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68화 (668/1,277)

##  668화

약속 시간에 맞추어 아나스타샤의 집 앞에 도착했다.

두 친구는 나무 근처에서 서성이며 날 기다리고 있다가, 차 소리를 듣고는 반색하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난 창문을 열고 두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아나스타샤! 발렌티나!”

“왔니?”

“어서 타세요.”

뒷좌석의 자리를 비켜 주니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올라탔다. 더운 날이기도 하고, 오늘은 어차피 옷을 갈아입어야 하기도 해서 그런가 둘 다 가벼운 차림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오늘 대회 프로필을 찍기 위해 포토 스튜디오에 가는 건 우리 세 명이었다.

아나스타샤가 가볍게 감사를 표했다.

“매번 고마워.”

“별말씀을. 물론 빅토르가 고생해 주시긴 하지만요.”

앞을 보니 빅토르는 말없이 손짓만 휙 날리며 대답했다. 평소 내 친구들에게도 깍듯한 그였지만,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와는 오랫동안 봐 와서 그런가 가벼운 장난도 잘 주고받을 정도였다.

차가 출발하고, 우린 가볍게 담소를 나누었다. 발렌티나는 거울을 꺼내어 보더니 문득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물어보았다.

“타티아나, 오늘 나 어때? 괜찮아 보여?”

“물론이죠. 예뻐요, 발렌티나.”

“잠도 잘 안 와서 걱정이었는데, 괜찮나? 다행이네.”

싱글벙글 웃던 발렌티나는 거울을 도로 집어넣으며 이어 말했다.

“기대되더라. 나 솔직히 너희들이랑 이렇게 프로필 찍으러 가는 것도 늘 해 보고 싶었거든.”

지금까지 우린 콩쿠르에 나가면서 프로필을 찍어 본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항상 각자 다른 콩쿠르에 나가니까 이렇게 다 함께 우르르 가서 찍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기회가 닿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국제 대회에 참가할 수 있게 되자 기회가 생겼다. 발렌티나는 이 순간을 굉장히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재미있을 것 같아. 어떻게 입고 찍을 거야? 정해 놓은 거 있어?”

빠르게 이야기하는 발렌티나를 보니 미소가 지어졌다. 나 역시 기대와 흥분되는 마음으로 두근거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바로 말하는 건 재미없다. 난 살짝 장난을 쳐 보았다.

“음, 교복을 입고 찍으면 어떨까 생각해 보기도 했어요.”

“뭐!?”

그런데 내 장난에 발렌티나는 그야말로 펄쩍 뛰었다. 약간 정색까지 하는 걸 보니 내 말을 진담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난 지금 당황해하면 발렌티나가 진짜로 오해할 것 같아서 최대한 가볍게 말했다.

“농담이에요.”

“……무슨 그런 말 같잖은 농담을 해??”

“마, 말 같잖다니…… 발렌티나…….”

“교복 입고 찍을 거면 개학한 다음에 대충 모여서 칙칙한 강당에서 찍으면 되지, 뭐하러 방학에 이렇게 모여서 스튜디오를 찾아?”

“농담이라니깐요…….”

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발렌티나는 그제야 조금 진정했다. 하지만 혹시라도 내가 교복 이야기를 또 꺼낼까 봐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있었다.

요즘 들어 간간히 느끼는 건데, 발렌티나가 날 대하는 태도가 어째 아나스타샤를 대할 때의 태도와 비슷해져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건 그것대로 날 편하고 가깝게 여겨 주고 있다는 것이니 무척이나 달가운 일이었다.

“자, 이것부터 봐 봐.”

그렇게 우리는 오늘 입어 볼 의상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만약 신청이 접수되고 DVD 예선도 통과하게 된다면 오늘 찍을 사진이 곧 전 세계 사람들이 볼 프로필로 올라가게 될 테니 이상하게 보이지 않게 잘 고를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일단은 평범한 연주회용 드레스가 1순위로 올랐으나, 과거의 다른 연주자들의 프로필을 보면 파티 드레스나 세미 드레스. 혹은 아예 비지니스 캐쥬얼까지 생각해 보아도 괜찮았다. 장소도 굳이 피아노가 있는 무대를 고집하지 않아도 상관없었고.

이렇게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 늘어나니 발렌티나는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게 많은 듯했다.

“아무튼, 오늘은 콩쿠르고 뭐고 생각하지 말고 화보 찍는다고 생각하는 거야. 알겠지 다들?”

발렌티나가 너무 당당하게 말하는지라 순간 어떻게 말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나 대신 아나스타샤가 그녀에게 핀잔을 주었다.

“너야말로 말 같잖은 말 좀 하지 마. 콩쿠르 때문에 모인…….”

“오늘은 바른 소리 금지!”

“……??”

손가락을 치켜들고 아나스타샤를 가리키면서 발렌티나가 딱 잘라 말했다. 그 단호함엔 아나스타샤도 말문이 막혔는지 조용해졌다.

난 들떠 있는 발렌티나를 보며 나 역시 덩달아 들뜨는 기분을 느꼈다. 어차피 프로필 촬영에만 집중하려 했던 건 아니었다. 이 애들과 함께 가기로 정한 시점에서, 우리들만의 추억거리를 만들고자 하는 목적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본래 난 사진을 찍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순간을 살아가는 연주자에게 그런 건 무의미한 것이라는 오만한 강박 같은 것이 약간 있었으므로.

하지만 지금은 순간마다 내가 잘 지내고 있다는 걸 남겨놓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꼭 음악이 아니라도 좋았다.

난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가, 발렌티나에게 물었다.

“그러면…… 모두 한 컷에 나오는 사진도 찍는 건가요?”

그녀는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대답했다.

“당연하지. 설마 안 찍으려 했었어?”

“……후후.”

혼자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모든 것들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든다. 오늘 무엇이든 좋을 것 같았다. 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해 주셔서 기뻐요.”

“얘는 또. 당연한 이야기를 자꾸 하고 그래.”

발렌티나는 키득거리더니 이번엔 우리 세 명이 함께 찍을만한 테마 같은 것으로 무엇이 좋을지 마구 아이디어를 내기 시작했다. 장난스럽고 즐거운 이야기들이 차 안에 가득 찼다.

1시간 정도 되는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빅토르가 거의 다 도착했음을 알렸고, 창밖을 보니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느낌의 건물들이 보였다.

조금 더 가니 굉장히 넓은 마당과 여러 건물이 들어서 있는 한 저택에 도착했다. 혹시 사람이 사는 곳인가 싶었는데, 출입문 앞에 커다랗게 베스나 스튜디오라는 간판이 걸려 있어서 이곳이 바로 우리 목적지임을 알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살짝 놀란 듯 말했다.

“생각보다 엄청 크네……?”

연주자로서 준비를 하고 사진을 찍는 데에 신경을 쓰고자 한다면 갖춰야 할 것들이 정말 많았다. 도저히 혼자선 할 수 없는 것들이다.

때문에 이전까지 난 프로필이나 포스터 등 사진을 찍을 때 여러 곳에서 사람들의 도움을 받곤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한곳에서 해결할 수 있는 스튜디오도 있었다.

“안에서 다 할 수 있는 곳이니까. 세트도 엄청 많고.”

이곳은 내부에서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링 등은 물론이고 드레스 같은 의상과 소품 등의 대여, 그리고 다양한 장면을 연출하기 위한 장비나 장소들까지 모두 갖추고 있는 통합 스튜디오였다.

때문에 굉장히 넓은 부지를 가지고 있었고, 어떻게 보면 모스크바 외곽에 있는 영화 세트장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런 곳은 처음이라서 나도 약간 놀라웠다.

차에서 내린 우린 주변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꽤 즐거웠다. 발렌티나는 재미있지 않겠냐면서 우리를 이끌었다.

표시를 따라 가장 큰 건물의 안으로 들어서자 직원분이 우릴 맞이했다. 마치 호텔 데스크의 컨시어지와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3시 예약하신 발렌티나 페트로브나와 두 분, 맞으신가요?”

“예.”

“이쪽으로 오시죠.”

그 뒤를 따라가면서 주위를 보는데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예약에 맞추어 손님은 우리만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안내에 따라 사무실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바로 보이는 사진이 우리 눈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가운데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한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작가 세묜입니다.”

안경을 쓴 그는 약간 날카로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릴 대하는 태도는 무척이나 친절했다. 가볍게 웃으며 그가 차를 권했다. 우리는 원하는 종류들을 말하곤 그 앞에 앉았다.

“세 분 모두 피아니스트라 하셨죠. 잘 오셨습니다. 저희 베스나 스튜디오는 피아니스트 분들도 자주 찾아주시는 곳이거든요.”

“예, 홈페이지에서 스튜디오에 피아노가 있는 걸 보고 왔어요.”

“맞습니다. 제대로 된 그랜드 피아노죠. 소품이라서 소리는 엉망이겠지만 칠 수도 있고요.”

그가 말하는 제대로 되었다는 건 외형만을 뜻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건 상당히 중요한 사항이었다. 연주자들이 프로필을 찍을 때 악기와 함께 하는 건 굉장히 알아보기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품에 바이올린을 안고 프로필을 찍는 걸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것과 달리 피아노 연주자들은 그렇게 하기 어렵다.

피아노는 아무 곳에나 있지 않으니까, 무대나 연습실에 가서 촬영 준비를 하고 찍어야 했다. 그건 상당히 번거로운 일이다.

어쨌든 피아노도 있다면 나로선 아무 불만도 없다. 우리 모두 같은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세묜은 손끝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그럼 세 분 모두 찍고 가시는 걸로…… 일정 말씀해드리겠습니다.”

세묜의 주도로 우린 차를 마시며 앞으로 몇 시간 동안 있을 촬영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 복잡할 건 없었다. 이대로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링을 받고 의상을 몇 종류 고른 후 갈아입으면서 사진을 촬영하면 되니까. 하지만 세세한 부분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난 거의 듣고 있기만 하고 대부분 이야기는 발렌티나가 다 했다.

“자, 그러면 시작할까요.”

5분 정도 간단하게 이야기를 마치고 세묜이 일어났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다른 직원이 들어와선 우리를 안내했다.

사무실에서 나와 도착한 곳은 거울과 화장대가 몇 개나 놓여 있는 곳이었다. 몇 명의 스타일리스트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의자에 앉자 날 맡은 스타일리스트분이 빠르고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이런 일을 여러 번 해 본 베테랑인 것 같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연주회가 아니라 클래식 콩쿠르용 프로필 사진이라 하셨으니 짙은 메이크업은 피할게요. 괜찮으시죠?”

“예. 그렇게 해 주세요.”

“아마 다른 분들도 그렇게 하시게 될 테니 상대적으로 수수해 보일까 걱정은 안 하셔도 괜찮아요. 아, 그리고…… 혹시 생각하고 계신 의상 색이 있나요? 아니면 흰색에 가까운지 아닌지만 말씀해 주셔도 돼요.”

의상 색에 맞추어 톤을 정하려는 것 같다. 난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특별히 선호하는 색이 있진 않았다. 다만 굳이 따지자면 보라색이나 검은색 계통일 것 같다. 흰색 드레스를 입고 촬영하는 건 연주자용 프로필의 느낌이 아닐 것 같기도 하고.

“흰색과는 거리가 멀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스타일리스트분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내 화장대를 쭉 펼쳐놓았다.

“생각보다 오래 안 걸렸네?”

잠시 후 메이크업을 마친 내가 거울을 보고 있자 발렌티나가 와선 자기도 좀 보자며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바짝 달라붙어선 한참이나 내 얼굴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눈빛이 달라졌는데? 타티아나.”

“약간 그런가요?”

“아, 좋아졌다고. 이렇게 살려놓으니까 피아노 엄청 잘 칠 것 같고 그래.”

“아하하하.”

다시 보니 눈매가 조금 날카롭게 보이긴 한다. 원래도 난 인상이 그리 상냥한 편은 아니라 일부러 약간 약하게 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렇게 받고 나니 느낌이 다르다.

“정말 그렇게 보이나요? 아나스타샤.”

나보다 훨씬 더 강하게 보이는 아나스타샤는 그 눈매를 누그러뜨리더니 피식 웃었다.

“어떻게 해도 너다우니까 괜찮아.”

“무슨 의미예요?”

“잘 된 것 같다는 뜻이야.”

사실 내가 어떻게 해도 아나스타샤는 늘 좋은 이야기밖에 안 해 줘서 객관적인 평가가 잘 안 되긴 한다. 물론 나 역시 그녀에게 똑같긴 하지만.

우린 한참이나 웃다가 다시 의자에 앉아 긴 촬영 준비를 마저 받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