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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675화 (675/1,277)

##  675화

세연은 사실 김종혁이 뭐 하는 사람인지 아직도 잘 모른다.

처음 봤을 땐 박 교수의 제자라는 걸 알고는 친하게 지내려 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미 그 시점에서 김종혁은 피아노를 그만둔 지 꽤 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종종 박 교수를 보러 이 아파트에 오곤 했다. 피아노를 그만뒀으면 사제의 연도 뚝 끊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 크게 문제될 건 없었지만, 세연은 어딘지 모르게 종혁이 약간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세연보다 종혁이 더 그녀를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이젠 인사는 그럭저럭 받아 주긴 하지만 같이 이야기를 하거나 사적인 대화 같은 건 일절 나눠 본 적이 없다.

옛 교수를 여전히 스승으로 여긴다면 지금 제자인 세연에게 잘 대해 줄 만도 한데, 김종혁은 너무 멀게 그녀를 대했다. 하지만 그 태도는 단지 건조할 뿐, 냉정하진 못했다.

종종 느껴지는 회한과 연민의 시선에서 무거운 감정을 느낀다. 세연은 기묘한 기시감 등을 느꼈지만, 어떤 이유로 그런 시선을 보내는지 그에게 묻지 못했다. 대신 오늘도 반갑게 인사할 뿐이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응, 그래. 오랜만이네. 오늘도 레슨 받으러 온 거야?」

「네.」

「열심히네.」

세연이 2년 가까이 밝게 대해 준 보람이 있었다. 종혁도 옅은 미소를 보이며 그녀의 인사를 받고는 아파트 입구 쪽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교수님 안에 계셔. 빨리 가라고 하시던데, 네가 올 시간이라서 그런 거였나 봐.」

「이야기 더 하셔도 괜찮은데.」

「음…… 아냐.」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진 모르겠지만, 종혁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아직도 세연은 영문을 모를 뿐이다. 교수와 사이가 좋다면 고민을 할 필요가 없고, 사이가 나쁘다면 볼 필요가 없을 텐데.

박 교수와 종혁의 관계는 세연으로선 이해하기 어려웠다.

궁금하긴 하지만 파고들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세연은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종혁도 어린 그녀가 배려해 준다는 것에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를 뜨려 했다.

「아무튼 레슨 잘 받고…… 그건 선물이야?」

「네. 견과류요.」

「나도 오늘 그거 사왔는데.」

「익.」

세연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리자 종혁은 크게 웃었다. 그러더니 세연이 들고 있는 선물에 대해 더 이야기를 이어서 하려다가, 멈칫했다.

한층 밝아져 있던 그의 목소리의 온도가 뚝 떨어졌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종혁이 물었다.

「잠깐만…… 팔 뭐야? 왜 그래?」

세연은 아차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팔을 흐느적거리며 보여 주었다.

「아, 이거요. 아까 마트에서 살짝 다쳐서…….」

「뭐?」

최대한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종혁은 당혹스러워하며 성큼 다가왔다. 세연은 갑자기 덜컥 무서워졌다.

「어떻게 팔을 다쳐?」

피아니스트가 몸 관리를 똑바로 안 하고 다치고 다니는 건 혼나야 할 일이긴 한데, 종혁이 이렇게 급격하게 태도를 바꿀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세연은 다시 한 번 웃으며 넘길까 했지만, 워낙 심각한 눈빛이라서 그렇게 했다간 진짜 크게 혼날 것 같았다.

「그게요…….」

그녀는 머뭇거리면서 방금 전 마트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팔을 뻗은 사이에 직원이 끄는 롤테이너에 부딪쳤고, 철제 경첩에 팔이 긁히면서 피가 조금 났다는 설명을 다 들은 종혁은 그럼에도 심각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이쯤하면 제대로 설명한 것 같은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오빠?」

「아, 아무것도 아냐. 괜찮은 거지?」

까딱없다는 뜻으로 다시 세연은 팔을 흔들어 보였다. 근데 그때마다 종혁의 눈빛이 불안하게 흠칫거리는 게 느껴졌다. 뭔가 계속 잘못하고 있는 기분.

세연은 팔을 멈추며 말했다.

「네. 그냥 응급처치 정도 받았는데 벌써 안 아파요.」

「병원 안 갔어?」

「그럴 것까진…….」

「병원을 왜 안 가!」

결국 한 소리 듣고 말았다. 세연이 움찔하자 종혁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낸 것에 대해 스스로도 놀랐는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조용히 사과했다.

「미안, 음…….」

그리고 그는 두어 걸음 물러섰다. 세연이 무서워한다는 걸 느낀 것 같았다.

세연은 솔직히 빨리 아파트로 올라가고 싶었다. 예전부터 김종혁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를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길을 비켜 주지 않을 것처럼 아파트 입구에서 서성이며 무언가 계속 생각했다. 세연은 말도 걸지 못하고 어색하게 서 있었다.

이윽고, 그가 물었다.

「오늘 레슨 중요한 거야?」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박 교수쯤 되는 사람에게 받는 레슨이 중요하지 않을 리가 있나?

물론 때에 따라서 중요한 곡을 테스트하는 날도 있고, 그렇지 않고 그냥 테크닉 연습만 하면서 놀다 가는 날이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늘 중요한 날이었다. 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중요하죠……?」

「미안한데, 오늘 레슨은 일단 취소하자.」

「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세연이 크게 눈을 떴다.

왜? 겨우 이거 다쳤다고?

어이가 없어진 그녀가 따져 물었다.

「왜요? 저 피아노 칠 수 있어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교수님에게 보여 드리지 마.」

「이게 오늘 안 보여 드린다고 안 들킬 일이에요? 이미 다쳤는데.」

「모르겠고, 일단 따라와.」

억지로 이런 억지가 없었다. 세연이 꿋꿋이 고개를 치켜들고 올려다보자, 종혁은 그녀가 뒤돌지 않으면 꼼짝도 하지 않겠다는 듯 가로막고 서 있었다.

솔직히 화가 나기도 하고,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유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연은 비키라고 말하지 못했다.

「무턱대고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뭔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되는 것이 있어서 이런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세연도 조금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

세연이 어리다고 해서 이렇게 막 하면 안 된다. 종혁에게도 그 정도 상식적인 생각은 든 것 같았다. 심지어 이건 어디 놀러 가려는 걸 막는 것도 아니고 세연이 제일 중요시하는 레슨을 막는 일이다.

하지만 종혁은 바로 설명해 주지 못하고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스마트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는 다시 그녀에게 부탁했다.

「여태 널 피한 내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오늘 한 번만 들어주라.」

그래도 조금은 솔직해진 목소리였다.

세연은 그가 자신을 조금 피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들으니 차라리 기분이 나아짐을 느꼈다.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에다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무시할 수도 없었다. 세연은 어쩔 수 없이 종혁의 말에 따라 주기로 했다. 영 이상한 소리를 하면 도망치면 될 일이다.

「알았어요. 그래도 전화는 드려야죠.」

「……내가 할게.」

세연이 생각하기에도 갑자기 레슨을 미루는 것에 대해 조리 있게 핑계를 대는 건 종혁이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종혁이 스마트폰을 들었다.

「아, 교수님.」

금방 전화를 연결한 그는 빠르게 생각해낸 핑계를 말했다.

「밖에서 세연이랑 만나서. 오늘 레슨은 제가 대신 해도 되겠습니까?」

그런데 핑계가 너무 허술했다. 애초에 종혁은 피아노를 그만둔 지도 꽤 된 사람으로 아는데, 어떻게 교수 대신 레슨을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세연이 어이없다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전화 너머에서도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종혁은 픽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냐고요? 제가 그런 게 어디 하루이틀입니까? 그냥 갑자기 오늘은 세연이랑 놀고 싶어져서요.」

어딘가 건성건성 하려는 걸 가장하는 듯한 목소리와 표정.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가볍게 하려고 하지만 그걸 지켜보는 세연은 가볍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안 됩니까?」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로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종혁이 스마트폰을 쥔 채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진짜로 아파트 앞에서 만나선 갑자기 데려가겠다는 말로 허락을 받아내 버렸다. 세연은 약간 황당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감탄했다.

세연에겐 늘 자상하지만 박 교수는 그리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설득했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그 대단한 일을 해 놓고도 종혁은 전화를 끊자마자 세연에게 말했다.

「됐어. 가자. 일단 병원으로.」

「…….」

다친 게 걱정된다는 게 이토록 진심이라는 건 세연을 하여금 미안한 감정이 들게 만들었다.

***

세연을 차에 태운 종혁은 근처에 있는 외과병원으로 향했다.

순식간에 예약을 하고는 바로 진료실로 들어갔다. 세연은 뭔가 할 필요도 없었다. 모든 걸 종혁이 알아서 다 해 주었다.

「흠.」

그렇게 진료실에 들어서게 된 세연은 의사의 표정을 보자마자 상황이 전혀 심각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진지하던 종혁을 생각하니 갑자기 양심이 아프다. 차라리 제대로 다쳤으면 덜 미안했을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세연은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도 괜히 죄 지은 사람처럼 약간 움츠러들었다.

의사가 그녀의 팔을 놓으며 말했다.

「단순 찰과상입니다. 크게 다치진 않았군요.」

그 말에 종혁의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으로 확인하겠다는 듯 물었다.

「이 애, 피아니스트입니다. 큰 문제 없는 거죠?」

순간적으로 의사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세연은 창피함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그냥 찰과상이라잖아요!

그러나 종혁은 험악하게 의사를 노려보았다. 정말 장난 칠 분위기가 아니었다. 의사가 사과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동생분이 걱정되시는 건 알겠지만…… 찰과상 정도로 손에 문제가 생기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걱정 마시죠.」

「…….」

「흉터가 약하게 남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저희 피부과 레이저 시술로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와,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네. 그나저나 레이저는 팔이 아니라 얼굴에 있는 점에 하고 싶은데. 세연은 막연히 그런 생각을 하며 종혁을 돌아보았다.

「거봐요. 괜찮죠?」

「……그렇네.」

진심으로 안도하는 그 표정은 세연의 가슴에 콱 틀어박혔다.

아까 다쳤을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낙천적으로 행동했던 세연도 지금은 갑자기 슬퍼졌다.

그렇게 병원에 들어선지 10분도 안 되어서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밖은 너무 더워서 나오자마자 바로 차에 올라탔다.

종혁은 에어컨을 켜면서 말했다.

「갑자기 끌고 와서 미안해. 집에 데려다줄게. 어디 살지?」

맨날 버스를 타고 다니는 세연은 이렇게 누군가가 자가용으로 데려다준다는 게 조금 어색했다. 하지만 지금 살짝 화가 난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책임감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어?」

진짜 병원에 데려와선 진료받고 바로 돌려보낼 거라 예상은 어느 정도 했지만, 이렇게 은근슬쩍 넘어가려 하는 걸 보니 가만히 있기 싫었다. 내가 무슨 진짜 유리컵 같은 건 줄 알아?

난 피아니스트라고.

세연은 당황해하는 종혁에게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제 레슨 봐 주신다면서요.」

종혁은 난처하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그건 그냥 교수님한테 한 핑계야. 알다시피 난 피아노 놓은 지 한참 돼서…….」

「오빠는 넘어간다 쳐요. 그럼 저는요? 교수님이 저번에 뭘 배웠냐며 물어보면 뭐라고 해요?」

피해를 준 마트 직원에게도 따지지 않았던 세연이었지만 이번엔 종혁에겐 확실하게 따졌다.

그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세연은 귀중한 레슨을 미루고 쫄래쫄래 따라간 바보가 되기 싫었다. 뭔가 하나라도 가르쳐 주든가, 아니면 알려 주는 게 있어야 이렇게 따라나온 세연에게도 보상이 된다.

종혁은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결국 항복한다는 뜻이었다.

「요즘 무슨 곡 하는데?」

「쇼팽의 뱃노래요.」

「…….」

뱃노래는 상당한 난곡이다. 세연이 그 곡을 연주한다는 것에 종혁은 새삼 새롭게 본 듯한 눈빛이다.

2년이나 봤으면서 세연이 어느 정도로 피아노를 치는지도 잘 모르는 것이다.

그 사실이 미안한지, 종혁은 다시 핸들을 잡으며 말했다.

「알았어. 연습실 하나 빌리자.」

솔직히 세연은 조금 더 따지고 싸워야 하는 게 아닌가 했는데, 예상외로 종혁이 빠르게 받아들여서 약간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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