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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678화 (678/1,277)

##  678화

프로필 사진까지 준비한 뒤 남은 건 심사용 DVD뿐이었다. 집중해야 할 부분이 좁혀지니 더더욱 가속도가 붙는다. 난 거기에 올릴 독주곡들을 하나하나 다듬어 나가고 있었다.

“요즘은 외출을 안 하네?”

“그랬나요?”

“응.”

간만에 쉬는 날인 루슬란 오빠와 정원에 나와서 매트를 펴고 샌드위치를 먹으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문득 오빠가 그렇게 말했다.

그제야 난 지난 일주일 정도를 저택 밖으로 전혀 나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또 자체 외출 금지가 되어 버린 모양이다.

방학인데도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게 약간 걱정인지 오빠는 물끄러미 날 바라보았다. 난 가볍게 웃으며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나갈 일이 없었을 뿐이에요.”

“방학이지 않냔 말은 필요 없겠지. 네게 그런 말은 무의미하니까.”

“잘 아시네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내가 피아노와 공부에 쏟는 시간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방학이라고 해도 똑같았다.

그건 내가 방학을 어떻게 보내는지 봐 온 오빠도 이미 잘 아는 부분이다. 다만, 요번 방학엔 내가 학교에 자주 왔다 갔다 했다는 걸 떠올리는 모양이다.

“이번 방학엔 레슨이 있다면서 늘 나갔었잖아?”

“미하일 선생님이 요 며칠 모스크바 없다 하셔서요. 레슨은 보류예요.”

이번 여름방학 동안 자주 학교에 가서 레슨을 받았던 건 대부분 협주곡에 대한 레슨과 콩쿠르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미하일 선생님도 내내 학생 하나만 붙잡고 있으실 순 없었다. 선생님이 맡고 있는 다른 학생들도 있고, 또 피아노 연주자이자 음악 전문가로서 선생님을 찾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선생님이 종종 학교를 비우게 되면 난 혼자서 할 수 있는 연습들을 몰아치는 편이다.

“어차피 전 독주곡들을 정리하는 중이라서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고요.”

언제부터인가 미하일 선생님은 내 독주곡에 대해선 자주 레슨을 하기보다 시간 간격을 조금 더 길게 두고, 변화가 확실히 드러날 즈음 내가 레슨을 요청하면 봐 주시곤 했다.

이런 방식은 상당히 효과적이었는데, 전체적인 완성도가 동시에 상승하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이번 일주일간의 연습에 대해선 선생님이 어떻게 봐 주실까? 난 그런 부분에서도 굉장히 기대됨을 느꼈다.

루슬란 오빠는 내 교육 방침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미하일 선생님이 그리하신다니까 크게 의문을 가지진 않았다.

“그래서 학교에 안 가고 있었구나.”

“예. 내일이면 돌아온다 하셨어요. 그 후엔 이전처럼 레슨을 할 계획이고요.”

“그렇구나.”

내가 외출하지 않은 이유를 반쯤 이해한 오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남은 절반을 물었다.

“그럼 네 친구들은?”

“다들 바빠요.”

“뭐 그렇겠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래도 널 잘 데리고 다니거나 놀러 오곤 했었는데.”

루슬란 오빠가 기억하는 아나스타샤는 그런 이미지인가 보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작년까지만 해도 방학 동안 피아노를 제외한 내 거의 모든 활동은 아나스타샤가 주도하곤 했었으니까.

그런데 요번엔 저번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갈라쇼 때 한 번 오고는 보이지 않자 궁금해진 모양이다.

아니면 변화가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거나.

“혹시 걱정되시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오빠는 고개를 저었지만 약간의 걱정이 있다는 것 정도는 드러났다.

확실하진 않지만 루슬란 오빠는 아나스타샤가 내 기억 문제에 대해 안다는 걸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눈치로 알아차린 건지 아니면 다른 어딘가에서 알아낸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있어도 루슬란 오빠는 나와 아나스타샤의 관계에 그런 문제가 끼어 있다는 것에 대해 꽤나 신경 쓰고 있었다.

복잡한 문제이긴 했으니까. 그럴 만도 하다. 오빠는 예전부터 내 교우관계에 걱정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고.

난 그럴 필요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으며 스마트폰을 보여 주었다.

“괜찮아요. 안심시켜 드리려면 이걸 보여 드리는 게 빠르겠네요.”

그 안엔 우리가 지난주에 포토 스튜디오에서 찍었던 사진들이 여러 장 저장되어 있었다. 오빠는 화면을 보더니 상황을 바로 눈치챈 것 같았다.

“포토 스튜디오에 같이 갔었던 거야?”

“예. 어떤가요?”

“잘 나왔네.”

확실히 말로 이야기하는 것보단 이렇게 사진으로 보여 주는 게 빨랐다.

오빠는 큭큭 웃더니 양손을 뒤로 짚으며 매트 위로 자리를 쭉 폈다.

“다들 피아니스트니까 준비하는 게 많겠지. 그래도 혹시 방학 중에 계획 같은 게 있다면 이야기해. 최대한 지원해 줄 테니까.”

루슬란 오빠는 우리를 최대한 이해해 주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방학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자기개발로만 보내길 바라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자유롭게 살길 바라는 마음이 느껴진다.

물론 난 지금 충분히 자유롭다. 피아노에 이렇게 매진하고 있는 건 정말 원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래도 난 그렇게 뻔한 이야기를 하는 대신 장난치듯 맞받아쳤다.

“어디까지 해 주실 수 있는데요?”

“글쎄, 작은 섬에 딸린 리조트부터 하나 사서…….”

“없던 일로 해 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장난 좀 쳐 보니 대체 어디까지 가는지 모르겠다.

물론 오빠 역시 농담하는 것이긴 했다. 아무리 베르체노프 콘체른의 후계자라 하더라도 리조트를 인수하려면 일단 아버지에게 장대한 사업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할 테니까. 오빠는 아버지에게 프레젠테이션 하는 걸 제일 어려워하곤 했다.

그 이야기까지 해서 조금 더 괴롭혀 줄까 싶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하진 않기로 했다.

“그런 건 필요하지 않아요. 전 지금처럼 이렇게 시간을 보내기만 해도…… 어?”

“왜?”

“제 샌드위치 어디 갔죠.”

아까 이야기를 하다가 내려놓은 샌드위치가 온데간데없어져 있었다. 난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가, 바로 범인을 잡아냈다.

“벨카!”

아까 정원에 나와서 매트를 펼 때부터 달려와선 옆에 조용히 엎드려 있던 벨카가 지금은 살짝 삐뚜름하게 자세를 내 반대편으로 하고 있었다.

얼핏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지만 입가에 소스가 묻어 있는 게 다 보인다.

이렇게 큰 덩치로 어떻게 소리도 없이 샌드위치를 먹었지? 난 황당해져서 벨카에게 물었다.

“언제 가져간 거예요?”

“왕.”

“……이렇게 키우지 않았는데.”

사실 내가 키운 건 얼마 되지 않지만…… 그간 어리광을 너무 받아 줬나? 시치미를 뚝 떼고 모른 척하는 벨카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냉담하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자연히 벨카에게로 향하려던 화살은 루슬란 오빠에게로 돌아갔다.

“오빠는 보고 있었죠. 왜 안 말리셨나요?”

“네가 진짜 끝까지 모르는가 궁금해서.”

“너무해요.”

“그 덕분에 벨카는 날 더 신뢰하게 된 것 같은데.”

당연히 몰래 샌드위치를 먹는데 모른 척해 주니 그렇겠죠.

날 가운데에 두고 오빠와 벨카가 작당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정말 내 옆으론 시선도 한 번 안 주던데, 어쩜 그렇게 모른 척할 수 있는 건지 신기할 정도였다.

감쪽같이 그렇게 내 샌드위치를 먹어치운 벨카는 이제 한숨 자겠다는 듯 내 옆에 더 달라붙으며 엎드렸다. 그 뻔뻔함에 난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루슬란 오빠도 낮게 웃더니, 비스듬히 버티고 있던 팔을 머리 뒤로 하고는 아예 누워 버렸다.

“나도 좀 자야겠다.”

“여기서요?”

“그래. 저 녀석도 자는데 난 자면 안 돼?”

“…….”

이게 개야 사람이야.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가, 얼른 지워 버렸다.

낮잠 정도야 잘 수도 있지. 지금 몇 시더라? 난 언제쯤 오빠를 깨워 주어야 할지 생각하며 머리를 숙였다.

그런 날 보며 오빠가 물었다.

“넌?”

“잠 안 와요.”

“그래도 누워 봐.”

“앗……!”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오빠는 갑자기 팔로 내 목 부근을 걸더니 말 그대로 뒤로 젖혔다. 갑자기 머리가 뒤로 넘어가니 섬뜩한 기분마저 든다.

난 갑자기 이렇게 휙휙 움직이는 기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살짝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항의했다.

“이러지 마세요.”

“진정하고 하늘이나 봐.”

“…….”

갑자기 누웠는데도 머리가 아프거나 하진 않았다. 루슬란 오빠가 팔베개를 해 주고 있는 덕분이었다.

난 눈을 흘기며 옆을 바라보다가, 일어나 봐야 소용없을 것 같아서 시키는 대로 정면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무그늘이 태양빛을 막아 주고, 여름의 구름들이 이곳저곳 떠 있는 것이 보였다. 가만 생각해 보니 요 일주일 사이 이렇게 하늘을 바라본 건 처음이지 않나 싶다.

“구름이 움직여요.”

“구름은 움직이지.”

그 느긋한 목소리엔 아무런 뜻도 없었지만 마음을 가볍게 하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난 옅게 웃으며 기분대로 말했다.

“마음이 편해졌어요. 저렇게 구름처럼 천천히……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네요.”

이것도 그간 열심히 한 날 보던 오빠의 걱정의 일부일까.

그렇다면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는 것 자체에 난 감사를 느끼고 있으니까.

하지만 오빠는 뜬금없이 이상한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저거 생각보다 그렇게 느리지 않아.”

“예?”

“네가 뛰는 것보다 빠를걸.”

왜 분위기를 깨는 거예요? 다시 옆을 바라보니 오빠는 또 혼자서 숨죽여 웃고 있었다. 또 장난이었다.

***

미하일 선생님께서 모스크바로 돌아오셨다. 그 연락을 받자마자 난 선생님께 전화로 안부를 여쭈었다. 아마 피곤하실 테니 레슨에 대한 이야기는 하루쯤 지나서 적당히 할 생각이었다. 혼자 연습 조금 더 하면 되는 일이고.

그런데 선생님 측에서 먼저 내 레슨을 봐 주시겠다고 해 주셔서 바로 날짜를 잡았다.

“…….”

난 교복을 입고 시간에 맞추어 학교에 도착했다. 가만 올려다보니 겨우 일주일밖에 안 지났는데도 오랜만에 학교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안에선 은은하게 악기 소리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학에도 모스크바에 남아서 레슨을 하는 학생과 선생님들. 그 열기가 학교 전체에 맺혀 흐르는 것 같았다.

거침없이 그 열기 안으로 발을 디뎠다.

“오랜만이구나. 타티아나.”

사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흐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오랜만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내가 지난 일주일을 체감상 길게 느꼈던 것처럼, 선생님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생각하니 조금 기뻤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래, 앉거라.”

그리고 이런저런 말이 오갈 것도 없이 선생님은 자연스럽게 내 앞에 차를 끓여 내어 주셨다. 이미 물도 다 끓어 있고 찻잎도 세팅되어 있어서 내가 뭔가 도울 필요도 없었다.

찻잔을 받아 한 모금 마시니 따스함이 몸 가득 찬다. 고개를 드니 선선한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미하일 선생님은 냉방기를 잘 켜지 않고 대신 창문을 여는 편이다.

잠시 차를 음미하고, 찻잔을 내려놓자 미하일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일주일 동안은 어땠니.”

난 독주곡 위주로 연습하면서 어떤 공부 등도 병행했는지 생각나는 대로 선생님에게 말씀해 드렸다. 사실 하던 것들을 계속하는 거라서 그리 다채롭거나 특이하진 않았다.

미하일 선생님은 예상대로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다.

“잘했구나. 그래, 독주곡 레퍼토리에 대해선 오늘 보자꾸나.”

아마 전부 보려면 꽤 오래 걸리겠지? 생각만 해도 손끝이 이미 건반에 닿아 있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협주곡 말인데.”

선생님이 중요하게 여기고 도와주고 계시는 부분은 바로 다름 아닌 협주곡이었다.

“빠르게 연주회 준비할 수 있겠니. 취소된 연주회 일정에 끼워 넣을 수 있다면 함께 해 보자는 오케스트라가 한 곳 연락해 왔단다.”

“정말인가요?”

“그래.”

약간 놀랐다. 저번에 리빈스크에 갔던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벌써?

보통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은 이렇게 빠르게 성사되거나 하지 않는다. 정규 일정이 최소 몇 개월은 밀려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때문에 선생님은 취소된 일정을 얼른 낚아챈 것 같았다.

그것도 정말 어려운 일이다. 미하일 선생님이 얼마나 다방면으로 알아보고 힘을 써 주신 건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렇게 되면 조건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선생님은 약간 고민이라는 듯 말씀하셨다.

“그런데 조금 멀긴 하구나.”

“어디인가요?”

“블라디보스토크.”

난 그곳에 가 본 적은 없지만 러시아의 제일 동쪽에 위치한 도시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멀긴 확실히 멀다.

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가 아니라 지구 반대편이라고 하더라도, 난 협연 경험을 쌓을 수 있다면 어디든 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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