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72화 (672/1,277)

##  672화

아나스타샤는 거울을 통해 헤어디자이너가 머리카락을 만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른 사람이 머리를 만질 땐 약간 긴장하게 된다. 이 결과가 잘 나올지 아닐지는 마지막으로 보고 나서야 알 수 있게 되니까.

다행히 완성된 헤어스타일은 거울로 잠깐 봐도 꽤 마음에 들었다. 포토 스튜디오에 딸려 있는 곳이라 내심 약간 걱정했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마침 똑같이 스타일링을 마친 발렌티나가 기분 좋게 웃으며 다가왔다.

“다 했어?”

“응.”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끄덕이자 발렌티나는 그런 그녀를 좌우로 요리조리 살펴 가며 보더니 무언가 자신만의 만족을 충족시켰는지 흡족하게 말했다.

“진짜 무대 올라갈 사람처럼 말아 올려놨네?”

평소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해도 괜찮겠지만, 일부러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주문했다.

“덥잖니. 앞으로 촬영도 한참 할 건데, 옷 갈아입고 머리 세팅하고 그러다가 지쳐. 난 그냥 이렇게 하려고.”

앞으로 최소 1시간 이상 촬영을 해야 할 테니 미리 생각을 해 둬야 한다.

그리고 단순히 편함만을 추구한 게 아니라, 연주자로서 프로필 촬영이라면 이런 스타일이 좋아 보이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는 종종 타티아나가 무대에 오른 모습을 보면서 목과 어깨를 드러낸 것이 단정해 보인다고 생각하곤 했다.

발렌티나는 바로 동조했다.

“듣고 보니 그렇네. 있잖아, 나도 틀어 올릴까?”

“따라 하지 마. 발렌티나.”

“뭐래?”

그녀는 눈을 흘기며 퉁명스레 내뱉었다. 아나스타샤는 순간 너야말로 타티아나를 따라 한 것 아니냐는 반박이 날아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긴장했지만, 발렌티나는 그렇게 말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대신 그녀는 주변을 휙 둘러보며 물었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아까 간 거지? 지금 이미 촬영 중일려나?”

“아마도.”

타티아나는 자신의 준비가 끝나고 나자 기다리지 않고 바로 의상을 보러 갔다. 그렇게 먼저 가 놓고 의상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비슷한 예측을 하고 있는 듯한 발렌티나는 묘한 표정으로 말없이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음…… 아무것도 아니야.”

언제부터인가 발렌티나는 아나스타샤 앞에서 타티아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곤 했다. 아나스타샤는 그녀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안다. 때문에 미안하고, 고마웠다.

발렌티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옆에 있어 주었기에 아나스타샤도 온전하게 서 있을 수 있었다. 지금은 모른 척하고 있지만…… 언젠가 진실 된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일단 아나스타샤는 그게 오늘은 아니라 생각하며 태연하게 물었다.

“그 애가 기다려 주지 않은 게 이상하니?”

“응? 어…….”

발렌티나는 애매하게 말을 얼버무렸다. 아나스타샤는 쿨하게 먼저 간 타티아나처럼 쿨하게 말했다.

“준비되는 대로 촬영하는 게 효율적이잖니. 걱정하지 마.”

“걱정 같은 건 아니야. 음, 섭섭하다는 것도 당연히 아니고…….”

여전히 무언가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는지 발렌티나는 팔짱을 낀 채 말을 조금씩 입에 담아 보면서 생각을 짜맞춰 보더니, 이윽고 이제야 알 것 같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 애, 언제 이렇게 컸지?”

“아하핫, 무슨 소리니? 발렌티나.”

“어…… 말이 이상하게 나왔네. 왜 이런 말을 했지…….”

스스로 한 말이 타티아나의 언니라도 된 마냥 들린다는 것에 발렌티나는 당황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녀의 당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타티아나는 모범생이면서 연주자로서도 뛰어났지만 정작 평범한 부분에선 빈틈이 너무나 많은 아이였다. 옆에 있던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가 불안해했던 것도 당연했다.

때문에 그 불안을 옆에서 지켜보고 도와주는 것으로 희석시켰고, 자연스레 두 사람은 타티아나를 친구면서도 동생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한참 전부터 자신이 그런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곤 자중하려 해 왔다. 발렌티나는 조금 늦게 자각했을 뿐이다.

“시간이 많이 지났잖니.”

이젠 정말 그렇게 보면 안 된다.

예전 같았으면 타티아나도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옆에서 기웃거리며 두 사람을 기다렸을 테지. 하지만 이젠 그러지 않는다. 준비가 되는 대로 먼저 촬영을 하러 가는 건 기억을 찾은 그녀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타티아나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를 듣지 못한 발렌티나는 이 일련의 변화이자 성장에 아리송해하는 것 같았지만, 상황을 아는 아나스타샤는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받아들이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모든 기억을 되찾았고, 그러니 당연한 일이다. 그 애는 본질적인 건 바뀌지 않았다고 했고, 아나스타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스스로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고 자신감도 별로 없던 그 애는 이제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제 타티아나는 무엇이든 스스로 분명히 결정할 수 있다. 아나스타샤를 맹목적으로 따르던 눈빛을 이젠 볼 수 없겠지만, 그건 바라던 바였다. 단지 가까이에 있어서 혹은 편해서란 이유는 진정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이 자리에 없는 타티아나에 대해 생각하던 아나스타샤는, 문득 발렌티나가 불안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걸 느끼곤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만 이야기하고 가자. 그 애야말로 우릴 기다리고 있겠어.”

“……알았어.”

발렌티나는 평소 말이 많지만 배려 없이 마구 궁금한 건 다 물어보는 성격이 아니었다.

말을 아끼는 발렌티나를 보며, 그녀가 은연중에 궁금해하는 타티아나의 변화에 대해 이젠 타티아나가 이야기해 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기억도 제대로 있으니 지나간 일은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

아나스타샤는 의상실을 향해 걸으며 생각했다.

작년에 타티아나가 충동적으로 기억 문제에 대해 고백하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공평하게 알리겠다는 것을 아나스타샤는 반대했다.

발렌티나라면 그래도 괜찮겠지만, 에르네스트가 타티아나의 기억이 두 살 언저리라는 걸 알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대하지 못했을 것이라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남자인 자신보단 아나스타샤가 나을 것이라 생각하고 더 많이 맡기려 했겠지. 은근히 그런 배려는 잘 하는 애니까.

다른 친구들에게 알리지 않기로 한 선택에 대해 지금에 와선 복잡한 생각이 든다. 에르네스트가 심적 부담감을 가지지 않게 된 것에 대해 잘했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차라리 모두 다 아는 상황이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에르네스트는 어색해하다가 소원해져 버렸을까?

타티아나는 굉장히 크게 상처를 받았겠지. 올해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던 그 뒤풀이가 없었을지도 몰라.

“…….”

아나스타샤는 이런 끔찍한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미웠다. 단지 생각한다는 것만으로도 타티아나를 보기가 부끄럽고 미안했다.

때문에 그녀는 더더욱 확고하게 자신의 선택을 고집했다. 후회를 한다면 그 순간 모든 게 무의미해져 버릴 것 같았기에.

그녀는 머뭇거리지 않고 복도를 걷는다.

“드레스는 이쪽에서 도와 드리겠습니다.”

의상실에 도착하자 직원들이 두 사람을 둘러쌌다. 촬영용 드레스라 여러 사람들이 도와주니 금방 입을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전신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생각과 마음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평했다.

“실제로 보니 더 괜찮네요. 마음에 들어요.”

“감사합니다.”

의상실 직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자 쪽을 가리켰다.

“가방은 저쪽에 뒀어요.”

“가방이요?”

먼저 묻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그건 왜 확인시켜 주나 싶어서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직원이 넘겨짚었다면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혹시 스마트폰이 필요하실까 해서…….”

“스마트폰은 왜…… 아, 촬영 들어가기 전에 셀피 찍을 수 있게요?”

드레스를 자주 입는 건 아니니까. 공들인 김에 한 장쯤 찍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저었다.

“전 SNS 같은 것 안 해서요.”

“안 하시나요? 아까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는 그래도 하셨는데.”

“그 애가요?”

타티아나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건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럴 때면 깜짝 놀라곤 한다. 원래 사진 찍는 걸 꽤나 꺼리는 성격이었는데, 기억이 성격까지 바꾸는 건가 싶다.

기억상실에 걸려 본 적 없는 아나스타샤는 그것도 평범한 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매사 놀라면 끝이 없다.

“오늘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나 보네요.”

“다행이죠.”

“음…… 전 됐어요. 이제 어디로 가면 되죠?”

“아, 잠시만요.”

잠시 기다리자 붉은 비즈 드레스를 입은 발렌티나도 준비를 마쳤다.

“두 분,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안내에 따라 두 사람은 직원 한 명을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1층에 있는 연회실 겸 살롱풍의 방이었다. 방 안은 지금은 스튜디오로 개조되어서 카메라 장비와 반사판 등이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선 피아노 소리가 들려와 스튜디오로 개조되기 전 방의 분위기를 물씬 자아내고 있었다.

“……잠시 후 연주가 끝나면 들어가시죠.”

“…….”

직원이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고, 아나스타샤는 그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방 안을 바라보았다.

앤틱한 디자인의 피아노 앞엔 타티아나가 앉아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허리를 펴고 곧은 자세로 건반을 연주한다. 지금 흐르는 곡은 슈만의 어린이의 정경.

마치 100년 전 과거로 돌아온 기분이 든다. 물론 그 시대를 직접 본 건 아니지만, 분명히 이런 느낌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전에 언론에서 타티아나를 건반 아래의 안내자라고 했던가?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이 광경을 보면 완벽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이 완벽한 타임머신 속에서 유독 불거지는 건 카메라 장비들과 사진작가뿐이다.

어느 순간, 사진작가가 셔터를 누르자 플래시가 팡 터지며 시간이 순식간에 돌아왔다. 하지만 분명 여기 있는 모두가 순간적으로 느낀 시대는 카메라에 담겼으리라.

카메라가 기록을 마친 뒤로는 21세기였다. 타티아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주를 끝내곤 고개를 들었다.

피아노 끝과 카메라, 세묜을 거친 그녀의 시선은 문밖에서 기다리는 두 친구에게로 향했다.

“아나스타샤! 발렌티나!”

어린애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타티아나가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선다. 방금 있었던 모든 게 마치 환상 같다.

타티아나는 겸연쩍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먼저 시작해 버렸어요.”

“응. 다 한 거야?”

“음…… 아마도요?”

그제야 그녀는 세묜을 돌아보았다. 자기 사진을 제대로 찍었는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라는 걸 이제야 떠올린 듯하다.

세묜은 깔끔하게 말했다.

“끝났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양은 피아노를 배경으론 더 이상 촬영할 게 없습니다.”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그냥 이걸로 완성되었다는 것 같은 어투다.

일반적으로 프로필에 자주 쓰는 구도는 아닐 텐데, 아나스타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세묜에게 물었다.

“피아노 연주하는 걸로 결정한 건가요?”

“예, 앞서 다른 모습들보단 연주하실 때가 가장 자연스럽고 빛나더군요. 오랜만에 정말 좋은 사진을 찍게 된 것 같습니다.”

사진작가로서 정말 만족스럽다는 듯 말하던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허락해 주신다면 제 개인전에 출품하고 싶을 정도네요.”

최고의 칭찬 같기도 하지만 그 속내는 살짝 떠보는 식의 제안이었다. 처음부터 이런 제안을 할 정도로 세묜은 욕심을 내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의 분위기를 살폈다. 그녀가 이젠 피사체로서 여겨지는 것에 관심을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약간 곤란해하는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녀 대신 이 상황을 스무스하게 넘어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저 애 아버지가 조금 엄하신 분이라. 어렵지 않을까요?”

“아,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완곡한 거절을 못 알아듣는 사람은 아니었다. 세묜은 두말 않고 물러섰다.

타티아나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아나스타샤의 귓가에 속삭였다.

“고마워요. 아나스타샤.”

“괜히 유리 아저씨한테 죄송하네.”

“아뇨, 저도 그렇게 거절하려 했어요. 아버지에게 여쭈어봐야 한다고 말이에요.”

“응? 아하하.”

아직 세묜은 타티아나의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것 같다. 타티아나도 딱히 아무 곳에서나 그런 걸 밝히는 걸 좋아하지 않고. 하지만 무언가 거절하려면 이만큼 확실한 방법도 없긴 했다.

두 사람이 비밀스럽게 웃고 있는 사이, 세묜은 카메라를 다시 세팅하고는 발렌티나에게 말했다.

“그럼 이어서 다른 분들도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하실까요?”

“저 먼저요?”

멀찍이 있던 발렌티나는 세묜의 손짓에 따라 피아노 옆에 서더니 갑자기 심각하게 고민하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안 겹치게 어떻게 하지……? 피아노 위에 올라가기라도 할까?”

그게 무슨 소리니…….

앞서 타티아나가 촬영을 마치고 나니까 뭔가 특이한 게 하고 싶어졌나 본데, 그런 건 절대 안 하는 게 나았다.

아나스타샤가 어이없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니 발렌티나가 급히 말했다.

“농담이야 농담. 그러다가 피아노 고장 나면 어떻게 해?”

“……그건 두 번째예요.”

“두 번째?”

“당연하죠. 다치시기라도 하면 큰일 나잖아요.”

타티아나는 올곧은 목소리로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 목소리엔 진심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진심을 전할 줄 알았다.

발렌티나는 당장 그녀를 끌어안고 싶은 표정을 짓더니, 장난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어, 알았어. 나도 평범하게 할게. 평범하게.”

“어떻게 하셔도 예쁘니까요…… 걱정 마세요.”

“응! 걱정 안 하려고!”

우리가 이렇게 서로를 생각하며 함께 있는 한 걱정할 일은 없을 테지. 발렌티나의 말엔 그런 믿음이 실려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이런 친구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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