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77화 (677/1,277)

##  677화

2년 동안 가지고 있던 의문을 어느 정도 씻어낸 세연은 보다 집중하며 피아노를 연주했다.

여전히 잘 모를 부분들과 불안감 등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런 건 지금 그녀에게 있어선 열의의 장작이 되어 줄 뿐이었다.

세연은 더더욱 가열차게 피아노 건반을 몰아붙이며 스스로 단단해져 갔다.

세연에게 말해 줄 수 있는 만큼 말해준 종혁 역시 데면데면해하던 이전과 달리 훨씬 더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그녀를 대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같은 피아노를 배운 제자라는 공동의식이 둘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

2시간 빌린 듀엣 연습실은 1시간 더 연장해서 3시간을 꽉 채워 썼다.

세연은 그동안 종혁에게 그녀의 레퍼토리들을 굉장히 많이 보여 주고, 새롭게 고칠 부분들을 배웠다. 솔직히 노트도 없이 머리로만 익히려니 어지럽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말로 가르쳐 주지 않고 피아노 소리로 세연의 모든 음악세계에 확실한 영향을 주었던 것처럼, 종혁 역시 몇 번의 연주로 세연에게 음악을 설명 없이 이해시켰다.

「이쯤 하자. 어때, 만족했어?」

종혁도 피곤함을 느끼는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도 또 가르쳐 주세요.」

이전 같았으면 부탁하지 못했을 말이지만, 지금이라면 할 수 있었다.

「……그러자.」

종혁 역시 더 이상 세연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가지고 온 물병을 한 번에 절반이나 들이켜더니 입가를 닦으며 세연에게 물었다.

「그래서, 세연아. 쇼팽 콩쿠르에 나가기로 한 거야?」

아직 결정하지도 않은 일을 훅 넘겨짚어 오길래 깜짝 놀랐다. 세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그런 말을 했었나요? 안 했던 것 같은데.」

「아니, 네가 연습하는 곡들을 듣다 보니 그렇지 않을까 싶어서. 솔직히 그 실력으로 내년에 도전도 하지 않고 건너뛰는 건 아쉬울 것 같기도 하고.」

오늘 연주한 곡들엔 쇼팽의 곡들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세연은 두 콩쿠르 모두를 염두에 두고 연습에 임하고 있었고. 그렇다면 범용성이 좋은 쇼팽을 주로 다루는 편이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원래 세연은 쇼팽을 좋아하며 잘 연주하기도 했고.

세연은 씩 웃으며 물었다.

「될 것 같아요?」

「예선 탈락은 안 할 듯?」

「그래도 후배인데 조금 더 희망적인 말씀 해 주실 순 없어요?」

「본선 진출 정도는 어때.」

「조금 더요.」

농담이라도 우승할 것 같다고 해 주지 않는 걸 보면 종혁도 이런 부분에선 정말 진지한 사람이었다. 세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이렇게 말해 주는 쪽이 더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그 현실적인 평을 듣고도 세연의 기세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종혁은 물병을 내려놓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의욕이 넘치네?」

그럴 수밖에.

오늘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원래 교수님의 제자였다던 또 다른 누군가, 그리고 그에게 아직까지도 얽매여 있는 것 같은 두 사람. 어쩌면 세연 역시 거기에 얽혀 든 한 사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지금 봐도 대단한 김종혁이 자신보다 훨씬 더 대단하다고 할 정도의 피아니스트였을 테니, 얼마나 천재였을지 안 봐도 알 것 같다. 그런 천재를 가르치다가 세연을 가르치면 기대치도 낮겠지.

세연은 그게 누군지 전혀 관심 없었다.

단지 새롭게 끼어든 자신이 또 다칠지도 몰라 보살펴야 할 존재가 아니라, 한 명의 피아니스트임을 확실히 하고 싶을 뿐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최고를 노리면 적어도 완전히 실패하진 않는다고 어디서 들었거든요.」

「맞는 말이긴 해.」

「그래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나가려고요.」

확실히 결정을 내렸다.

세연의 말에 종혁은 약간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그쪽이 쇼팽보다 딱히 더 권위가 있거나 한 건 아냐. 비슷해.」

그리고 그는 살짝 인상을 썼다. 그의 기억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그리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는 것 같았다.

「솔직히 난이도는 더 끔찍하고.」

일종의 쇼팽 스페셜리스트를 뽑는 경선인 쇼팽 콩쿠르는 참가자들이 전부 괴물이긴 하지만 난해하지 않다. 모두가 같은 곡을 들고 올라가, 보다 잘 연주하면 되는 일이다. 어떤 의미에선 굉장히 정직하고 깔끔하다.

하지만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그렇지 않다. 세상 존재하는 모든 곡들이 무대에 올라 각자의 위치에서 모습을 이루고 존재감을 뽐낸다. 특히 파이널 라운드의 난해함은 이미 유명할 정도다.

그래도 세연은 그곳을 택했다. 아마 그녀 또래에서 가장 강하다고 생각되는 피아니스트도 그곳으로 향할 테니까.

「그래도요, 그렇게 하려고요.」

이 정도까지 말하면 다른 누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종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그렇게 정했다면 뭐…… 잘 하리라 생각해.」

세연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레슨도 잘 받았고 콩쿠르도 결정했다. 교수님에게 보고할 차례다.

「전화해?」

「네. 교수님한테.」

「뭐? 지금? 왜?」

갑자기 세연이 스마트폰을 꺼내들자 종혁은 당황해했다. 오늘 무거운 이야기들을 들은 세연이 무슨 말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그러나 세연은 알지도 못하는 사람 이야기 같은 걸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교수님.」

- 그래, 세연아.

인자한 목소리로 박 교수가 전화를 받았다.

교수 입장에선 난데없이 레슨 직전에 옛 제자에게 레슨을 강탈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때문인지 목소리엔 약간 걱정이 서려 있었다.

- 종혁 군이 정말 레슨을 해 줬니?

세연은 웃으며 대답했다.

「네. 아주 세세하게요.」

- 피아노를 쳤다고?

「네.」

약간 놀랍다는 듯 교수는 말이 없더니, 곧 조용히 세연에게 말했다.

- 네 덕분일지도 모르겠구나.

「……제가요?」

- 아무것도 아니다. 세연아.

피아노를 그만두었던 종혁은 정말 어디에서도 피아노를 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세연은 눈만 들어 저편에 있는 종혁을 바라보았다. 스마트폰을 보며 딴짓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의 신경이 이쪽으로 쏠려 있다는 게 느껴진다.

세연은 말에 신경 써야겠다 생각하며 귀에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 아무튼 종혁 군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나쁜 친구는 아니야.

「마음에 들어요.」

- 하하, 그렇다면 다행이고.

「오늘 레슨 받은 건 다음에 들려 드릴게요.」

- 그래, 그래.

자상한 교수의 걱정 시간은 이쯤이면 충분했다. 세연은 슬슬 본론을 꺼낼 때라 생각했다.

「그리고…… 교수님.」

사실 직접 만나서 말씀드려야 하는 건데, 지금 이렇게 말씀드리고 확실하게 마음을 정해 버리고 싶었다.

「전 퀸 엘리자베스에 나갈게요.」

이젠 주워 담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신청서를 내기 전에 마음이 바뀌어서 다른 콩쿠르로 하고 싶다고 할 순 있겠지만, 그러려면 충분한 이유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세연에겐 그런 이유를 댈 여유가 없었다.

지금 이걸로 결정되었다.

교수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 결정한 건가.

「네.」

-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뜻대로 하려무나.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던 교수였지만, 세연의 의지만을 확인하고는 한 발자국 또 물러서 버렸다.

현실적이라면 현실적이었지만, 어쩐지 그건 무언가를 피하고 두려워하는 것 같은 태도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콩쿠르에 너무 큰 의미를 두지 마라. 피아노에 목숨 걸지 마라.

하지만 피아니스트가 피아노에 목숨을 걸지 않으면 어디에 거나요?

「이전에 말씀하셨죠. 제가 큰 무대에서 타티아나와 만나길 바라신다고요.」

세연은 그때 대화를 똑똑히 기억했다.

교수는 세연과 같은 나이임에도 말도 안 될 정도로 좋은 연주를 보이는 타티아나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다.

지금도 그건 크게 바뀌지 않았다. 때문에 세연은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이젠 그 뜻을 알 것 같아요.」

- 세연아. 네가……

「제 또래 중에 가장 유망한 피아니스트와 적어도 한 번은 같은 무대에 서 봐야겠어요.」

천재들만을 가르치던 교수 입장에선 세연이 결코 그 정도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세연은 그 정도 자기객관성은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세연은 적어도 자기 선생의 관심 정도는 완전히 차지하고 싶었다.

「그래야 교수님 제자라 할 수 있을 테고요. 그렇죠?」

세연은 그동안 이렇게 강하게 말해 본 적이 없다는 걸 느꼈다. 항상 눈치를 보고 교수가 원하는 게 뭘까 전전긍긍 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교수는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세연이 무언가 들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잠시 후, 교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렇게 말하는 시점에서, 넌 이미 누구보다도 내 제자에 가깝단다. 세연아.

「늘 예쁘게 봐 주신다는 거 알아요. 감사합니다.」

- …….

교수는 잠시 말문이 막혔는지 헛숨을 흘리더니 이윽고 따스하게 말했다.

- 많이 컸구나. 세연아.

왜 당연한 이야기를 하실까. 벌써 2년이나 지났으니까 안 자라는 게 이상하다. 사실 세연은 이것도 느릴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조금 인정받은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세연은 웃으며 그 말을 가볍게 받아넘기려 했다.

하지만 교수의 말이 그저 대견하게 여기기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건 뒤늦게 알아차렸다.

- 알겠다. 그러면 숙제를 내 주마. 아직 종혁 군은 옆에 있지?

「네.」

- 다음에 올 때까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올릴 협주곡들을 정해 오너라. 그리고 쇼팽을 제외하고 네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독주곡들과 심사용 DVD에 녹화할 곡들의 목록도.

「네?」

듣고 있는데 머리가 핑핑 돌 것 같았다. 콩쿠르에 올릴 협주곡과 독주곡…… 아니, 다음 레슨인 이틀 사이 모든 준비를 다 해 오라는 것 말이나 다름없었다.

세연은 망연자실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 잠시만요. 교수님. 그럼 몇 곡이에요?」

적어도 숙제라 하심은…… 독주곡 몇 곡을 해야 하는지 정도는 정해 주시면 안 될까요?

하지만 학생이나 할 법은 그런 어리광은 통하지 않았다.

-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네!?」

- 종혁 군은 알고 있는 게 많으니까 콩쿠르에 대해서 잔뜩 물어보려무나.

「잠시만요…… 그래도.」

- 이만 끊으마.

그 말을 끝으로 교수는 정말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세연은 그간 2년간 교수와 있으면서도 이런 전화를 한 건 처음이라서 어리둥절했다. 그녀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바보 같은 중얼거림이 나왔다.

「삐치신 건가……?」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누가 삐쳐? 종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세연은 다른 이야기 한 것 없고 콩쿠르 이야기만 했다고 전했고, 종혁은 너 이제 큰일 났다는 것처럼 킥킥거렸다.

세연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박 교수님이 만만찮은 분이라는 생각은 늘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진짜 성격이 나오시는 건가……?

이제 난 그걸 다른 제자도 없이 혼자서 받아내야 하는 거고?

「…….」

세연은 도와 달라는 눈빛으로 종혁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이 귀여운 후배를 보고도 종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즐거운 미소만 보였다.

***

연습을 마치고 손을 내려놓았다. 옆에 엎드려 있던 벨카가 고개를 든다. 밖이 더워서 시원한 연습실 안에 있게 해주었더니 벨카는 요 며칠 동안 계속 지정석에만 엎드려 있곤 했다.

난 벨카의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면서 피아노 옆에 있는 액자를 보았다. 그 안엔 아나스타샤, 발렌티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가 있었다. 사진 속의 나는 행복해 보여서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난 그 앞에 있는 사진첩을 펼쳤다.

그 안의 나는 피아노 연주자로서 충분한 강인함을 보이고 있었다.

우린 모두 이런 프로필 사진들을 촬영해 갔다. 모두 콩쿠르를 위한 준비다.

“…….”

준비는 빈틈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방금까지 연습했던 곡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무대에 올릴 독주곡이었다. 이 연주로 나는 본선을 뚫고 파이널까지 올라갈 생각이었다. 그만큼 날카롭고 단단해야 하는 곡이다.

이미 난 이 곡을 한계를 몇 단계나 갱신하며 완성시켜 놓았다. 물론 이 완성이 끝이 아니다. 앞으로도 몇 번의 완성이 더 있을진 나도 잘 모른다.

그렇게 끝의 끝까지 이룬 후에 무대에 올리면, 아마 저평가받진 않겠지. 최선을 다한 만큼 평가받을 것이다.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 에르네스트도 지금 자신의 평가를 올리기 위해 연습 중일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내가 모르는 세상의 다른 피아노 연주자들도 그 몇 개 안 되는 자리를 위해 피아노 앞에 붙어 있을 테지.

“아핫…….”

벨카를 쓰다듬으며 창밖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의 연주자들, 그게 누구인진 크게 중요하지 않다.

콩쿠르가 아닌 곳에서 만난 음악가들은 세상의 누구든 친구가 될 수 있지만, 그 장소가 콩쿠르 무대라면 세상 누구든 경쟁자이다.

성별도 나이도 체급도 없는 무차별 경쟁이 곧 내 앞에 다가온다. 청소년 콩쿠르밖에 못 나갈 땐 그래도 자중하려 했지만, 이번엔 누굴 봐준다고 오만한 생각을 하다간 순식간에 잡아먹혀 버린다.

내가 멀리 뛰어나가려고 하면 할수록 더더욱 가까이 달라붙어 올 세상의 모든 천재들이 모여드는 곳.

그런 곳에 나갈 준비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벨카, 배고프지 않나요?”

난 가볍게 웃으며 벨카에게 제안했다. 벨카는 내 말에 즉각 반응해서 일어났다.

식사 후엔 산책도 하면서 내게 가장 부족한 체력을 더 키울 생각이다.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지금은 마다할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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