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69화 (669/1,277)

##  669화

우리는 헤어스타일링을 받기 전에 먼저 의상들을 고르기로 했다.

사진 촬영에 대한 전반적인 모든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튜디오이니만큼 엄청나게 큰 드레스룸도 준비되어 있었지만, 전부 기성 제품들이기 때문에 빠르게 가봉만 해서 입고 촬영하는 식이기 때문이었다.

맞춤 드레스 전문 매장처럼 하자면 시간이 엄청나게 길어지기에 하루 만에 촬영을 마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스튜디오에선 이렇게 하는 쪽이 훨씬 편하고 합리적이었다.

“뒤로 잠시 돌아 주시겠어요?”

줄자를 든 직원분이 나에게 요청했다. 난 하라는 대로 뒤로 돌고, 팔을 올리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렇게 새로 사이즈를 모두 잰 직원은 메모지 위에 간결하게 휙휙 숫자를 적어 넣었다. 옆에서 그 숫자들을 본 나는 약간 놀랐다. 얼마 전에 재서 기억하고 있던 숫자보다 커졌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자각은 거의 없었는데…… 요즘 잠을 잘 자서 그런가? 어쨌건 피아노 연주자로서 좋은 체력을 원하는 내겐 희소식에 가까웠다.

약간 기분이 좋아진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저쪽에서 막 치수 재는 것을 마친 발렌티나에게 다가갔다.

“다 재셨나요?”

“응.”

발렌티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돌연 으름장을 놓았다.

“어떤지 묻진 마.”

“예?”

“그…… 넌 어떤데? 타티아나.”

숫자가 마음에 안 든 걸까. 난 웃으며 말했다.

“약간 커졌어요. 요즘 식사량이 늘어난 덕분일까요.”

“무슨 의사처럼 말하지 마……. 그리고 넌 워낙 비율이 좋아서 그런지 아직도 너무 마르기만 한…….”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리던 발렌티나는 위아래로 날 훑어보더니 갑자기 고개를 갸우뚱했다. 뭔가 간과하고 있던 점을 이제 발견한 것 같은 눈빛이었다.

“너 혹시 키 컸니?”

갑자기 무슨 소리람?

난 눈을 뜬 이래로 161cm에서 단 1cm도 키가 자란 적이 없었다. 처음엔 그래도 약간 크지 않을까 기대도 했었지만, 2년 동안 그대로인 것을 보고는 지금은 완전히 포기한 지 오래였다. 키가 크는 건 몸무게가 느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하지만 발렌티나는 아무리 봐도 묘하다는 듯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잠깐 이리 와 봐. 타티아나. 저기, 여기 키도 재 볼 수 있을까요?”

“음, 장비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쪽에서 재 드릴까요?”

“예, 부탁드려요.”

난 그녀의 손에 이끌려 벽에 기대어 섰다. 어린애 키 재는 기분이다.

직원 한 분이 오시더니 포스트잇으로 내 머리끝을 기준으로 벽에 표시를 하고는 줄자를 쭉 늘려 높이를 재 주셨다. 어차피 그대로일텐데 괜한 수고를 끼치는 것 같아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직원분이 불러 주신 숫자에 약간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163cm네요. 약간 오차는 있겠지만 되도록 정확하게 재 보려고 했어요.”

“아…… 감사합니다.”

더듬거리며 감사를 표하자 옆에 있던 발렌티나가 거보라는 듯 의기양양하게 물어왔다.

“너 원래 이렇게 안 되지 않았어?”

“맞아요. 지난 겨울까진 그대로였는데…….”

열여섯 살에 키가 크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2년이나 꼼짝도 않다가 이렇게 된 건 약간 의아했다. 평범한 일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짚이는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올겨울 난 검은 새에게 보다 많은 것들을 허락받았고, 그 덕분에 건강에 관련된 것들은 거의 다 회복되었으니까. 그전까진 밸런스가 무너져 있던 몸이 이제야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면 이해가 간다.

모두 추측이지만, 분명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날 지켜보고 있을 검은 새를 생각하며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데, 발렌티나가 밝은 목소리로 아나스타샤를 불렀다.

“아나스타샤도 이리 와 봐! 타티아나가 널 쫓아가고 있어!”

“……무슨 일이니?”

치수를 재던 아나스타샤도 이쪽으로 왔다. 난 혹시나 싶어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아직 어림도 없었다. 고개를 들고 올려다봐야만 눈을 마주할 수 있는 건 예전과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이제 와서 키가 제대로 큰다고 해도 그녀만큼 크긴 어려울 것 같았다.

물끄러미 올려다보니 아나스타샤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옆에 있던 발렌티나가 내 팔에 달라붙더니 나 대신 말했다.

“타티아나 키가 컸대.”

“정말?”

아나스타샤는 놀란 눈을 하더니 아까 발렌티나가 그랬던 것처럼 날 응시했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난 전혀 몰랐는데…….”

“저도 몰랐어요.”

“그건 모르는게 정상이야.”

자기 성장에 대해 둔감한 건 어쩔 수 없지만, 가까이 있는 친구라면 알아야 하는 게 아니냐는 투로 그녀가 말했다. 난 빠르게 말했다.

그러나 가까이 있을수록 잘 모르는 것 또한 당연했다. 훌쩍 커 버린 것도 아니고 겨우 2cm니까. 솔직히 아버지나 오빠도 내 키에 대해선 생각도 못하고 있을 게 분명하고.

그런 이야기들을 할 참이었는데, 갑자기 스타일리스트 분께서 발렌티나를 불러서 이야기의 흐름이 끊겼다.

대화 주제를 돌리기엔 적당했다. 그냥 이쯤에서 의상 이야기나 하는 게 좋을 것 같단 생각을 할 즈음, 아나스타샤는 저편을 휙 둘러보더니 또 다른 한 친구에 대해 이야기했다.

“얼마 전에 에르네스트를 보고 신기해할 일이 아니었네.”

“에르네스트요?”

“그 애도 아직 큰다고 했잖아.”

저번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갈라쇼를 보러 내 연습실에 모두 모였을 때 그런 이야기를 듣기도 했었다. 난 그때 내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를 축하하기만 했었는데…… 정작 나도 마찬가지라 생각하니 살짝 기분이 묘하다.

아나스타샤는 조용히 날 내려다보더니 옅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건강해진 것 같아서 기뻐. 타티아나.”

“……그런 걸까요?”

“응. 요즘 부쩍 느끼곤 해.”

그녀가 그렇게 봐 준다면 나 역시 기쁘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난 늘 아나스타샤를 불안하게 만들곤 했었으니까.

그렇게 건강에 대해 이야기하던 아나스타샤는 약간 목소리를 낮추며 내 정신적인 부분에 대한 깊은 이야기도 덧붙였다.

“네가 돌아온 기억들도 잘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고.”

내게 주어진 검은 새의 기억들을 딱히 드러내려 한 적은 없었다. 그녀는 내게 특정한 성격 등을 강요하거나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이런 사람이었다는 것 정도만 기억으로 솔직하게 전해 주고 갔을 뿐이니까.

하지만 난 그 기억들을 단지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분명한 영향을 받고 있었고, 때문에 무의식중에 나오는 언행 등에서 아나스타샤에게 전해지는 게 있는 듯했다.

“스스로도 느끼고 있지 않니?”

“……맞아요.”

이전 같았으면 판단을 보류해 버렸을 일들도 이젠 조금 더 분명히 결정할 수 있었다. 때문에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졌고, 발을 내딛는 것에 자신이 생기기도 했다.

날 바꾼 좋은 변화라 생각한다.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나쁘게 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아나스타샤 역시 축하를 보내오고 있었다. 난 그 진심에 거짓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그녀가 더 묻고 싶어 하는 것이 남아 있음을 직감했다.

“저기, 아나스타샤. 혹시 그런 걸 요즘 계속 생각하고 계셨던 건가요?”

“그런 거라니? 뭐가?”

“아나스타샤를 몰랐던 시절의 기억 때문에 어색할지도 모른다고요.”

종종 느끼던 기분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여전히 나와 가장 친한 친구로서 제일 가까이에 있으려 하지만, 이전보다 조금 더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은 기색을 보이곤 했다. 그게 그저 내 착각만은 아니라 확신한다. 내가 기억을 되찾자마자 아나스타샤는 그 영향으로 내가 조금 달라진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에르네스트도 요즘 나와 약간 데면데면해하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것도 내가 예전 같지 않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더더욱 머리가 복잡해지곤 했다.

때문에 언젠가 한번 이야기하려던 것이었다. 지금 장소가 그리 좋은 것 같진 않지만,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보단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내 상황은 특이하지만 우리 관계는 특이하지 않다. 가볍지만 확실하게.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

날 바라보던 아나스타샤는 조용히 물었다.

“그렇게 보였니?”

“혹시나 싶어서요.”

그녀도 혼란스러워하는 건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내가 그런 것처럼.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아나스타샤는 불안을 순식간에 날려 버렸다.

“걱정 마. 그렇게 생각 안 해. 네가 그랬었잖니? 옛 습관이 옮겨 와서 네가 조금 달라지더라도 결정적으로 널 바꿔 놓진 못할 거라고.”

내가 했던 말들을 아나스타샤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말들이 지금도 틀림없다는 듯,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괜찮아. 조금 더 낙천적이 되고 키가 크더라도 넌 내가 알던 타티아나 그대로니까.”

“…….”

“나 역시 네가 아는 아나스타샤 그대로일 테고.”

피상적인 몇몇 습관들이 변화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시간과 함께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본질적인 부분은 변화하지 않는다. 아나스타샤가 다정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인 건 2년 전 처음 봤을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미소를 짓자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얘들아, 이리 와 봐!”

발렌티나가 또 무언가 발견했는지 갑자기 우릴 불렀다. 아나스타샤는 픽 하고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웃더니 소곤거렸다.

“쟤는 좀 침착하게 변했으면 좋겠는데.”

“아하하, 전 발렌티나가 활기찬 게 좋아요.”

“하긴…… 조용한 발렌티나는 상상이 안 가긴 해.”

우리가 속닥거리고 있자 멀리 있던 발렌티나가 둘만 이야기하지 말라며 또 빽 하고 소리를 쳤다. 우리는 킥킥 웃으며 그녀 곁으로 가서 이야기를 들었다.

방금 잰 치수에 맞게 원하는 의상들이 있는 카탈로그를 확인하고, 몇 종류를 고른다. 프로필로 필요한 사진은 단 몇 장뿐이지만 많은 종류의 사진을 여러 장 찍을수록 좋은 사진을 건질 확률이 높아지니 지금 스튜디오 사정에서 허락하는 한, 잘 골라보는 편이 좋았다.

정말 다채로운 의상들 중에서 우리가 고른 건 거의 드레스 쪽이었다. 물론 드레스만 하더라도 종류가 굉장히 많고, 이 스튜디오에 있는 것만 300벌이 넘는다고 하니 고르는 데에 신경이 꽤 쓰였다.

그렇게 치수를 재고 의상도 고르고 난 뒤엔 가봉을 기다리면서 헤어스타일링을 받았다. 특별히 머리에 손댈 생각은 없었기에 사진에서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드라이만 받았다.

“저 먼저 가 볼게요.”

“벌써 끝났어?”

“자연스럽게 하려고 해요.”

그렇게 가장 먼저 스타일링을 마친 나는 안내에 따라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이미 직원 몇 분이 날 기다리고 있다가 드레스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촬영용으로 쉽게 입을 수 있게 되어 있는 드레스이다 보니 그리 복잡할 건 없었다. 금방 갈아입고 나니 직원분이 갑자기 박수를 치셔서 조금 놀랐다.

“잘 어울리시네요. 완벽해요.”

“감사합니다.”

난 가넷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내가 고른 건 남색 시스 드레스였다. 전신을 감싸고 있지만 답답해 보이지 않고, 클래식 연주자에게 걸맞은 차분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이런 프로필이라면 어느 콩쿠르에라도 자신 있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의상을 확인한 난 문득 예카테리나와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세트장에서 제대로 찍은 사진보단 지금 여기서 찍어서 보내 주는 게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거울 쪽으로 스마트폰 카메라를 향하며 앞을 보았다. 딱히 포즈 같은 건 잘 취할 줄 모르지만, 양손에 그래도 스마트폰을 들고 있으니까 어색하게 보이진 않았다.

내 뒤편에 있던 직원분들이 혹시나 거울 안에 잡힐까 싶었는지 좌우로 자리를 비켜 주셨다. 난 미안하다는 뜻으로 뒤편을 바라보았다. 그녀들이 웃으며 물었다.

“SNS에 올리실 건가 봐요?”

“아…… SNS은 안 하지만, 친구가 보내 달라 해서요.”

난 그런 부분에 무심하게 살고 있었지만, 요즘은 이렇게 혼자 사진을 찍으면 SNS에 올리는 건 당연한 일인가 보다.

어쨌든 되도록 자연스럽게 사진을 한 장 찍어서 예카테리나에게 메시지로 보냈다. 그랬더니 불과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 답장이 날아왔다.

[너무 예쁘다! 타티아나!]

온갖 이모티콘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너무 과하게 반응하시는 것 아닌가요? 예카테리나.

그래도 기뻐해 주는 것 같으니 좋았다. 난 다른 의상들도 입어보는 대로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며 그녀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내가 스마트폰 화면을 보고 있자 아까 내게 말을 걸어왔던 직원분께서 슬쩍 물어보셨다.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으시겠어요.”

“별로 그렇진 않아요.”

“설마요? 친구분들 많으실 것 같은데.”

“아하하…….”

이제 내 교우관계가 좁다고 하긴 힘들었다. 친한 사람들이 이젠 양 손가락으로 다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아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음악 외적으로 이렇게 드레스 사진을 보내거나 SNS 등을 공유할 사람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내 친구들은 왜 그런데엔 영 관심이 없을까? 이런 것도 다 비슷한 사람들이 만나기 때문인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난 스마트폰 화면을 만지작거렸다. 메신저에 등록되어 있는 친구들의 프로필 등을 구경한다. 내가 당장 친구들에 대해 궁금해졌을 때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였다.

“……응?”

난 유심히 화면을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의 프로필로 설정되어 있는 건 책상 사진이었다. 그런데 그 책상 위에 놓인 책들 사이로 악보 한 장이 보이고 있었다. 사진을 한 번 눌러 확대해 보니 그 악보 위의 음표들도 보였다.

일부러 해 놓은 거라면 상관없겠지만…… 혹시 실수라면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닐까?

멍하니 있던 난 바보같이 보고 있을 때가 아님을 깨달았다. 이렇게 구경만 할 게 아니라 내겐 보다 능동적인 방법이 있었다.

곧바로 난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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