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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666화 (666/1,277)

##  666화

아나스타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말도 안 돼. 그게 왜 들어가!?”

“잘 안 보였나 보네. 안경 쓸래? 아나스타샤.”

“……그 퍽이나 이쪽으로 보내 줄래?”

약이 오른 목소리로 그녀는 다시 자세를 잡고 테이블 앞에 선다.

두 사람이 하고 있는 건 에어하키였다.

동그란 채를 각자 손에 쥐고 납작한 퍽을 쳐서 상대편에 있는 구멍에 넣으면 득점하는 게임으로, 어느 오락실에 가더라도 볼 수 있는 대중적인 게임이었다. 딱히 복잡한 규칙도 없고 그냥 직관적으로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이런 직관적으로 운동신경을 필요로 하는 게임은 아나스타샤의 전문이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도 운동신경이 굉장히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아나스타샤와 막상막하로 대결할 수 있었지만, 아나스타샤가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자 조금씩 스코어가 밀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반응속도가 빠른 것 정도가 아니라 아주 영리하게 점수를 내는 법을 알고 있었다.

게임이 종료에 다다랐을 때, 이긴 건 아나스타샤였다. 그녀는 허리를 쭉 펴며 환하게 웃었다.

“게임 끝!”

“장난 아니네…….”

점수 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했는데도 진 건 진 것이었다. 통상 몇 번째 패배인지도 잘 모르겠다. 에르네스트는 목을 까딱이며 에어하키 채를 옆으로 툭 던져놓았다.

아나스타샤가 의기양양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

“내가 이겼지?”

“그래, 그래.”

“음료수 사 와. 난 콜라.”

“뭐야, 콜라 끊었다며. 다시 마시기로 했어?”

저번에 사샤가 콜라를 마시게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의리로 아나스타샤는 자신도 콜라를 마시지 않겠다고 선언하고는 그걸 정말 지켜나가고 있다고 했었다. 사샤가 확인하진 않을 테니 마음대로 해도 될 텐데, 이참에 참아 볼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오늘만큼은 괜찮지 않냐는 듯 웃었다.

“적어도 지금 내겐 콜라를 입에 댈 자격이 있어. 그렇지 않니?”

“……마음대로 해라.”

이래라저래라 할 생각도 별로 없고, 그런다고 해서 아나스타샤가 말을 들을 사람도 아니다. 에르네스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오락실 옆에 있는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두 개 뽑았다.

그리고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오니 아나스타샤는 이미 없었다. 그녀 성격에 가만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나스타샤는 구석에 있는 크레인 머신 앞에서 그 안을 구경 중이었다.

“뭐 해?”

“여기 경품 봐 봐. 뽑을 수 있는 걸까?”

아나스타샤는 콜라를 받으며 크레인 머신 안을 가리켰다. 그 안엔 이것저것 경품들이 들어있었다. 작은 인형부터 커다란 상자까지. 정체 모를 물건들도 많았고, 아예 무거운 추에다가 경품 이름만 적어 놓기도 했다. 당연히 뽑기 힘든 만큼 값비싼 경품들이었다.

“오토바이도 주나 본데?”

“……그걸 주겠냐? 못 뽑게 해놨겠지.”

“만약 준다면? 타보고 싶지 않아?”

“글쎄.”

몸이 곧 전부나 다름없는 악기 연주자들이 자동차와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위험한 오토바이를 타는 건 교칙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지만, 선생들 모르게 스쿠터 정도는 타고 다니는 학생들이 다른 과에는 있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솔직히 약간 흥미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강한 자제력이 그를 붙잡아 놓았다.

얼마 전 예카테리나와 나누었던 대화가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예카테리나는 에르네스트에게 혹시 위험한 짓을 하고 다니진 않느냐고 물었었다. 그녀가 그런 질문을 한 건 바로 타티아나가 늘 그런 위험에 대한 불안증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요즘 들어 많이 밝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에르네스트는 절대로 타티아나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그 무엇이든 그녀를 불안하게 한다면 즉각 그만둘 생각이었다.

때문에 그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별로 생각 없어.”

“난 한 번 타 보고 싶은데.”

“위험해 그거.”

“세상에 안 위험한 게 어디 있니?”

“타티아나가 싫어할걸.”

“…….”

솔직히 아나스타샤가 이렇게 말할 줄은 몰라서 약간 힐난하듯 말했다. 무엇을 하든 아나스타샤의 자유이긴 하지만, 타티아나가 어떻게 생각할진 그녀 역시 잘 알 것이라 생각한 까닭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아차 싶었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스스로 생각이 짧았던 것에 대해 충분히 자각하는 표정이었다. 평소 말실수가 드문 그녀가 이렇게 충동적으로 말한 건 에르네스트로서도 약간 의아한 경우이긴 했다.

한동안 침묵하던 아나스타샤는 콜라를 한 모금 더 마시더니 크레인 머신으로부터 눈을 돌렸다. 약간의 후회와 자조 등이 그 눈빛에 섞여 있었다.

“너 그 애랑 이렇게 놀러 온 적 있니?”

갑자기 나온 질문에 에르네스트는 약간 당황했다.

타티아나와 친구로서 데이트한 적은 몇 번 있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딱 잘라 그렇다 아니다 이야기하기가 애매했다.

일단은 이곳에 한정해서 생각한다면 없었다. 타티아나는 게임에 그리 밝지 않았고 가정용 게임기도 잘 못 했다. 애초에 접해 본 경험 자체가 많지 않은 것 같았다. 당연히 오락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물어본 그대로 답했다.

“없어. 뭐…… 그 애는 이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그걸 어떻게 알아?”

“그건 나보다 네가 잘 알 것 아냐. 같이 자주 놀러 다니니까. 어떤데? 오락실 좋아해?”

“음…… 아니.”

아나스타샤는 잠시 과거 기억들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타티아나와 친해진 직후 한참이나 이곳저곳 데리고 다녔다는 건 에르네스트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타티아나는 취미라 할 만한 일을 찾지 못하고 오로지 피아노만 붙잡고 있기도 했다.

근래 들어선 요리에 취미를 붙여서 상당히 실력이 좋아진 것 같지만, 요리는 재미있어서 한다고 하더라도 놀이라 하기엔 분명 거리가 있었다.

놀이라는 한 카테고리만 딱 놓고 본다면 아직도 타티아나는 딱히 마땅한 취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 바라는 것 같지도 않고.

에르네스트는 그 이유라면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 애는 피아노를 놀이기구처럼 다루기도 하는 애니까. 다른 걸 좋아할 필요가 별로 없겠지.”

피아노는 음악을 신봉하는 그녀에게 있어 신성한 전례용구면서 동시에 좋은 장난감이기도 했다.

진지하게 음악에 임할 땐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악기 중 하나로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그게 아니라 쉴 땐 온갖 것들을 다채롭게 해낸다. 도저히 피아노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도 타티아나는 해내곤 했다.

에르네스트가 보기에 그것은 공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늘리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축구선수가 선수로 임할 땐 공을 정확하게 차는 것에 모든 집중력을 쏟아붓지만, 어떨 땐 빙글빙글 돌리며 놀기도 하는 것처럼.

어느 한 분야의 프로에겐 자신이 다루는 하나가 그야말로 전부이기도 한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역시 피아노와 음악에 미쳐 있었기에.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머리를 기울이더니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예전엔 그랬을지도. 그런데 지금은 나도 몰라. 그러니 물어봐.”

“뭐?”

“…….”

그동안 제일 많이 붙어 다녔으면서도 아나스타샤는 확신하진 못하겠단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에르네스트가 되묻자 그제야 시치미를 뚝 떼고는 다시 태연한 얼굴로 돌아갔다.

에르네스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예전엔 취미랄 게 딱히 없었는데 요즘은 무언가 생긴 건가?

물어보라는 건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라는 비아냥이 아니라 그녀도 정말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의 진심이 그렇게까지 삐딱하진 않다는 걸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일단 지금은 무슨 말이냐고 다시 물어봐도 절대 대답해 주지 않겠지. 에르네스트는 주고받은 이야기들을 기억하며 그녀에게 더 묻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나가는 출구 쪽을 일견하더니 말했다.

“슬슬 가자. 오래 놀았어 우리.”

“……그러네.”

“지하철에 사람 더 많아졌겠다. 윽…….”

“그러니까 집 근처에서 내리지 그랬어.”

“우리 집 가기 전에 네가 내리잖아.”

오늘 스튜디오에서 아나스타샤의 연주를 들으면서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대화를 할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건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아나스타샤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그를 뿌리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모르는 역에서 내려 모르는 오락실에, 그리고 모르는 게임 등을 하자고 했는지 약간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나스타샤가 나지막하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아무튼…… 오늘 재미있었어. 에르네스트.”

에르네스트는 진작 그녀와 이런 시간을 가졌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

저녁 연습을 마치고 난 뒤엔 공부를 하거나 독서를 하는 편이다. 요즘은 방학이라서 공부는 러시아어와 영어만 조금씩 하고 있었고 주로 책을 읽는 시간이었다.

지금 책상 위에 있는 책은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의 전집 중 한 권이었다. 읽고 있는 건 수록된 소설 중 하나인 스페이드의 여왕이었는데, 이전부터 한 번 읽어보려고 했던 소설이기도 했다.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 중에 이 소설을 두고 제작한 동명의 오페라가 있기 때문이었다.

“…….”

내용은 그리 어려울 게 없었지만 사실 카드놀이에 모든 것을 거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약간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나 역시 피아노에 목숨을 걸고 있는 사람이다 보니 이렇게 미친 듯이 몰두하는 건 은연중에 공감이 가기도 했다. 피아노 기술을 지금보다 더 향상시킬 수 있다면, 나라도 뭐든 하고야 말 테니까.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유령을 보는 건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한동안 소설을 읽던 나는 허리를 펴면서 시계를 보았다. 꽤나 시간이 흘러 있었다. 슬슬 자야 할 때였다.

책을 덮고, 별생각 없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오늘 친구들에게서 메시지가 하나도 안 왔다는 걸 깨달았다. 아나스타샤도 발렌티나도 각자 연습으로 바쁜 게 분명했다.

잠시 화면을 보다가, 아나스타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주무시나요? 아나스타샤.]

메시지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답장 대신 전화가 걸려왔다.

“깨어 계셨네요?”

- 응. 텔레비전 보고 있었어.

“그래요? 무언가 재미있는 프로라도 하나요?”

- 아니, 전혀.

“아하하, 그럼 주무셔야죠.”

- 그럴려고.

전화 너머로 들리던 미약한 잡음이 뚝 끊겼다. 아나스타샤가 텔레비전을 끈 것 같았다. 곧 잠자리에 들 건가 보다.

“오늘은 연습만 하신 건가요?”

- 응? 음…… 연습도 했지.

요즘 아나스타샤는 계속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하기에 오늘도 피곤한가 싶어 물어보았더니,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 에우테르페 레코즈 스튜디오에 갔다 왔거든.

“스튜디오에요?”

- DVD 어떻게 나오나 한번 보려고. 타티아나, 너도 엊그제 갔었다며?

“아, 그랬죠. 사실 제 일 때문은 아니었는데…….”

나도 그날 바로 아나스타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짧게나마 설명하려고 하자 아나스타샤가 먼저 말했다.

- 에르네스트 때문이었지?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들으셨나요?”

- 아니, 오늘 직접 만났었어.

“정말요?”

- 응.

살짝 놀라긴 했지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작곡 프로그램에 대해 배우기 위해 당분간 왔다 갔다 할 것 같았고, 그렇다면 볼일이 있어 찾은 아나스타샤와 마주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두 사람도 같이 음악을 연주하거나 했을까? 에르네스트가 내 연습을 도와주었던 것처럼 아나스타샤도 도와주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갑자기 불만이라는 듯 내게 말했다.

- 그 애는 콩쿠르 준비 언제 하나 몰라? 작곡만 한다고 하고.

“아하하…… 하고 있지 않을까요?”

- 그렇기야 하겠지만……

에르네스트는 너무 많은 걸 동시에 하고 있기도 하다. 난 그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을 진행 중이라 생각하곤 있지만, 그래도 약간 불안한 건 사실이기도 했다.

그래도 난 그를 믿기로 했으므로, 콩쿠르 관련하여 아나스타샤와 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나스타샤. 콩쿠르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대회 프로필은 언제 찍으실 예정이신가요?”

그 말을 듣자마자 아나스타샤는 막 생각났다는 듯 빠르게 말했다.

- 아, 그거 안 그래도 발렌티나가 이야기하더라. 어떻게 할 거냐면서.

“저도요.”

- 그래서 어떻게 할까?

“방학이 끝나기 전에 하면 되지 않을까요?”

- 그럴까?

그렇게 우리는 방학 동안에 또 만날 약속을 잡으며 밤늦게까지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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