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4화
서울의 8월은 숨이 막힐 정도로 덥다. 버스정류장에 앉은 세연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버스를 기다렸다. 얇게 입고 나왔는데도 더워 죽을 것 같다.
이럴 땐 아무 걱정 없이 시원한 나라로 떠나고 싶단 생각이 든다. 만약 피아니스트가 되어 여러 나라에서 연주회를 할 수 있게 된다면 그녀는 꼭 여름을 피해서 연주회 루트를 정하고 싶었다.
이런 8월에는 호주 같은 나라에 갈 수 있으면 좋겠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던 세연은 스스로가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으면서 몇 년 후 생각 같은 건 해 봐야 무의미하다.
현실적인 생각. 당장 눈앞에 닥친 그녀의 인생 중대사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보자, 보자…….」
세연은 내년에 있을 두 국제 콩쿠르 중 하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공통적으로 신청서에 포함해야 할 서류들을 확인하고 사진을 준비하는 등 하나씩 해나가면 된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심사용 DVD는 아직 시작도 하지 못했다. 어떤 콩쿠르에 참가할지 결정을 내린 후에야 본격적으로 프로그램을 짤 수 있는 것이다.
「진짜 정해야겠네.」
둘 다 참가할 만한 이유와 의욕이 있었다. 때문에 쉽게 결정하기 어려웠다.
그 부분에서 세연은 고민이 많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정말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듯 내버려 두고 있는 교수에게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이젠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세연이 만약 교수였다면 닦달을 하든가, 아니면 강력하게 추천을 해서 한 콩쿠르로 정하라 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박 교수는 늘 하던 커리큘럼대로 세연을 지도하면서 콩쿠르 이야기는 세연이 꺼낼 때만 받아 주곤 했다.
그렇다고 교수가 그녀를 방임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정말 신경 쓰지 않는 것이라면 일주일에 세네 번씩 레슨을 봐 준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심지어 레슨비도 받지 않으면서.
「…….」
이 미묘한 균형감각을 세연은 지난 2년간 교수를 사사하면서 잘 알고 있었다.
교수는 늘 이런 방식이었다. 열정적이면서도 엄하고 냉정하게 피아노를 가르치지만, 성과주의에서 최대한 벗어나려고 하는 모습이 있다.
당장 콩쿠르도 내년에 무조건 참가할 필요는 없으니, 뭣하면 아예 그냥 넘기라고 할 정도였다.
가끔, 세연은 위화감을 느끼기도 했다.
박 교수는 마치 세연이 쉽게 깨져 버릴 유리컵이라도 되는 것처럼 대할 때가 있었다.
그런 마음에 세연은 기쁘다가도, 오기가 생기기도 했다.
「잘 선택해야지.」
세연은 교수가 무엇을 바라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피아노에 향해 있는 게 맞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루어 주고 싶었다. 세연의 동기와 의욕은 상당부분 교수에게서 비롯되고 있었다.
그 마음으로 지금까지 2년간 최선을 다 해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내년은 3년째의 결과를 세상으로부터 평가받을 차례였다.
어느 평가대에 서는 게 좋을까. 세연은 곰곰이 생각하며 버스를 기다린다.
「왔다.」
교수의 아파트로 가는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 계단을 올라 카드를 찍고, 빈자리에 가서 앉는다. 버스 안은 에어컨이 틀어져 있어서 그사이에 살짝 난 땀을 식혀 주었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버스는 금방 세연이 멈춰야 할 정류장에 도착했다. 다시 저 땡볕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득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버스에 앉아서 배회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세연은 얼른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으아…….」
발을 디딘 보도블록 사이사이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 같다. 늘어지는 비명을 내뱉으며 세연은 불타 죽지 않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조금이라도 빨리 아파트로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세연은 마트에 들러 음료수 등 선물거리를 사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매번 준비해 가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일주일에 한 두 번은 반드시 엄마가 들려 준 선물을 가지고 가거나, 아니면 스스로 사 갔다.
교수는 레슨비는 물론이고 이런 것도 가져올 필요 없다며 몇 번이나 만류했지만, 그럼 세연은 정말 빈손으로 교수의 레슨을 받으러 가야 한다. 그녀에게 그 정도 용기는 없었다. 뻔뻔한 일이기도 하고.
때문에 오늘도 세연은 마트를 두리번거렸다.
시원한 마트 안에서 한참을 돌아다니던 그녀는 도중에 멈춰 섰다.
「요걸로 할까.」
저번엔 두유도 좋아하셨는데, 이번엔 견과류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일단 건강에 좋다고 하니까.
그렇게 막 손을 뻗어 선물을 골랐을 때였다.
「아야!」
「앗! 손님! 괜찮으세요!?」
롤테이너를 끌고 상품을 운반하던 직원이 세연을 예상하지 못하고 그만 그녀와 부딪치고 말았다.
팔부터 롤테이너에 부딪친 세연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넘어졌다. 직원이 당황해하며 허겁지겁 세연을 부축했다.
「괜찮으신가요? 일으켜 드릴…….」
「아야…….」
팔을 잡힌 세연은 신음을 내며 눈을 찡그렸다. 뭔가에 치이면서 어떻게 된 것 같긴 한데, 너무 아팠다.
정신 못 차리는 사이 세연보다 더 놀란 직원이 말했다.
「피, 피나시는데요!?」
그제야 팔을 내려다 본 세연은 피가 묻어나는 팔을 보며 기겁했다.
어릴 땐 뛰다가 다쳐서 피를 본 적이 종종 있었지만, 나이를 어느 정도 먹고 나선 정말 오랜만이었다. 뭔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무슨 일이냐며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주변은 점점 더 소란스러워져 갔다. 직원은 그에 질세라 더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크게 다치셨는데, 어쩌지, 잠시만요…… 저기요! 여기 좀 도와주세요!」
「괜찮아요…….」
직원이 무슨 비상 환자라도 발생한 것처럼 난리를 치니까 이상하게도 세연은 되레 냉정해졌다.
안 그래도 넘어져서 창피하고, 엉덩이도 아프고, 팔에선 피도 나니까 정신이 없는데…… 직원이 이렇게 마구 걱정을 해 대고 사람들도 몰려들다 보니까 그냥 조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직원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어떻게 괜찮아요? 피가 나시는데.」
그래도 혹시나 정말 크게 다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손가락을 살짝 움직여 보긴 했다.
손은 전혀 문제없이 잘 움직여 주었다. 피가 나는 팔만 땡기면서 아픈 느낌이 조금 있다. 저기 보이는 철제 경첩에 쭉 긁힌 것 같았다. 꿰매야 할 정도로 피부가 찢어진 것도 아니었다.
피아니스트로서 팔을 다치는 일은 정말 극도로 경계해야 할 일이었지만, 이미 벌어졌다면 크게 안 다쳤다는 데에 감사해야 했다. 세연은 그 정도로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긁힌 것 같아요.」
그래도 주변은 시끌시끌하다. 세연이 그냥 나가 버릴까 생각할 즈음, 누군가 인파를 뚫고 세연의 앞에 섰다.
「무슨 일입니까?」
「여기…… 손님이 롤테이너에 부딪히셨는데 피가…….」
「이런.」
다른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는 크게 당황해하지 않고 적절히 해야 할 일들을 이야기 해 주었다.
「일단 응급처치부터 하고…… 제가 병원까지 모셔다 드리죠.」
사건사고나 클레임 등을 처리해 주는 사람인 것 같았는데 꽤 믿음직스러웠다. 세연은 딱히 이 일에 대해 크게 걸고넘어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치료만 잘 받으면 상관없었다.
그런데 지금 당장 받기는 좀 곤란했다.
「저 바로 가 봐야 할 곳이 있어서 병원은 좀…….」
「그래도 가 보셔야죠. 손님이 다쳤을 때 저희 절차이기도 하고요.」
「그냥 응급처치만 해 주시면 안 돼요? 병원엔 이따가 갈게요.」
남자는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길게 이야기하는 건 그리 좋지 않으리란 걸 생각했는지 세연을 똑바로 일으켜 주며 말했다.
「서는 건 괜찮으신가요?」
「네. 괜찮아요.」
「……일단 이쪽으로 오시죠.」
세연과 직원이 일어나자 몰려들어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자리를 떠났다. 그리 심각한 일이 아니니 마트 측에서 잘 해결하리라 본 듯했다.
잠시 후, 마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각자 볼일로 바쁜 사람들로 북적거리게 되었다.
그리고 세연은 직원과 함께 사무실처럼 생긴 방으로 들어섰다.
직원은 방 안에 있던 캐비닛에서 구급상자를 꺼내더니 몇몇 약품들을 꺼냈다. 세연은 그사이 상처를 이리저리 보면서 시간을 생각하고 있었다.
소독약이 먼저 상처 위로 부어졌다. 세연은 따끔거리는 팔을 위로 보이게 잡으며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앗 따가.」
「잠시만 참아 주세요.」
직원은 진지하게 상처를 씻어내면서 살피는 듯했다. 심각하다면 세연이 뭐라고 하든 무조건 병원으로 데리고 가기라도 할 기세다.
하지만 정말 롤테이너의 철제 경첩에 긁힌 찰과상이 전부였다. 피가 나서 놀라긴 했지만 한 번 씻어내고 나니 그렇게 많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조금 익숙해진 세연은 헤죽 웃으며 직원을 바라보았다.
「좀 괜찮아졌어요.」
「후…… 이게 무슨 일인지. 정말 죄송합니다. 번잡할 땐 그래서 조심히 움직이도록 그렇게 교육을 하는데…….」
세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도 부주의했어요.」
「그래도 이건 저희 잘못입니다. 흉터 남으시면 큰일인데…….」
「…….」
그건 좀 걱정이다.
이 정도의 상처야 시간이 지나면 낫겠지만, 흉터가 계속 남는다면 앞으로도 계속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게 된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고, 긴 팔을 입으면 보이지도 않을 테지. 하지만 세연은 피아니스트를 꿈꾸고 있었다. 소매가 없는 드레스를 입는 건 당연한 일이고 사람들의 시선은 팔에 자주 향할 것이 분명했다.
세연은 이 정도 요구는 해도 괜찮겠지 싶어 직원에게 말했다.
「흉터 안 남는 밴드 있나요? 있으면 그걸로 해 주세요. 비싸겠지만.」
「있긴 합니다.」
직원은 세연이 말하는 대로 팔에 치료를 마저 해 주었다.
사실 소독만 해서 내버려 둬도 나을 만한 상처에 이 정도 치료라면 이미 충분했다. 그런데도 직원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정말 병원 바로 안 가 보셔도 되겠습니까?」
「가 봤자 이렇게 해 줄 것 같은데요.」
「그래도 절차라는 게…….」
「정말 빠지면 안 될 일이라서요.」
2년 동안 어마어마한 회수의 레슨을 받으면서 세연은 단 한 번도 시간을 미룬 적이 없었다. 교수 측에선 가끔 여러 바쁜 일로 미뤄지기도 했지만, 세연에겐 레슨보다 중요한 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이 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병원에 가면 조금 더 좋은 약을 써 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응급처치도 잘 된 것 같은데 병원에 간다며 시간을 미루고 싶지 않았다. 괜히 걱정만 더 하시게 될 것 같고.
차라리 지금 밴드를 붙인 이 정도로 그냥 가서 별것 아니라고 보여 주는 편이 훨씬 나았다.
어쩌면 다쳤는데도 말짱하게 레슨 받으러 왔다고 씩씩하게 말하면 기특하게 생각해 주시지 않을까? 세연은 조금 호기로운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세연을 본 직원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피해자가 이렇게 괜찮다는데 억지로 끌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명함 받으시고.」
「네.」
「병원 꼭 가셔서 진료 받으시고, 그 상처뿐만 아니라 넘어지시면서 다친 부위가 있다면 그것도 꼭 치료받으세요. 그리고 거기에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 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할게요.」
세연이 계속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직원은 못미덥다는 듯 덧붙였다.
「꼭 전화 주시…… 아니지, 제게도 전화번호 주시죠.」
「예……?」
「저녁에 확인 전화 드리겠습니다.」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있어요?
세연은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직원이 워낙에 강경해서 어쩔 수 없이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고 말았다. 이래서야 저녁에 전화로 땡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병원 영수증 찍어 보내 달라 하는 거 아니야?
어쨌든 이런 마음씀씀이는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이쯤 되면 고마움을 느낄 정도였다. 세연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잘 해 주셔서.」
「피해를 보신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됩니다……. 아무튼,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이거 계산은요?」
「……그냥 가세요.」
「아니 그래도…….」
떨어뜨렸던 견과류 선물은 어쩌다 보니 그냥 들고 왔는데, 직원은 마트 쪽으로 나가는 문이 아니라 바로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 주었다. 세연은 돈을 내고 싶었지만 도저히 받을 것 같지가 않다.
이것도 무슨 위자료의 일종인가……?
세연은 꾸벅 인사하며 밖으로 나왔다. 다시 뜨거운 햇살이 내리쳤다.
「…….」
옆을 잘 안 보다가 마트에서 다치기나 하고, 칠칠치 못하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뭔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돈을 안 내서 그런가 이득 본 기분마저 들었다.
나 좀 단순한가……?
찰과상에도 죽겠다고 엄살을 피웠어야 영리한 건가? 잘 모르겠다. 그냥 흉터만 안 남았으면 좋겠다.
세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일단 아파트 단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깨끗한 단지 내 도로를 따라 조금만 걸으면 교수의 아파트는 금방이었다.
이제 이 더위에서 벗어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세연은 조금 더 발걸음을 빨리 했다.
그런데 바로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기 직전, 낯익은 한 남자와 세연은 마주쳤다.
「종혁 오빠?」
「세연아.」
그는 박 교수의 또 한 명의 제자인 김종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