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73화 (673/1,277)

##  673화

내 다음으로 발렌티나가 촬영을 마친 뒤엔 아나스타샤 차례였다.

“……분위기가 확 다르네.”

“그렇죠?”

빛 앞에 선 아나스타샤는 표정부터 확 바뀌었다. 큰 키에서부터 내려다보는 시선에 압도된다. 거기에 머리를 틀어올려 어깨가 드러나니 더더욱 세련된 느낌이 들었다.

여기 오기 전에 발렌티나가 화보 찍는 느낌으로 가자고 하긴 했지만…… 정말 그걸 실천 중인 건 아나스타샤가 아닐까 싶다. 멀리서 셔터가 찰칵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진짜 모델의 화보를 촬영하는 현장인 것 같았다.

세묜은 한참이나 말없이 자유롭게 아나스타샤가 포즈를 취하게 하며 그녀를 찍었다. 그러더니 우리 모두가 궁금해하는 부분을 물었다.

“혹시 모델 경력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아나스타샤는 단번에 부정했지만 난 사실 예전부터 살짝 의심하고 있었다. 본래 그런 걸 알리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 숨기고 있지만, 혹시 어느 잡지 같은 곳에 실린 적이 있는 것 아닐까?

“정말 없나요?”

“없어. 정말로.”

“지금부터 해 보실 생각은요?”

“너까지 왜 그러니?”

아나스타샤는 장난치지 말라는 듯 깔깔 웃으며 말했지만 난 어느 정도 진심이었다. 물론 유명해지는 데에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가 참가할 쇼팽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겠지만.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세묜은 순식간에 카메라를 정리하고는 어깨에 멨다.

“좋습니다. 다음 장소로 가 볼까요.”

세 명을 다 촬영해야 하니까 사진작가 혼자선 바쁘다. 허비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린 그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조금 더 모던하게 꾸며진 방이었다.

이미 이곳에서 어떻게 촬영해야 사진이 잘 나오는지 아는 세묜은 우리에게 어디에 가서 어떻게 서야 하는지 일러 주었다. 그 말에 따라 거기에서 우린 창문 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벽에 기대기도 하며 사진들을 찍었다.

잡지 촬영이 아니었기 때문에 복잡한 배경이나 소품을 필요로 하진 않았다.

대신 연주자 프로필에 어울릴 포즈가 중요했다. 약간 고개를 들며 먼 곳을 바라보거나, 바람이 머리를 헝크는 순간을 기다리거나.

이런 분위기가 연주자의 가치를 구성한다 생각하진 않지만 무의미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팔을 조금 자연스럽게 내려 볼래?”

“이건데?”

“전혀 안 자연스럽잖아.”

“너 그냥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거지!?”

내가 창가에서 세묜의 셔터를 받는 사이,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저편에서 자기들끼리 포즈들을 취해 보고는 지적해 주고 있었다. 거의 아나스타샤가 발렌티나를 일방적으로 잡고 있는 중이긴 했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미처 엄두도 못 낼 정도라, 세묜도 그쪽이 걱정되는지 힐끔힐끔 볼 정도였다. 혹시 싸움이라도 나면 안 되니 말이다.

난 걱정 말란 뜻으로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렇습니까?”

이미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내 눈엔 아나스타샤가 잔뜩 신경 쓰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발렌티나도 그걸 이해하기에 최대한 따라 주려 하고 있었고.

다 같이 스튜디오에 사진을 찍으러 오니 이런 것도 즐거웠다. 내가 나지막이 웃는 사이, 셔터음이 들렸다. 잠깐 방심한 표정을 찍은 것 같았다.

“저기…….”

“잘 찍혔네요. 이곳은 이쯤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찍혔는지 정말 신경 쓰인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보여 달라고 귀찮게 굴 용기가 들진 않았다.

그사이 세묜은 또 카메라를 챙겨 버리곤 일어섰다. 타이밍을 놓친 사이 우린 다음 장소로 이동하고 말았다.

그 뒤로도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촬영을 하고, 의상도 두 번 갈아입었다. 아나스타샤가 추천한 비즈니스 캐쥬얼은 일반적이진 않아도 꽤 색다른 느낌이 났다. 연주자 프로필 포트폴리오에 끼워 넣어도 괜찮을 것 같다.

촬영은 2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테마도 딱 정해져 있고 베리에이션을 추가할 것도 별로 없다 보니 사진을 찍는 것 자체는 빠르게 진행되었지만, 의상을 갈아입기도 했고 사진작가 혼자서 세 명을 여러 장소에서 촬영하는 거라 생각보다 시간이 꽤 필요했다.

난 물론이고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도 꽤나 지친 것 같았다. 나무 앞에서 촬영을 마친 아나스타샤가 세묜에게 말했다.

“꽤 많이 찍은 것 같네요.”

“이 중에서 세 장 정도는 충분히 고를 수 있을 것 같군요. 많이 지치셨을 텐데 잠깐 사무실로 돌아가죠. 사진도 확인하실 겸.”

우린 만장일치로 그 제안에 응했다.

세묜의 사무실로 돌아가자 시원한 에어컨과 차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난 의자에 앉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함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세묜은 컴퓨터에 카메라를 연결하고는 우리에게 그간 촬영한 결과물들을 보여 주었다.

“와…… 아까 거기가 이런 느낌이었어?”

전문 사진작가가 촬영해서 그런지 당장 배경부터가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예쁘게 나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안의 피사체가 된 나는 평소와 분명 달라 보였다. 스스로를 보다 객관적으로 보는 기분이다. 신문이나 뉴스에 나온 날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은 특히 그랬다. 연주하고 있을 때 나는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이런 방식으로 볼 수밖에 없으니 꽤 신기한 기분이다.

그런데 그중에서 한 장은 정말 해맑게 웃고 있기도 했다. 바로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투닥거리고 있을 때, 그걸 보고 웃다가 찍혔던 사진이었다.

이상하게 나오면 어쩌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프로필로 쓸 순 없을 것 같지만, 그냥 간직하고만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괜찮네요.”

세묜이 넘겨 주는 화면을 보면서 아나스타샤도 마음에 드는지 그렇게 말했다. 두 사람은 정말 어른스럽게 잘 나와서 정말 아무 사진이나 프로필로 올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모두가 만족해하자 세묜은 이게 끝이 아니라는 듯 다음 이야기도 꺼냈다.

“단체 사진도 신청하셨죠? 발렌티나 페트로브나.”

“예. 맞아요.”

“원하시는 장소가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

“작가님 추천은 어떤데요?”

“보통 찾으시는 분들은 무채색 배경의 스튜디오나 정원에서…….”

평범한 추천을 하려던 세묜은 잠시 말끝을 흐리더니 손가락을 세우며 말했다.

“다시 피아노를 배경으로 하는 건 어떻습니까?”

우린 서로를 돌아보았다.

피아노가 있던 방은 분명 훌륭했다. 분위기도 좋고. 그런데 오늘은 추억으로 남길 사진을 찍을 때도 피아노를 배경으로 해야 하는 걸까?

그게 당연한 건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서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가 뭐라고 말할지 기다리고 있는데, 세묜이 먼저 추가하듯 말했다.

“단순히 세 분이 피아니스트라서 추천드리는 게 아니라…… 그만큼 잘 어울리셔서 말입니다. 물론 다른 장소에서 단체 사진을 더 찍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는 정말로 우리를 그 방에서 다시 한번 찍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가 우리 의견을 물었다.

“다들 어떠니?”

“난 괜찮아.”

“저도요.”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다른 곳에서 더 찍을 수도 있고.

그렇게 우린 마지막 단체 사진 촬영을 준비했다. 이전까진 다들 각자 분위기나 개성에 맞춘 의상들이었지만, 이번엔 흰색 시스 드레스로 맞춰 입었다.

학교에서 입는 교복 말고도 이렇게 같은 옷을 입고 있으니 어쩐지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든다. 아나스타샤를 보며 괜히 웃음이 나서 미소를 짓자 그녀도 미소로 답했다.

준비를 마치고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가니 이미 세묜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잘 어울리는군요.”

“감사합니다.”

세묜은 준비된 배경과 우리를 확인하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그는 의욕적으로 우리에게 요청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양이 의자에 앉아 주시죠. 무릎 방향은 피아노를 향해서 15도 정도…… 아, 됐습니다. 좋군요.”

15도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사진작가의 눈에는 분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날 준비시킨 세묜은 다음으로 발렌티나, 그리고 아나스타샤도 순서대로 세세하게 위치와 자세를 지정해 주었다.

한 명씩 찍을 때와 달리 단체 사진은 구도가 중요했다. 때문에 이런 포즈도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라 말하는 대로 하는 쪽이 나았다.

“찍습니다.”

렌즈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자 셔터음과 플래시가 터진다.

카메라를 바라보던 세묜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아주 좋습니다. 이걸로 완벽한 것 같지만, 그래도 몇 장 더 찍겠습니다.”

몇 장이 아니라 아예 영상으로 남겨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열 장도 넘는 사진을 피아노 앞에서 찍었다. 한 명의 움직임보다 세 명의 움직임에서 변수가 더 많이 나오니 당연한 일이었다.

2시간이나 되는 촬영 시간으로 세묜도 많이 지쳤을 테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열정적으로 카메라를 챙겨 들었다. 바로 다음 장소로 이동하자는 것 같았다.

발렌티나는 피곤함을 훑어 버리려는 듯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 또 이렇게 단체 사진을 제대로 찍어 보겠어? 남는 건 사진이래.”

종종 그런 말들을 듣곤 하지만, 난 이런 시간이라면 앞으로도 꾸준히 만들고 싶었다.

“언제든 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함께 있었던 추억 등을 남긴다는 건 항상 의미 있는 일이었다. 난 이 순간에 충실하면서, 행복을 느꼈다. 두 사람도 나와 같길 바란다.

***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던 세연은 SNS에 올라온 한 사진에 집중했다.

러시아에서 사귀게 된 친구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 타티아나. 세 사람이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이었다.

「재밌겠다.」

「뭐가?」

건너편에 있던 한승우가 물었다.

두 사람은 한 테이블을 놓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몇 주 전, 한승우를 처음 한국에서 만난 뒤로 임세연은 종종 그와 만나서 연습을 하거나 음악적 담론을 두고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러시아 최고의 음악학교에서 수학한 한승우의 수준은 상당히 높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세연은 이 상황을 스터디라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가끔은 잡담도 나누곤 한다. 지금처럼.

「음…… 여기 이것 봐 봐.」

「?」

세연이 스마트폰을 보여 주자 한승우는 가만히 잠시 보더니 화면을 슥슥 밀어 올려 보곤 말했다.

「발렌티나가 올렸구나.」

「응. 다른 두 애는 SNS 안 하니까.」

평소에 연락은 자주 하는 편이니까 괜찮지만, 그래도 이렇게 사진으로 보는 것과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정말 잘 지내고 있다는 건 이 사진 한 장으로 전부 전해졌다.

한승우가 빨대를 휘적이며 말했다.

「포토 스튜디오에 간 건가?」

「아마도, 연주자 프로필 사진 찍으러? 간 김에 우정 촬영도 하고.」

「그렇겠지.」

이미 일정들을 어느 정도 꿰고 있어서 그런지 상황이 쉽게 유추된다.

즐겁겠네. 그렇게 간단히 생각하며 세연은 커피를 홀짝였다. 그런데 한승우가 불쑥 물었다.

「넌?」

「나?」

그런 건 왜 묻니? 슬프게.

세연은 이렇게 프로필 사진을 단체로 찍는 건 생각도 않고 있었다.

「난 혼자 해야지.」

「왜? 친구 없어?」

「……말이 심한 거 아니니? 나도 친구 많거든? 오전부터 너랑 이렇게 놀고 있긴 하지만.」

그렇게 말하던 세연은 순간 이게 데이트나 다름없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한승우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그런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두 사람이 친해질 수 있었던 건 타티아나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기 때문이었고, 그건 지금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녀의 피아노 실력과 인품에 반한 두 사람은 다른 음악 이야기를 하다가도 금방 타티아나를 기준으로 이야기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한승우는 세연을 같은 팬클럽 회원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세연은 콩쿠르에 나가 타티아나가 있는 무대까지 올라서고 싶었다. 물론 아직은 희망사항에 가까웠기에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려웠지만.

세연은 피식 웃고는 이어 말했다.

「우리 학교엔 피아노 전공하는 애가 별로 없거든. 내 친구들 중엔 나뿐이고.」

「일반 인문계라는 건 들었어. 그래도 사진관 가자고 할 순 있잖아.」

「……그건 그렇지만.」

듣고 보니 그 말도 옳았다. 같이 사진관 정도는 얼마든지 가자고 할 만한 친구들도 있었다. 그냥 바보처럼 말도 꺼내 보지 않고 혼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약간 자기반성을 하던 세연은 살짝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승우야, 너 은근히 딱딱한 소리 잘 하는 거 알아? 선생님처럼.」

「……그래?」

한승우는 그런 말을 듣고도 별 신경도 쓰지 않는지 가볍게 중얼거리더니, 이윽고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 애한테서 옮았나 보네.」

저렇게 웃을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가능한 거겠지.

세연은 이쯤 하면 알겠다 생각하며 남은 커피를 다 마셨다.

「슬슬 가야겠어. 레슨 시간이거든.」

「잘 가. 레슨 잘 받고.」

「오늘도 스터디 즐거웠어.」

한승우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세연 역시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카페를 나왔다.

사진에 있던 아이들은 장차 그녀의 강력한 경쟁자가 될 확률이 높았다. 지금 이 순간도 적어도 한 발자국은 넘게 앞서서 준비해 나가고 있었다.

세연도 앞으로 해야 할 것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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