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70화 (670/1,277)

##  670화

평일 오후엔 이것저것 할 일이 많다. 그건 에르네스트도 마찬가지였다. 피아노 연습과 작곡 공부, 그리고 요즘은 시퀀서를 다루는 것까지 할 일이 산더미였다.

“…….”

그렇게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는 에르네스트였지만 지금은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으로 영화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사샤가 이전에 같이 보자고 했던 영화를 혼자 보기 싫다며 칭얼거리며 에르네스트를 거실로 끌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귀찮았지만, 동생이 왜 이러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한 에르네스트는 길게 실랑이하지 않고 얌전히 나왔다.

이왕 보기로 했다면 싫은 내색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예 팝콘도 한 봉지 만들어선 사샤와 함께 영화를 봤다.

동생과 놀아주면서 2시간 정도 휴식을 하는 것이라면 괜찮았다. 원래 보고 싶었던 영화이기도 했고.

그런데 막 배우들이 격투를 벌이는 장면을 보면서 이걸 사샤가 봐도 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무엇 하고 계시나요?]

“……?”

타티아나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오는 건 드문 경우였다. 두 사람은 종종 연락을 주고받고 하고 있긴 하지만 대부분 용건이 있는 일이거나 음악에 관련된 이야기였으므로.

그리고 애초에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에게뿐만이 아니라 다른 누구에게도 사사로운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 가장 친한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에게도 자주 메시지를 하거나 전화를 하는 편이 아니라 들었다. 거기에 SNS등도 전혀 하지 않고.

하지만 에르네스트도 타티아나의 사교성에 대해 말할 자격은 없었다. 그도 삭막하긴 누구 못잖은 편이었으니.

잠시 메시지를 내려다보던 에르네스트는 공부를 하고 있다거나 작곡 중이라고 바쁜 척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답했다.

[영화 보면서 쉬고 있어.]

[영화관이신가요?]

[아니, 집에서.]

[정말요?]

[그럼 정말이지 거짓말이겠어?]

[혹시 식사도 거르고 작곡하고 계신 게 아닌가 해서요.]

어쩌다가 이 정도로 신뢰를 잃어버렸지?

저번에 길거리에서 지갑도 없이 마주쳤던 게 아무래도 큰 타격이었던 것 같다. 그날 타티아나가 묘하게 더 상냥했던 것 같기도 하고…….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며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보이는진 모르겠지만 밥도 못 먹고 작곡에만 몰두하는 그런 자기 앞가림 못하는 사람처럼 보이긴 싫었다.

하지만 자신이 없긴 했다. 오늘만 해도 에르네스트는 아침을 거르고 점심도 대충 때운 상태였다. 자기객관적으로 보면 정상적인 방학 일과를 보내고 있는 중은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인상을 쓰다가 옆에 있는 사샤에게 물었다.

“사샤.”

“응?”

“내가 그렇게 작곡에 미친 놈처럼 보이냐?”

“어…… 약간?”

이 녀석이. 에르네스트는 눈을 부라렸다.

사샤가 말하는게 진실일 거란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바로 인정하긴 싫었다. 그는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어딜 봐서?”

“형 지금도 보면 쌍커풀이 이렇게 되어 있다니까?”

“이렇게가 뭔데?”

“이렇게.”

사샤는 태연하게 손으로 눈가를 누르면서 무언가 표현하려 했다. 뭔 하려는 건진 잘 모르겠는데…… 피곤함 때문에 쌍커풀이 짙어졌다는 건가?

에르네스트는 동생을 삐딱하게 바라보다가, 눈가를 마구 문질렀다. 이렇게 마사지를 하면 보기에 조금은 나아지리라 생각하면서.

다시 눈을 뜬 에르네스트는 사샤에게 물었다.

“이제 어떤데?”

“훨씬 괜찮아졌나?”

“……그러면 이리 와 봐.”

지금이 기회일 것 같다는 생각에 에르네스트는 사샤의 옆에 앉혀 두곤 텔레비전을 배경으로 하여 셀피를 찍었다. 브이 사인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렇게 사진을 찍자 사샤가 의아한 듯 물었다.

“사진? 누구한테 보내려고?”

“어…….”

에르네스트는 이 영악한 꼬맹이에게 사사건건 다 말해 주고 싶지 않았다. 요즘은 다 알려고 들지 않고 적당히 하고 있긴 하지만, 사샤가 아나스타샤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훨씬 일찍 꿰뚫어 봤다는 것을 에르네스트는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몰라, 알아서 뭐 하게.”

“…….”

사샤는 불만이라는 듯 볼을 부풀렸지만 에르네스트는 무시했다. 일단 지금 그의 머릿속엔 타티아나에게 제대로 보고해야겠단 생각뿐이었다.

[자, 사샤랑 영화 보고 있는거. 됐지?]

뭐가 되었다는 건지 다시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다.

일단 그렇게 사진과 메시지를 보낸 에르네스트는 잠시 메시지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불현듯 너무 충동에 맡기고 저지른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사진을 받은 타티아나가 어이없어 하진 않을까? 그녀는 그저 에르네스트가 잘 있는지 궁금해 했을 뿐이다. 이건 과잉반응이었다.

아니나다를까, 타티아나가 메시지로 난감해했다.

[인증 사진까지 보내 달란 건 아니었는데요…….]

“…….”

그냥 활자인데도 그 감정이 느껴졌다. 에르네스트는 스마트폰을 들고 이마를 찍고 싶어졌다. 10초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정말 잠이 모자랐나?

이제 와서 심심해서 보내 봤다고 하면 정말 머저리같이 보일 것 같고……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궁리해야만 했다. 작곡을 할 때도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런데 멀리 있어도 그가 당황해하는 걸 알았는지, 타티아나가 먼저 메시지를 이어 보내며 대화 주제를 슥 돌려주었다.

[물어볼 게 있어요.]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성실히 대답해주리라 맹세하며 에르네스트는 다음 메시지를 기다렸다.

타티아나의 질문은 간결했다.

[메신저 프로필로 설정해 두신 사진에 악보가 보이는 것 아시나요?]

“뭐?”

에르네스트는 소리를 내어 말했다. 무슨 말이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는 스마트폰을 조작해서 프로필 화면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대충 책상을 찍어 놓은 사진이 올라가 있었다. 별 의미는 없었다.

그런데 조금 자세히 보니 확실히 타티아나가 말한 대로 악보가 빼꼼히 보이고 있었다. 최근 작곡했던 곡 중 하나였다.

작곡가가 세상에 곡을 보이는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발표하지 않고 이렇게 보이는 건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얼른 프로필을 원색 배경으로 고쳐 놓곤 타티아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몰랐어. 고마워.]

[역시 말씀드리길 잘 했나요?]

[딱히 문제될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경솔했던 것 같아.]

[바로 고치셨네요. 잘 하셨어요.]

메시지만 받아 보고도 그녀가 나지막히 웃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메시지를 되풀이해 읽었다.

그런데 그렇게 읽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프로필 사진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안 거지?

어떤 상황인지 알 순 없지만, 타티아나가 먼저 프로필을 보고 에르네스트에게 말을 걸어온 건 사실이었다. 사진에 문제가 없었으면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평소 이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던 그녀가,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갑자기 무척 궁금해졌다.

[타티아나, 넌 지금 뭐 하고 있어?]

어김없이 연습실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예상외의 답이 왔다.

[콩쿠르 신청서에 넣어 보낼 프로필 사진 촬영하러 왔어요. 아나스타샤, 발렌티나도 함께.]

세 사람이 함께 프로필 촬영을 하는 건 너무 당연하게 느껴졌다. 언제나 붙어 다니곤 하니까, 이런 것도 단순히 사진만 찍는 게 아니라 같이 추억을 만들면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에르네스트는 모스크바 어딘가의 사진관에 있을 세 사람을 떠올리며 메시지를 썼다.

[그래? 프로필 어떻게 찍을 건데?]

콩쿠르용 프로필은 정말 각양각색이다. 피아노를 배경으로 찍는 건 정말 흔하고, 요즘은 숲이나 건물 등을 배경으로 해서 정말 화보처럼 찍는 경우도 많았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나 쇼팽 콩쿠르엔 딱히 프로필에 관한 규정은 없으니 이상하지만 않으면 뭐든 가능했다.

때문에 장소라든가 세트 등이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었다. 아무래도 타티아나라면 피아노를 두고 차분하게 촬영하지 않을까 싶긴 했지만.

타티아나는 메시지로 말해 주지 않고 사진으로 대신했다.

그런데 그 사진은 스튜디오의 배경 등을 찍은 것이 아니라 드레스를 입은 타티아나가 직접 찍은 셀피였다.

“…….”

에르네스트는 아까 전 타티아나가 느꼈을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일단 당황스러웠다. 왜 배경이 아니라 셀피가 온 건지 잘 모르겠다.

실수인가? 아니면 아까 에르네스트가 먼저 보낸 것에 대해 정직하게 반응한 건가? 온갖 추측이 휘몰아치며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다음엔 그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평소 자주 봐서 그녀에겐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보니 전혀 아니라는 걸 새삼 느낀다. 순간적으로 할 말도 잊고 에르네스트는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사진으로 보는 타티아나는 화려하게 그려진 인물화처럼 보일 정도였다.

잠깐만, 이거 뭐라고 해야 돼?

잘 어울린다고 해 줘야 하나? 여러 단어들이 떠오르다가 이내 사라져간다. 꼭 타티아나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렇게 생각이 잘 되지 않는 일이 많았다.

답장을 하긴 해야 하는데 머리가 안 돈다.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어색해질 뿐이라는 생각이 더더욱 에르네스트를 재촉했다.

그런데 재촉을 느낀 건 타티아나 쪽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키 어떤가요?]

“??”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드레스 어떤가요도 아니고 키? 에르네스트가 의아해하며 그녀의 암호를 풀기 위해 또 갖은 애를 쓰고 있는데, 다시 다음 메시지가 날아왔다.

[키가 컸어요. 2cm]

그걸 지금 왜 이야기해? 그리고 뭔가 비교할 것도 없이 독사진으로 키를 어떻게 알겠어?

약간 황당했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만 웃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어지러웠던 상황이 말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만 해도 그런 말 없었잖아?]

[저도 몰랐어요.]

장난이 아니라 정말로 오늘 처음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도 키를 직접 재 보기 전엔 키가 자랐다는 걸 스스론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킥킥거리며 웃던 에르네스트는 문득 그녀의 키를 떠올려보았다. 타티아나는 항상 자세가 곧아서 옷도 잘 맞고 키가 커 보이긴 하지만 가까이에서 서 보면 약간 작은 편이다. 그런데 2cm나 컸다고 하니 정말 축하할 일이었다. 그는 농담조로 메시지를 보냈다.

[목표는 어디까지야? 아나스타샤 정도?]

[엉뚱한 말씀이시네요.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건가요……?]

[그래도 바라는 게 있을 것 아냐?]

아나스타샤만큼 클 키였으면 진즉 컸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혹여나 싶어 물어보았다.

[저는 저보단 에르네스트가 많이 크셨으면 좋겠어요. 원하시는 만큼.]

하지만 타티아나는 이 와중에도 그녀 자신은 뒷전이었다. 그리고 키에 대한 이야기도 지금 다른 게 아니라 신체조건이 좋아질수록 낼 수 있는 기술적 퍼포먼스도 좋아진다는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뿐이었다.

그럴수록 더더욱 바라는 게 있기도 할 텐데.

늘 이래서 이젠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약간은 자기 바람 정도는 마음껏 이야기했으면 한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점에서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진지하게 받지 않고 답장했다.

[난 사샤 녀석이나 빨리 컸으면 좋겠는데.]

[우리 서로 바라는 게 다 다르네요?]

[그러게.]

[하지만 전부 좋다고 생각해요.]

잠시 조용하던 타티아나로부터 슬슬 대화를 마무리지으려는 메시지가 왔다.

[에르네스트도 콩쿠르용 프로필 촬영 하셔야 하죠?]

[나중에.]

[잘 하시길 바랄게요.]

순간적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지만, 지금은 메시지에서 그치는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녀에게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보내는 건 참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드레스 정말 잘 어울려. 타티아나.]

타티아나의 답장은 한참이나 후에 돌아왔다.

[고마워요.]

전화를 걸어볼 걸 그랬나.

에르네스트는 잠시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보다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영화는 이미 몇 장면이나 지나가서 갑자기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에르네스트에겐 전혀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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