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1화
어색하지 않게 넘어간 걸까?
전화가 끊기기 전 마지막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다가, 난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에게 사진을 보낸 건지 잘 모르겠다.
예카테리나에게 SNS에 사진을 올리는게 요즘은 당연한 것이란 이야기를 들으면서 친구들과 멀리 있어도 무엇을 하는지 보여 주는 게 어쩐지 당연한 풍조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먼저 예카테리나에게 보내 주면서 약간 경계심이 낮아져 있기도 했다. 여러모로 그녀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에르네스트가 갑자기 먼저 불쑥 사진을 보내 준 것이 제일 컸다. 난데없이 그렇게 무방비하게 사진을 보내 주면 나도 당연히 똑같이 해야 할 것 같잖아?
조금 차분해지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니 약간 말려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
그러나 차분을 지나 냉정해지자 예카테리나나 에르네스트의 탓을 할 필요 없음이 분명해졌다. 순간적으로 충동을 느끼고 그대로 행동해 버린 데엔 변명의 여지가 없었으니까.
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옆에 있던 직원이 부를 때까지 메시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고개를 들었다. 이젠 내 손을 떠난 일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못 할 일을 한 것도 아니고. 키 자랑으로 마무리 지었으니 괜찮으리라. 앞으론 조심해야지.
결론을 내린 난 직원에게 사과했다. 너무 오래 내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죄송해요. 잠시 스마트폰을 보느라.”
“괜찮아요, 그만큼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아서 저희도 다행이네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하지만 이제 슬슬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요청을 담아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드레스에 문제가 없으시다면 바로 세묜 작가님을 만나러 가시겠어요? 아마 순서대로 바로 촬영에 들어갈 거예요.”
“그렇게 할게요.”
난 늦은 만큼 빠르게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안내에 따라 다시 사무실로 향하니, 아깐 테이블 앞에서 사업가처럼 하고 있던 세묜이 이번엔 커다란 카메라를 손보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정말 사진작가 같았다.
촬영을 준비 중인 걸까? 혹시 기다린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 싶어 머뭇거리고 있자 그가 가볍게 웃더니 카메라를 놓고 내 쪽을 돌아보았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일찍 오셨군요. 그럼에도 완벽하고요.”
잠깐 보자마자 그렇게 짧게 평한 그는 팔짱을 끼더니 한쪽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날 조금 더 주의 깊게 응시했다.
“흠.”
“…….”
모르는 사람이 지켜보는 시선은 약간 어색했지만, 그렇다고 위축될 건 없었다. 난 두리번거리지 않고 똑바로 목을 세우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묜이 곧 손가락을 들어 날 가리키며 물었다.
“그 드레스 색은 직접 고르신 건가요?”
“예.”
“특별한 이유라도?”
난 카탈로그를 보면서 당장 연주회를 해야 한다면 어떤 드레스를 입을지 생각해 보았다. 뭘 입든 실력 발휘엔 전혀 차이가 없어야 훌륭한 연주자이겠지만, 몸만 오르는 연주자로서 스스로를 어떤 방식으로 무장할지 결정하는 건 상당히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몸을 움직이는 데에 불편함이 없어야 하는 건 물론이었고 색 역시 음악과 잘 어울려야 한다.
되도록 차분하게 가라앉는 색이 입고 싶었다. 남색을 고른 건 보라색 계통 중에서도 어두운 쪽에 가까운 색이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보라색인지에 대해선 타인에게 설명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난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성실하게 그에게 답변했다.
“완전히 붉거나 푸른색의 드레스로는 제가 무대에 올라 제대로 역할을 해내지 못할 것 같아서요.”
가만 듣던 세묜이 다시 한번 물어온다.
“흠…… 붉은 드레스를 입는 연주자들도 많은데요.”
“제 개인적인 이유라 생각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사적인 취향까지 파고들 생각은 없는지 깔끔하게 손가락을 튕긴 그는 이윽고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날 바라보고 드레스 색에 대해 물어본 건 내가 곧 피사체가 될 차례이기 때문이었다. 상황에 맞지 않다면 적절하게 조언을 해 주는 것도 사진작가의 역할이었으므로.
하지만 그는 딱히 손대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개인적인 센스가 전 굉장히 마음에 드네요. 네이비 컬러, 차분하면서도 스마트한 이미지의 피아니스트……. 죄송하지만 어떤 연주를 하시는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 아주 멋진 연주를 하실 것 같군요.”
너무 칭찬하시는 것 아닌가요……? 약간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는 내 목께를 가리키며 물었다.
“붉은 목걸이는 보석인가요?”
“예, 가넷이에요.”
“그것도 개인적인 셀렉트? 하하, 요즘은 센스 있는 분들이 많으셔서 참.”
“그런 말 처음 들어요.”
패션과는 담을 쌓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잘 어울리는 걸 찾을 수 있게 된 걸까. 심지어 사진작가에게 이런 말도 듣게 되다니 감격스러울 정도였다.
담백하게 칭찬을 마친 세묜은 옆에 있던 카메라들을 가방에 척척 정리하더니 곧장 말했다.
“그럼 우선 피아노가 있는 곳으로 갈까요.”
긴말하지 않고 행동이 빠른 사람이었다.
난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하느냐 묻고 싶었지만, 먼저 하고 있다 보면 안내를 받아 오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한 명이 찍는 동안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단 빠른 순서대로 찍는 게 낫겠지.
그렇게 난 세묜을 따라 장소를 옮겼다. 멀리 갈 필요는 없었다. 바로 이 저택 건물의 1층에 피아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방을 보자마자 난 이전부터 느끼고 있던 직감에 확신의 도장을 찍었다. 원래 이 건물은 별장 등으로 쓰이던 저택이었고, 그걸 인수해서 스튜디오로 꾸몄다는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이 방의 살롱풍 인테리어 등이 설명되지 않는다. 잘 꾸민 세트장이 아니라 이곳은 있는 그대로의 연주회용 무대였다.
저편에 있는 피아노를 본 나는 손끝이 움찔거리는 걸 느꼈지만 꾹 참았다. 지금은 피아노가 아니라 촬영에 집중할 때였다.
잠시 기다리니 세묜이 순식간에 카메라를 세팅했다. 반사판 등은 이미 설치되어 있어서 준비는 금방 끝났다.
“자연스럽게 서 보실까요.”
그의 요청에 따라 난 바로 섰다. 그리고 무표정하게 있지 않고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거울을 보면서 웃는 걸 종종 연습한 덕분인지 스스로 그렇게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예전에 포스터 등을 찍을 때 약간 배웠던 포즈 등은 여전히 어색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카메라에 익숙해지긴 힘든 사람일 것 같았다.
플래시가 몇 번 터지고, 세묜이 말했다.
“좋아요. 그럼 이번엔 피아노에 기대어 볼까요?”
좋다고 말하고 있긴 하는데 그 목소리에선 완전한 만족이 느껴지지 않았다. 난 다시 세묜이 말하는 대로 피아노에 가까이 섰다. 미리 청소했는지 먼지가 앉아 있거나 하진 않아서 가볍게 기댈 수 있었다.
이런 포즈로 프로필을 찍는 연주자들도 참 많았는데, 어떻게 했었더라? 난 기억을 되살리면서 되도록 비슷하게 해 보려 했다.
그런데 카메라를 잡고 있던 세묜이 옆으로 슥 나오더니 말했다.
“촬영을 많이 해 보시진 않으셨군요.”
“……예. 약간 어색해요.”
“그럼 제가 지금 이 상황에서 제일 자연스럽게 있으라 요청드린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무리 자연스럽게 하려고 한다고 해도 카메라 앞에선 힘들 것 같다. 단기간에 익숙해지긴 힘든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 보려 생각하던 내 머릿속으로 좋은 생각이 하나 스쳐 지나갔다.
여기가 어딘가? 촬영 스튜디오이기도 하지만 피아노가 있기도 하지 않은가. 난 피아노 앞에선 카메라 한 대가 아니라 수십 대가 생방송 중계를 하고 있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피아노를 연주해 봐도 될까요.”
“미리 말씀드렸지만 소품이라서…….”
“안 되나요?”
“……치는 시늉 정도라면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럼 카메라 각도를…….”
세묜은 이것저것 해야 할 게 있는 모양이지만, 어쨌든 허락은 받은 것 같다. 난 바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이 방에 잘 어울리는 그랜드 피아노다. 콘서트용은 아니고 딱 살롱 음악이나 실내악 연주에 어울리는 사이즈.
난 이 피아노의 크기와 방 그리고 과거 있었을 음악을 떠올리며 적당한 곡과 음색을 내 레퍼토리 안에서 선별했다. 적당한 곡이 몇 가지 생각났고, 그중 한 곡을 피아노 위에 올린다.
“…….”
천천히, 오랫동안 굳어 있던 소리들을 하나씩 눌러 펴는 것처럼 건반을 누른다.
슈만 어린이의 정경 op.15의 7번. 트로이메라이traumerei.
꿈이라는 뜻을 가진 제목처럼 낮잠에 빠진 어린아이가 그리는 꿈속 세계를 사뿐히 걸어 나간다. 급하지 않고 선명하게, 잠에서 깨지 않게, 편안한 미소를 지을 수 있게.
그렇게 연주하면서 동시에 피아노의 상태도 체크해 나갔다. 어떤 음들은 조율이 잘 안 되어서 음이 비틀려 있었다. 그 음 아래에 다른 화음을 받쳐 놓으니 소리가 조금 나아졌다.
그렇게 난 파악한 소리들을 보강하면서 보다 나은 연주를 추구했다. 원곡과 다르지만 이 정도는 피아노를 상태를 고려해 슈만께서도 용서해 주시리라 믿는다.
낮잠은 길지 않다.
2분 남짓한 꿈을 꾸고 현실 세계로 돌아온 나는 손을 내려놓았다.
“…….”
이렇게 연주를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갑자기 한 것이지만 내 마음엔 들었다. 사진작가의 마음에도 들었으면 좋겠는데.
난 세묜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떤가요?”
“……셔터를 못 눌렀습니다.”
“예?”
그리고 보니 연주 중에 한 번도 플래시가 터지거나 셔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예 찍지 못했나?
타이밍을 잡지 못했던 건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급히 사과했다.
“어…… 죄송합니다. 그게, 저번에 오셨던 피아니스트께서 이 피아노는 연주에 쓰지 못한다고 해서 전 여태껏 그렇게만…….”
그는 정말 놀란 것 같았다.
예민한 연주자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소품이라 할 정도로 나쁜 피아노는 아니었다. 그건 너무 안타깝다. 난 피아노 건반을 손으로 쓸면서 말했다.
“괜찮은걸요? 조율만 조금 해 주신다면 큰 문제 없을 거예요.”
“그, 그렇습니까?”
약간 반신반의하는 것 같아서 난 조금 더 강력하게 말했다.
“제 감각은 꽤 잘 맞는 편이니 속는 셈치고 조율사를 불러 주세요. 이대로 두기엔 가엾네요.”
뭣하면 출장비나 조율비도 내가 낼 수 있었다. 그런 의지가 보였는지 세묜은 알아서 잘 해 놓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믿어도 될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놀란 게 진정되지 않는지 내 옆으로 오더니 피아노를 둘러보며 말했다.
“가까이에서 보는 건 또 처음이군요. 항상 멀리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게 제 직업인지라…… 이렇게 보니 정말 오래된 피아노인데요.”
“원래 이 방에 있었던 피아노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예상대로 이 피아노는 원래 연주를 위해 이 방과 함께 하나로 세팅된 피아노였다. 방은 피아노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고. 덕분에 적당한 습도와 온도 등이 갖춰졌으리라 생각한다.
“방이 이 피아노를 지켜 주고 있었을 거예요. 좋은 방이네요. 연주회도 자주 있었겠죠.”
아마 몇십 년? 혹은 몇백 년 전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연주회를 떠올리며 주위를 바라보았다. 오래된 유령이 갑자기 나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조금 더 연주와 촬영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약간의 긴장도 풀어 버리며 난 세묜에게 물었다.
“다시 한번 할까요? 아니면 다른 포즈가 나을까요.”
“그대로 해 주시죠. 이번엔 놓치지 않고 찍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난 고개를 까닥이고는 다시 피아노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이번에도 슈만의 어린이의 정경. 다만 마지막 13번째 곡인 시인의 이야기였다.
천천히 한 곡의 음악이 흐르고, 잠깐 멈춘 사이 고개를 들자 플래시가 터졌다. 난 피아노를 둔 프로필 촬영은 방금 그것으로 끝났음을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