은 좋았지만 이번엔 빼고, 녹턴을 이렇게 하는 건 어때?”
“…….”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이유들을 덧붙여가며 아나스타샤가 예선 DVD에 녹화할 4개의 곡을 고르기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이야기해 주었다.
그 어떤 감정적인 요소도 들어가지 않은 담백하고 진솔한 의견이었다. 물론 이것을 받아들일지 말진 그녀의 자유이지만, 한 사람의 의견으로서 가볍게 참고하는 것만으로도 가닥을 잡는 데에 도움이 될 터였다.
아나스타샤는 말없이 에르네스트의 이야기를 듣다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그렇게 에르네스트의 조언이 끝나고, 노트를 유심히 바라보던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에르네스트.”
“응.”
“왜 이렇게 진지하게 도와주려 하는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복합적인 의문을 머금고 있었다.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이 남자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는 의심이 느껴진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추측에 대해 그녀와 진솔한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물론 마카로프가 옆에 있으니 선을 지켜야만 했다.
“네가 예선에서 떨어지길 바라기라도 했으면 좋겠어?”
“…….”
그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아나스타샤도 확실히 느낄 터였다. 그녀가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제대로 말해 보란 표정을 지었다. 에르네스트가 웃으며 말했다.
“예전에 그랬었잖아.”
“예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최선을 다해 겨뤄 달라고.”
작년 여름, 타티아나의 집에 함께 놀러갔을 때 했었던 말이었다.
그날 밤 주고받았던 대화를 에르네스트는 똑똑히 기억한다. 그땐 전혀 몰랐지만 지금은 아나스타샤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에르네스트는 평생소원이 그녀를 시원하게 울려 보는 것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땐 친구로서 장난처럼 한 말이었지만, 지금은 그만큼 후회되는 일도 없었다.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입을 테이프로 막아 버리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이미 뱉은 실언을 주워 담을 순 없었고, 그렇다면 뱉은 맹세라도 충실하게 이행해야 했다.
“…….”
그날 밤과 달리 아나스타샤는 웃지 않았다. 보다 진지한 눈빛으로 에르네스트를 바라볼 뿐이었다.
모델 제안도 종종 받는 그녀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이렇게 가만히 보고 있자면 맹수와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피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녀에게 실례가 될 것이란 생각을 하며 똑바로 응시했다.
이윽고 아나스타샤의 눈에 맹렬함이 사라지고 미안함이 깃들었다. 그녀는 맹수 같은 게 아니라 사람이었다. 타티아나가 신이 아닌 사람인 것처럼.
아나스타샤가 노트를 탁 덮더니 에르네스트 쪽으로 밀어주며 말했다.
“고마워.”
“참고가 좀 되었어?”
“응.”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언가 다시 마음을 다잡은 듯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예선은 꼭 통과해야겠네. 그리고……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우리 서로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건 물음이 아니라 그녀가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어떠한 바람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직접 말하기엔 너무 창피하고 유치한, 그저 스스로에게 진솔한 바람.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것도 충분치 않다 여겼다. 그럼 원망하지 않고 거리를 두기라도 할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괜한 소리였니?”
“그래. 아까 프로듀서가 한 이야기 잊었어? 거긴 우리 둘만 있는 게 아니야.”
단둘이 마주하여 대결하는 공간이 아니라 세계 각지의 피아니스트들이 몰려드는 쇼팽 콩쿠르다. 어떤 결과든 나올 수 있고 어떤 감정을 가지더라도 정확하게 어느 한 참가자에게만 향할 수가 없는 큰 무대.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를 최선을 다해 상대할 무대가 그렇게 크다는 것에 모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건 아나스타샤 역시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