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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676화 (676/1,277)

##  676화

두 사람은 근처에 있는 연습실로 향했다.

세연은 솔직히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차를 타고 여기저기 쏘다니는 게 굉장히 묘한 기분이었지만, 뭔가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모험을 떠나게 되는 것 같은 기분도 느꼈다.

「여기 괜찮아.」

자연스럽게 연습실로 들어선 종혁은 듀엣 연습실 하나를 2시간 대여했다. 레슨용으로 쓰는 연습실은 없기 때문에 피아노 두 대가 필요하면 듀엣 연습실을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저것도 꽤 비싼데. 하지만 세연은 돈을 보태겠단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방음처리가 된 연습실에 들어섰다.

「…….」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같은 스승을 두긴 했지만 그리 친하게 지낸 적도 없고 오다가다 몇 번 본 게 다인 사이였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 보니 이렇게 듀엣 연습실에 같이 앉아있게 되었다.

종혁은 상황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이제 와서 머리를 짚으며 골치 아프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에 세연은 더 화가 났다. 그녀가 건반덮개를 툭툭 쳤다.

「어떻게 해요? 바로 해요?」

한숨을 쉬며 종혁이 고개를 끄덕였고, 세연은 바로 건반덮개를 열고는 똑똑히 보라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크게 건반을 짚어 조용한 연습실 안에 파문을 일으키고, 그 파동에 음악을 싣고 흔들거린다.

쇼팽의 뱃노래.

세연은 꽤 오래전부터 이 곡을 연습했었다. 쇼팽을 연구하는 피아니스트라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곡 중 하나이기도 하고, 후기 곡이니만큼 난이도도 상당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곡이 지닌 리듬감 자체가 세연은 마음에 들었다.

살짝 뱃머리를 앞으로 하거나, 옆으로 흔든다. 손가락으로 노를 젓는 기분은 직접 해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다.

그리고 세연은 이 리듬의 일부를 작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타티아나가 연주하는 뱃노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녀의 연주는 아주 정갈하고 아카데믹했다. 그야말로 러시아 최고의 학교에서 최고의 기술과 해석들만 받아들여 예술로 승화시켜 낸 것 같은 느낌.

하지만 다만 그것뿐이었다면 로봇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 근간을 이루는 리듬감은 타티아나라는 피아니스트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세연은 단 한 번 들었던 그 연주의 전부를 레퍼런스로 할 순 없었지만, 좋다고 여겼던 몇 부분 정도는 충분히 자신의 연주에도 녹여낼 수 있었다.

그렇게 1년이 넘게 연습한 세연의 뱃노래는, 상당히 높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다.

「…….」

옆 피아노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종혁은 연주가 끝나고 나니 똑바로 앉아 경청하고 있었다.

세연은 어떻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고, 곧 박수 소리가 들렸다.

「훌륭했어.」

진심이 가득 담긴 칭찬이었다. 그리고 사과가 이어진다.

「그간 한 번쯤은 들어 볼 걸 그랬네. 미안해.」

세연은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정말 왜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피아노는 왜 그만뒀어요? 이제야 미안하다는 건,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긴 했다는 거죠?

정말 여러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었지만 미처 입을 열기 전에 종혁이 자세를 돌려 앉았다. 그리고 그는 악보도 없이 정확하게 건반을 짚었다.

「어!?」

세연은 당황했다. 정말 피아노를 쉬고 있었던 사람이 맞나?

피아노를 계속 하는 사람이라도 갑자기 무작위 곡을 마주하면 바로 연주하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다. 자기 레퍼토리에 넣고 있다 하더라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종혁은 깜짝 놀랄 정도로 깔끔하게 이 난곡을 연주했다. 얼마나 깊이 있는 연구가 함축되어 있는진 딱 한 소절만 들어도 절절하게 느껴졌다.

역시 박 교수의 제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피아노를 그만두기 전엔 정말 굉장한 실력자였을 테지.

그렇다면 더더욱 의문이 인다. 그만한 실력자였다면 대체 왜?

종혁이 숨기는 게 많은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이상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만큼은, 지금 이 시간부로 말끔하게 날아갔다.

이런 피아노를 연주할 줄 아는데도 그만두었다면 세연이 상상도 못 할 사연이 있음이 분명했다.

놀람과 감탄으로 연주를 지켜보고 있는데, 종혁은 굳이 완주하지 않고 딱 한 소절만 연주를 마치곤 손을 놓았다.

「이 프레이즈만 유독 리듬이 독특한데. 이유가 있어?」

수준 높은 연주만큼이나 그 질문도 정말 날카로웠다. 그가 물어본 부분은 세연이 타티아나의 흐름에서 영향을 받았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세연이 구사하는 음악적 어법이 여전히 하나로 되어 있지 않고 듬성듬성 다르다는 걸 바로 눈치챈 것이다.

「좋은 해석인 것 같아서요.」

마음 같아선 정말 좋지 않냐며 박수를 치며 맞장구 쳐 주길 바라고 싶은데, 이것도 엄연히 레슨 시간이라면 그런 식으로 종혁을 대해선 안 된다.

종혁은 무언가 깊게 생각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서 들은 해석인데?」

「작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콩쿠르에 나갔을 때요.」

「작년?」

「네.」

작년이란 말에 종혁이 보이던 흥미가 급격하게 사라졌다. 그는 픽 웃더니 피아노 건반을 때렸다.

「좋은 해석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건 좋다고 생각해. 하지만 기존 자기 음악과 매끄럽게 붙이지 못하면 티가 나. 티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 프레이즈 바로 다음에 조성이 바뀌지? 거기만 살짝 바꾸면서 속여 보자.」

그리고 종혁은 다시 피아노를 잡았다.

박 교수의 레슨이었다면 충분히 소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음악으로 화하는 방법을 원했겠지만, 종혁은 살짝 어색한 부분 정도는 어떻게 하면 감쪽같이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보다 분석적으로 악보를 보고 숨 돌리는 타이밍을 체크한 뒤 교묘하게 이어 붙인다. 솔직히 말해 당장 실용적으로 필요한 건 종혁이 가르쳐 주는 노하우 쪽이었다.

「악보 연구를 열심히 하면 더 잘 할 수 있게 될 거야.」

종혁은 그렇게 말하곤 간만이라는 듯 피아노로 스케일 연습을 했다.

조성을 바꾸다가 삐걱이는 걸 보면 정말 오랜만인 것 같긴 하다. 그럼에도 저 정도라니……. 세연은 무언가 할 생각도 못하고 종혁의 연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몇 번 정도 연습을 하던 종혁은 지금 자신이 이렇게 피아노를 칠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손을 멈추고 세연을 돌아보았다.

세연은 지금 다른 곡을 연주하면 종혁이 성심성의껏 또 봐 주리란 것을 깨달았다. 같은 스승을 두고 있어서 그런지 뭔가 이해하기도 쉽고 좋았다.

그런데 순간, 지금이라면 다른 질문을 해도 답해 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연은 그 충동을 무시하려다가, 한 번만 말해 보기로 했다.

「저기, 종혁 오빠.」

「응.」

「오늘 왜 제가 교수님에게 레슨 받으면 안 되었던 거예요?」

음악을 가르쳐 주면서 약간 친해졌나 싶었던 종혁의 표정이 다시 가면을 쓴 것처럼 굳었다. 세연은 오늘 이후로 다신 이런 질문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자신의 팔을 슬쩍 들어 올렸다.

오늘 다친 건 맞지만 그녀는 방금 연주를 아무 문제없이 해낼 수 있었다. 아마 교수에게 레슨을 받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정도 다치는 건 누구나 그럴 수 있잖아요.」

「……그렇지. 나도 알아.」

「그런데 오빠도 놀랐던 것 같고.」

종혁은 필요 이상으로 과잉반응했다. 세연이 당혹감을 느낄 만큼 그 반응은 진지하고 격렬했다. 솔직히 우리 아빠도 그 정도는 아니었을걸?

종혁이 세연을 굉장히 귀여워해서 그랬으리란 가정은 일찌감치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럴 확률은 전혀 없었다. 굳이 이유가 있다면 외부에, 세연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있을 것 같았다.

「예전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2년간 교수와 종혁을 보며 어렴풋이 상황을 느껴 온 세연이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종혁은 건조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거짓말이잖아요.」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거야. 넌 아직 너무 어리잖아.」

「솔직히 몇 살 차이 난다고.」

「…….」

황당하다는 시선에 세연은 살짝 당황했다. 아직 어색한 사이인데 말을 너무 막 했나?

저 오빠 몇 살이랬더라……? 따져보면 7살 차이인가? 그걸 가지고 얼마 차이 안 난다고 하긴 어려웠다. 세연은 말실수를 한 건가 싶어 눈을 피했다.

하지만 종혁은 세연의 말에 생각이 조금 바뀐 듯했다. 분명 열여섯 살 정도면 너무 어리다고 아무것도 말해 주지 못할 나이는 아니었다.

한참이나 고민하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전에 내가 피아노 했을 때…… 동기가 하나 있었거든.」

천천히 말하는 옛 이야기는 무겁게 이야기하기엔 시간이 오래 지났고 편하게 말하기엔 최근인, 그런 시기에 걸쳐 있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세연은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진짜 잘하는…… 나보다 훨씬 잘하는 녀석이었는데, 나 대신 사고로 팔을 다쳤어.」

사실 그간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이야기였다. 그런 일이 있었을 것 같았다.

세연은 조심스레 물었다.

「피아노 못 치게 되실 정도로요……?」

「응.」

「안타깝네요…….」

그러한 사건이 과거에 있었기 때문에 종혁은 다치는 일에 예민해졌고, 교수 역시 마찬가지일 테니 오늘은 가지 말라고 막아섰던 것이다.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도 너무 신경 쓰는 것 아니냐고 할 순 없었다.

왜냐면 그 사건 때문에 종혁도 피아노를 그만두었을 것 같단 직감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말실수를 한다면 세연은 종혁에게 크나큰 잘못을 하게 될 것 같았다.

세연은 조용히 팔을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가벼운 찰과상이었지만 만약 정말 크게 다쳤다면? 순간 소름이 끼쳤다. 세연도 남 이야기로만 들을 게 아니었다.

잠시 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으로 침묵했다.

피아노 연습실은 방음처리가 되어 있어서 소리를 내지 않으면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모든 공기를 잡아 내리누른다. 그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세연이 먼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분도 지금은 은퇴하고 다른 거 배우시는 거예요? 오빠처럼?」

「어? 어, 맞아.」

「뭐 하시는데요?」

「글쎄…… 뭐 하더라? 지금은 다른 데 가 있어서…….」

약간 말을 얼버무리며 종혁이 눈을 피했다. 거짓의 냄새를 느낀다.

하지만 잠시 후, 종혁은 확신에 찬 눈으로 세연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음악 관련된 일 하고 있을 거야.」

거기엔 굉장한 믿음이 깃들어 있었다.

연락도 잘 안 되는 것 같지만, 보지 않아도 안다는 듯. 그는 분명히 말했다.

「신이 있다면 그만한 음악가를 가만둘 리 없을 테니까.」

세연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종혁의 믿음은 밝고 단단하지 않았다. 어두운 진흙과도 같다. 마치 그렇지 않으면 말이 안 된다는 듯. 그는 그런 믿음을 어디론가로 투사했다.

7살 차이는 생각보다 클지도 모르겠다. 세연은 더 깊이 파고들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말했다.

「교수님 앞에선 조심해야겠네요…….」

「그래, 조심해 줘. 부탁할게.」

교수도 종종 우울한 모습을 보일 때면 세연은 그 옆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당황하곤 했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교수 앞에서 말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교수님도 독한 분이라서 지금 그렇게 계실 수 있는 거지…….」

입을 꾹 다문 세연을 보며 종혁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세연은 옛 기억을 떠올렸다. 작년 3월쯤에 있었던 일이었다. 종혁이 교수의 집에 찾아왔고, 교수가 고함을 치던 날.

교수는 배신당한 사람의 분노를 목소리에 두르고 있었다. 다쳐서 은퇴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데도, 교수는 납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두운 믿음으로 기원하는 종혁이 일종의 천명을 말하고 있다면, 교수는 천벌을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순간 섬뜩한 생각을 한 세연이 창백한 얼굴을 들었다.

어쩌면, 그 천벌의 도구로 쓰려고 자신을 거두어 가르친 게 아닐까.

「…….」

단순히 피아노를 그만둔 제자의 대신으로 키워지고 있다는 생각은 한 적 있었다. 때문에 과한 기대를 받더라도 반드시 부응하려고 각오하기도 했고.

그러나 더 깊은 무언가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무거운 이야기 해서 미안. 하지만 깊게 생각하지 마. 세연아.」

말이 없는 세연에게 종혁이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금 말한 건 다 잊어버려.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이제 와서요?

세연은 눈가를 찡그렸지만, 사실 신경 쓴다고 해서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미 한참 전에 전부 벌어진 일이고, 세연은 그 뒤에 들어온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일 뿐이니까.

세연은 피아노 건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전…… 그저, 제가 박 교수님 같은 분에게 레슨 받는 건 기적 같은 일이라 생각했었어요.」

그 기적의 이유를 알고 싶었는데, 어쩌면 무서운 이유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자꾸만 불안해진다.

하지만 종혁은 그녀의 말을 딱 잘라 끊었다.

「기적이란 말을 너무 쉽게 쓰네?」

「네?」

다시 눈을 들자 그는 약간 화가 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다신 그런 말 말라는 듯 그가 말했다.

「네 피아노엔 충분히 가르칠 만한 가치가 있어. 그러니 교수님도 널 가르치기로 생각하셨겠지. 그걸 그냥 기적이라 부르는 건 실례야.」

왜 화가 났는진 모르겠다. 그녀의 기적이란 단어가 말실수였던 걸까. 하지만 그게 말실수라 하더라도, 종혁의 화가 온전히 세연에게만 향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세연은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의 이야기는 듣고 따라서 나쁠 것이 없을 것 같단 본능적인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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