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67화 (667/1,277)

##  667화

러시아 중부의 옴스크 주에 위치한 작은 도시.

그곳의 한 기악 연습실에선 오늘도 여러 악기들의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 옆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별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치다가도 피아노 소리엔 멈칫하며 잠시 귀를 기울이고 커튼이 쳐진 창문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몇 명은 모여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예카테리나 발레예브나가 저 연습실에 다닌다고 했지?”

“지금 연주 중인 사람일지도 모르지?”

“이 곡이? 듣고 보니 그렇게 들리기도 하네.”

“뭘 듣고 보니야? 네가 언제부터 클래식을 안다고?”

“하 참, 그게 꼭 알아야 들리나?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자의 피아노 소리를 어떻게 모르겠어?”

큼지막한 사건이 잘 없는 이 도시에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자가 나왔다는 건 그만큼 큰 소식이었다.

브류하노바가는 매일같이 축하하는 손님들로 북적였고, 예카테리나가 종종 가는 연습실은 소문이 나서 이 동네 사람들 중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무척이나 기뻐했다. 하지만 정작 예카테리나는 그저 기뻐하고만 있긴 어려웠다.

“…….”

누군가 들여다보는 일이 없도록 한낮에도 커튼을 쳐 놓은 연습실에서 예카테리나는 피아노를 연습하다가 잠시 멈추었다.

어려서부터 친했던 이 연습실의 주인이 그녀가 고향에 있는 동안은 아무 때나 와서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해 준 덕분에 감사히 쓰고 있긴 하지만, 집중이 잘 되는 건 아니었다.

피아노 소리가 멈추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연습실 문밖에서 인기척들이 들려온다. 머뭇거리는 그 소리들을 듣던 예카테리나가 직접 문을 열어 주자 몇 명의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예카테리나는 이 아이들의 용건을 알면서도 물어보았다.

“무슨 일이니?”

“저기…… 혹시 방해가 안 되신다면…….”

개중 한 남자아이가 어려운 말들을 어렵게 꺼내는 걸 보니 무척이나 조심스러워 보인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자를 방해한다면 큰일이라도 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예카테리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 아이가 용기를 더 내어 말했다.

“이 악보에 사인을 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저랑…… 여기 애들은 다 피아노를 배우려 하는데 예카테리나 발레예브나를 정말 존경하고 있거든요.”

“존경?”

“정말로요.”

고향에 돌아온 지 나흘. 예카테리나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정말 많은 축하와 박수를 받으면서 거기엔 감사의 말을 돌려주는 것으로 잘 대답할 수 있었다. 필요하다면 피아노 연주로 보답하는 것도 괜찮았다.

하지만 이렇게 어린 애들이 존경한다면서 우러러보는 것 같은 시선을 보내면 그냥 고맙다고 말할 수 없었다.

예카테리나는 상냥하게 웃으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사인 정도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는데, 아직 날 존경까지 하진 마. 세상엔 나 말고 존경할 사람들이 정말 많단다.”

“그, 그런가요?”

“응.”

아이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는지 얼떨떨해했다. 예카테리나는 길게 말하지 않고 악보들을 받아 사인을 해 주었다. 일단 목적을 달성한 아이들은 뛸 듯이 기뻐하더니 몇 번이나 감사를 표하며 연습실 복도를 달려 사라졌다.

그 뒤를 보던 예카테리나는 미소를 남기고는 다시 문을 닫고 연습실로 들어왔다.

“…….”

예카테리나는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었다. 피아니스트로서 인정받았다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부모님과 마을 사람들의 자랑거리가 되었다는 생각에 기쁘기도 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예카테리나는 이제 모든 것이 시작되었을 뿐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상을 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가 굉장히 크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당장 4년 후가 아니라 내년만 하더라도 쇼팽 콩쿠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처럼 그 세계적 권위가 쟁쟁한 콩쿠르들에서 수상자들이 나올 테고, 앞으로도 수십 년간 예카테리나는 세계에서 그 수상자들과 마주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음악과 실력에 만족하거나 정체되어선 절대 안 된다.

정말 이제야 시작이었다.

“…….”

콩쿠르에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예카테리나는 그저 입상만 하면 음악가로서의 증명이 무언가 끝날 것이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겸허하고 철이 든 생각을 지니게 된 것은 중앙음악학교의 친구들과 어울린 덕분이었다.

“그 애들은 뭐 하려나.”

어려서부터 예카테리나는 모스크바 음악원 영재 클래스에서 엘리트 피아니스트로 교육받았다. 때문에 그녀의 첫 번째 과제는 늘 콩쿠르였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우수함을 증명하기엔 콩쿠르 입상 경력을 만드는 게 확실하니까. 러시아의 음악가 육성은 효율적이고 체계적이다.

그러나 그 체계에서 벗어나 있는 음악가들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예카테리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지금은 그녀가 조금 더 위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 올 그때를 즐겁게 기다리면서, 그녀는 오늘도 연습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

한껏 집중해서 또 그렇게 연습 한 사이클을 마친 예카테리나는 잠시 숨을 돌리며 스마트폰을 들었다. 잠시 생각난 김에 친구에게 연락이나 해 볼까 생각이 드는 참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 친구에게 반가운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전화해도 되나요?]

이렇게 최선을 다해 배려하려고 하는 친구는 한 명뿐이었다. 예카테리나는 타티아나에게 당연히 해도 된다고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 예카테리나.

곧 걸려온 전화를 받은 예카테리나가 반갑게 인사했다.

“잘 지내니? 타티아나.”

- 예, 예카테리나는요?

“나도 뭐 그럭저럭.”

메시지는 종종 주고받았지만 전화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간만인 기분이었다. 예카테리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다음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타티아나는 괜히 이야기를 빙빙 돌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축하할 일이 있다면 너무나 솔직하게 축하한다고 말해 준다.

- 텔레비전 쇼에 나오셔서 연주하시는 걸 봤어요. 차이코프스키의 소품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몰라요.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진심이 전화 너머로도 충분히 전해져 왔다.

예카테리나는 저번 주에 한 방송녹화를 떠올렸다. 짤막한 인터뷰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냥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자니까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을 한 곡 연주해 달란 요청을 받고 6곡의 피아노 소품 중 5번째 곡, 카프리치오소capriccioso를 연주했을 뿐이다.

예카테리나는 고마움과 쑥스러움을 느끼며 그녀에게 물었다.

“고마워. 일부러 이야기 안 했었는데, 어떻게 알았어? 텔레비전도 잘 안 보면서.”

- 인터넷을 보니 바로 나오던걸요?

타티아나는 시사 공부라면서 인터넷 뉴스 같은 건 곧잘 챙겨 보곤 했다. 그녀가 이어 말했다.

- 여러 기자들이 다룰 만하죠. 연주도 좋았고…… 화면도 너무 예쁘게 잘 나오셨으니까요.

“칭찬 그만해…… 부끄럽잖아.”

- 더 할 거예요. 더 많이.

잘되었다는 듯 타티아나는 장난스럽게 웃더니 예카테리나를 열심히 치켜세웠다. 음악뿐만이 아니라 드레스가 얼마나 잘 어울렸는지, 인터뷰할 때의 모습이 얼마나 예뻤는지 등등 어느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없는 듯했다.

한참을 그렇게 타티아나의 칭찬 세례에 휩쓸리던 예카테리나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자신이 사과해야 할 일도 있음을 깨달았다.

“네 이야기도 잔뜩 하고 싶었는데…… 혹시나 폐가 갈까 봐 그렇게 하진 못했어. 그건 미안해.”

마음 같아선 타티아나의 이름을 거론하며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는지 공공연히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집에서 그런 걸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단 생각도 들어서 쉽게 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우려도 이해한다는 듯 타티아나가 말했다.

- 아니에요. 대신 친구들에게 감사한다 말씀해 주셨잖아요. 충분해요.

타티아나는 그녀의 이름 하나만을 부르는 것보다 친구들이라고 부른 것이 더 기쁜 듯했다. 예카테리나는 그녀가 친구들을 얼마나 아끼는 사람인지 새삼 생각했다.

다른 아이들과 연락은 더 드물지만, 궁금하긴 했다.

“다행이야. 다른 애들도 잘 지내지?”

- 예. 그렇죠.

“에르네스트는 어때?”

- 예?

예카테리나는 갑자기 나온 말이 실언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두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은 흥미가 아니라 걱정에 가까웠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물어본 것이었지만, 저번에 단둘이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타티아나가 얼마나 진지해졌는지 생각하면 이렇게 전화상으로 뜬금없이 물어볼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질문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은근하게 넘겨버리며 예카테리나에게 다시 물었다.

- 그는 왜…… 잘 지내요. 그보다 지금은 어디신가요? 모스크바?

“응? 아니, 옴스크에 와 있어.”

- 아, 본가에 가셨군요.

“방학인데 나도 좀 쉬어야 하지 않겠어?”

대답하면서도 예카테리나는 다른 생각만 하고 있었다.

타티아나가 말을 돌려 버린 게 약간 이전과는 느낌이 달랐다. 어딘가 조금 솔직하지 못한 느낌. 그렇다고 에르네스트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여러 생각에 약간 혼란스러움을 느끼던 예카테리나는 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으면 타티아나가 방어적으로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얼른 덧붙였다.

“물론 쉬긴커녕 오늘도 연습 중이지만.”

농담조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이미 그녀에겐 방학이 아무 의미도 없었다.

콩쿠르가 끝난 후로 계속 인터뷰나 취재 등에 응해야 했고 며칠 후엔 마을로 다큐멘터리 제작진도 찾아온다고 한다. 계약을 원하는 에이전시들에 답변도 교수님과 상의해서 보내야 하고, 10월부턴 수상자로서 세계 투어도 해야 한다. 앞으로도 할 일이 산더미였다.

타티아나는 안 봐도 알겠다는 듯 말했다.

- 세계 투어가 얼마 안 남으셨죠.

“잘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

- 분명 잘하실 거예요.

짧은 응원이었지만 예카테리나는 콩쿠르에서도 이 응원에 정말 많은 힘을 얻었다. 앞으로도 분명 그럴 것 같았다.

예카테리나의 일정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그녀는 다시 에르네스트 쪽의 이야기를 해야 하나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타티아나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네 쪽은 어때? 타티아나. 얼마 전 오케스트라와 리허설했던 것 후로도 계속 협주곡에 집중 중?”

- 협주곡 위주로 개인 연습 중이에요. 오케스트라와 한 번 정도 더 기회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는데…… 모르겠네요. 요즘은…… 아, 포토 스튜디오에 가기로 했어요.

“응? 아, 대회 프로필 찍으려고?”

- 예.

타티아나는 내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출전한다 했었다. 이젠 정말 슬슬 준비할 때였다. 그녀의 음악이 세계에 어떻게 보이게 될지 예카테리나는 벌써부터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 전에, 미리 사진 한 장 정도는 보고 싶었다.

“나한테도 보내 줄래?”

- 사진이요?

“응. 타티아나 넌 SNS를 전혀 안 하니까, 궁금하잖아? 넌 나를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는데 난 널 볼 수 없다는 건 치사하기도 하고.”

예카테리나 주변의 음악가들은 다들 SNS 계정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다. 그녀 역시 대회 프로필을 신청서에 넣어 보내기 전에 먼저 SNS에 올리기도 했었다. 요즘은 자기 어필의 시대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타티아나는 SNS를 일절 하지 않았다. 집이 엄해서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아쉬웠다.

- …….

타티아나는 잠시 생각에 잠겨 말이 없더니, 이윽고 약속했다.

- ……꼭 보내 드릴게요.

“왜 그렇게 진지하게 말해? 그냥 가볍게 생각해. 어차피 넌 원래부터 예쁘니까 잘 나올 거야.”

- 그, 그런 말씀 마세요.

“아까 자기는 실컷 마음대로 말했으면서?”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두 사람은 전화로 수다를 떨었다. 방송국에서 본 유명인 이야기나 유명 피아니스트 이야기, 콩쿠르 외에도 온갖 이야기가 오갔다.

거의 30분 넘게 전화를 하다 보니 또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예카테리나는 누군가 기다리는 건 둘째치고 이렇게 연습실에서 개인적인 전화를 길게 하는 건 매너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타티아나, 이만 끊어야겠어. 나 연습실이라서.”

- 아…… 또 통화해요. 예카테리나.

“응.”

아쉬운 마음으로 통화를 마친 예카테리나는 잠시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다가 사진첩을 열었다. 거기엔 타티아나, 그리고 다른 친구들과 함께 찍었던 사진이 저장되어 있었다.

“…….”

내년에도 다른 곳에서 같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하던 예카테리나는 가볍게 웃으며 스마트폰을 끄고, 연습실 문을 열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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