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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681화 (681/1,277)

##  681화

악장인 시어도어 로스 외에도 다른 단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친분을 다지는 시간을 가졌다.

대부분 내가 질문하기보단 단원들이 내 쪽으로 질문해 오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경력으로만 따지자면 난 여기 있는 그 어떤 사람보다 모자라겠지만, 독주자로서 매체 등에 드러나 있는 정보는 내 쪽이 더 많기 때문인 것 같았다.

“송년 연주회에도 나왔었잖아요? 어린데도 정말 대단하네요.”

“함께 나왔던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와 같은 중앙 음악학교라고 했죠? 친한 것 같기도 하고. 잘 알아요?”

이전에 했었던 연주회나 학교에 대한 질문들에 답하다 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난 생각나는 대로 모든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연주자로서의 내게 흥미를 가져서 하는 질문이라면 무엇이든 기쁘다.

차를 마시며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단원들 중앙에서 나만 질문세례를 받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로스가 불쑥 끼어들어선 자신 쪽으로 대화의 흐름을 틀어놓았다.

“그런 생각 하지 않았습니까? 저 미국인 왜 저렇게 러시아어를 잘하지?”

농담조로 웃으며 로스는 다리를 까딱였다.

그의 이름만 듣고 미국인일 것 같단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외모가 조금 다르기도 했고. 그러나 난 전혀 위화감 같은 건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 아뇨, 미국인 연주자분들도 많고…….”

“하하, 신기해하는 분들도 많으셨는데.”

그는 날 놀라게 하지 못한 게 아쉽다는 듯 말했다. 아무래도 처음 보는 연주자와 유창한 러시아어로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문을 트는 게 그에겐 하나의 레퍼토리인 것 같았다.

신기한 건 아니지만 흥미가 가긴 했다.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해 주었으면 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로스는 낮게 웃으며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전 원래 캘리포니아에 있는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있었습니다. 학교도 그쪽에서 나왔죠.”

퍼시픽이란 단어 자체가 태평양을 뜻하니 그게 꼭 러시아 극동에 위치한 오케스트라에만 붙여지란 법은 없었다. 미국 서부 도시의 오케스트라에도 똑같은 오케스트라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건 조금 신기했다.

“이름이 같나요?”

“예. 그래서 캘리포니아에 있던 당시 굉장히 궁금하더군요. 러시아에 있는 오케스트라는 얼마나 할지 말입니다. 단순히 이름이 같단 이유로 두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비교해 보고 싶었죠. 지금 생각하면 정말 유치하고 멍청한 생각인 것 같은데……”

로스는 과거 생각을 떠올리며 키득거렸다.

“그 생각은 안 했다면 전 지금 여기에 없었겠죠.”

그는 자기 음악에 진지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굉장히 도전적인 면모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같은 이름의 두 오케스트라를 직접 비교해 보겠다고 나서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젠 나온 걸까? 난 주변의 단원들을 살짝 돌아보고는, 다시 로스에게 물었다.

“이곳이 마음에 드셨나요?”

그러니 남아서 악장까지 맡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바로 그렇게 답하는 건 캘리포니아에 있는 오케스트라에 대한 실례이기도 했다.

과거엔 대놓고 어느 쪽이 나은지 직접 판가름해 주겠다며 나섰을지 모르겠지만, 이제 로스는 그런 부분에 대해선 크게 의미를 두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바로 대답해주는 대신, 짙게 웃으며 그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무턱대고 와서 입단시켜 달라 하니 지휘자께서 굉장히 난감해하셨죠. 말도 잘 안 통하는 미국인이 끼워 달라니 웃기지 않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헛웃음이 나오는 황당한 상황처럼 느껴지긴 했다. 그때 지휘자님은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싶다.

로스는 스스로 다시 생각해 봐도 그런지 머쓱한 표정으로 목 주변을 긁적이더니 이어 말했다.

“그런데 일단 바이올린을 들면 말이 통하긴 했나 본지……. 어떻게 합격해서 단원 생활을 좀 했었죠. 그런데 몇 달 정도 있어 봐도 어느 쪽이 나은지 잘 모르겠더군요.”

젊은 치기로 당당하게 오케스트라를 옮겨 봤지만 로스는 판단할 수 없었다. 그만큼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라는 똑같은 이름을 지닌 두 오케스트라는 뛰어난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

그쯤 되면 점수를 매기거나 수준을 가늠하는 건 무의미하다.

“약간 고민하고 있던 차에 지휘자님은 그렇다면 다음 연주회만 더 해 보자, 또 그다음 연주회만 더 하면 우리 오케스트라의 진가를 알 수 있을 거다……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고, 그래서 한 1년 있어 봤죠. 그래도 잘 모르겠어서 2년 있어 보고…… 있다 보니 바이올린 말고 러시아어도 할 수 있게 되고.”

로스는 약간 바보 같다는 듯 말했다.

“하다 보니 10년이 넘었군요.”

난 전혀 그가 바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야기만 들어 보면 약간 교만한 마음으로 이곳에 왔다가 그만 눌러앉아 버린 한 바이올리니스트의 이야기 같지만, 겨우 그 정도였다면 로스가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악장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로스는 이곳의 사람들에 마음에 들었고, 이곳의 사람들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의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였다.

“이젠 이 오케스트라의 진가를 만들어 내시는 분이 되신 거네요. 로스.”

“……하하.”

그는 순간 눈을 크게 뜨더니, 곧 빙그레 웃었다.

내 말대로 그는 이제 이 오케스트라의 주축이 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난 이 모든 이야기가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로스는 잠시 날 똑바로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더니, 곧 진지하게 감사를 전해온다.

“고맙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타티아나로 괜찮아요.”

“저도 시어도어라 편히 불러 주시죠.”

잠깐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뿐인데 난 그와 많이 친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단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악장의 대화하는 내 모습을 보고는 마치 동료를 대하듯 해 준다.

우리가 만난 지 15분도 안 되었다는 걸 생각한다면 꽤 긍정적인 첫 시작이었다.

하지만 시어도어는 아쉬운 듯 슬픈 얼굴을 했다.

“예전 우리 모습을 제대로 보여 드리고 싶은데. 애석하게 되었군요.”

그가 말하는 모든 이야기엔 지휘자가 있었다. 그가 처음부터 보아왔던, 아마 오늘도 별일 없었다면 이 자리에 있었을 분이겠지.

직접 뵌 적은 없지만 그 지휘를 녹음으로 들어 본 적은 있다. 굉장한 음악을 하시는 분이었다. 난 존경을 표하며 그에게 물었다.

“지휘자님께선 괜찮으신가요?”

“연세가 있으시다 보니 뭐…… 그렇죠.”

시어도어는 굳이 내가 신경 쓰진 않아도 된다는 듯 얼버무리며 말했다.

“괜찮으실 겁니다.”

그 기원에 내가 혹시라도 도움이 된다면, 기도를 해 드리고 싶었다.

지금 어쩔 수 없이 생긴 틈은 내와 다른 지휘자님이 잠깐 대신해 드리고, 다시 돌아와서 여기 있는 악장 그리고 단원들과 다시 멋진 음악을 하실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진지한 바람으로 속으로 짧게 기도했다.

시어도어는 내 표정을 보더니 고맙다는 미소를 보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는 듯.

“아무튼, 이번엔 새로 오신 지휘자님께 집중해야겠죠. 사실 저희도 저번에 한 번 보고는 못 봤습니다.”

“정말인가요?”

“예.”

그럼 정말 오늘 이 미팅에서 우린 오케스트라, 지휘자, 협연자가 모두 처음 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어진 시간은 열흘. 그사이 모두가 하나 된 음악 집단으로서 기능하며 연주회를 성공시켜야 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난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괜찮을 거라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 저 역시 괜찮을 것 같습니다.”

시어도어는 협조적인 사람인 것 같으니 별로 걱정되지 않는다. 누군지 모를 객원 지휘자님은 잘 모르겠지만, 트러블이 생긴다면 고쳐 나가면 되겠지. 난 그런 생각으로 긍정적으로 임하기로 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길 조금 더 지났을 때. 정확하게 5시에 맞추어서 문이 열리며 한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

나보다 약간 큰 것 같은 키에 마른 체격.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의 덩치에 비하면 작은 편에 속한다. 그러나 누구도 쉽게 대하기 어려운 눈빛엔 오래된 음악가의 카리스마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난 한눈에 그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예전에 뉴스에서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분명 큰 오케스트라에서의 지휘로 유명한 분이었다.

“안 늦었군.”

그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는, 짧게 헛기침하며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섰다. 단지 그뿐만이었는데도 이제 앞으로 몇 시간 동안은 여기에서 아무도 밖으로 못 나갈 것 같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우리들 안으로 섞여 들어오지 않고 그는 조금 앞쪽에 있는 공간으로 향했다. 만약 지휘자라면 서야 하는 위치였다.

모두가 상황을 인지했을 무렵, 그는 우리 전부를 휙 둘러보며 말했다.

“저번에 인사드린 분도 있고…… 아닌 분도 있고. 어쨌든 반갑습니다. 이번 연주회에 함께 하게 된 객원 지휘자 김성조입니다.”

“반갑습니다.”

정말 처음 보는 것처럼 인사하는 광경이었다. 난 무표정한 얼굴로 상황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런저런 복잡한 감정들이 든다. 반가움이 들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의 마음에 대한 경계심 또한 다시 한번 확인했다.

피아노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내려놓은 지 2년이 넘었다. 그간 오래 있으면서 내 정체성은 이미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다.

기억이 두 배가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새는 쿨한 성격이라서 내가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책임감이라는 건 그런 식으로 사라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특별한 감정 등을 보일 이유도 여유도 없다. 난 그저 자연스럽게 한 연주자로서 있을 생각이었다. 그게 옳기도 하고.

“…….”

각자 생각으로 조용해진 좌중을 유심히 바라보며 지휘자님이 입을 열었다. 굉장히 솔직한 어조였다.

“압니다. 이전 지휘자께서 얼마나 대단한 분이셨는지. 그 대신으로 온 절 바로 믿긴 힘들겠죠. 시간도 없고, 그러니 간략히 제 소개를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리고 앞에 있는 화이트보드에 마커로 약력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학교는 오스트리아에서 빈 국립음대를 나왔고 작곡가 출신으로 활동하다가 어떤 계기로 지휘자의 길에 뛰어들어서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 간단한 소개였다.

큼지막한 일들만 열거하는데도 중간중간 보이는 오케스트라들이 얼마나 대단한 곳들인지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외국 각지는 물론이고 러시아 내에서도 활동을 오래 하신 분이었다.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짧은 소개가 끝나고, 어떻게 이곳에 있게 되었는지 스스로를 설명한 지휘자님은 마커를 닫고는 이쪽을 바라보았다.

“이런 이력을 보니 믿음이 생깁니까?”

“…….”

“그럴 리가 없지.”

저런 경력들은 물론 굉장히 중요하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아무에게나 주지 않으니까. 하지만 단원들 입장에서 믿고 따를 만한 사람인지에 대해선 그런 건 그리 큰 요소가 되지 못한다.

그 점에 대해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지, 김성조 지휘자님은 피식 웃더니 손가락을 들며 이야기했다.

“그러니 오늘 안에, 여기 모여 계신 분들로부터 믿음을 받아 내겠습니다.”

대단한 자신감이자 솔직한 어필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괜찮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손가락이 내 쪽으로 향해서 깜짝 놀랐다.

“한가운데에 계신 분이 이번에 초대한 피아니스트……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겠군요.”

“아…… 맞아요. 안녕하세요.”

“이제 와서? 하하.”

나도 모르게 당황했더니 지휘자님이 껄껄 웃는다. 조금 창피해져서 시선을 피해도, 상관없다는 듯 날 불러냈다.

“아무튼, 앞으로 나와 주시죠.”

“예…….”

독주자로서 혼자여야 하는 난 오케스트라와 지휘자의 중간 즈음에 섰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내게 닿았다.

“열일곱 살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직 열여섯 살이에요.”

자기 나이의 삼 분의 일도 안 될 날 바라보던 지휘자님은 손가락을 까딱이더니 옆에 있는 피아노를 가리켰다.

“실력은 영상으로 이미 봤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한 번 더 보여 줄 수 있습니까?”

“……?”

조금 의아해져서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았다.

믿을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건 제가 아니라 지휘자님이 하신 이야기 아니었나요? 왜 지금 저에게?

하지만 농담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나야말로 열여섯 살에 이 자리에 있게 된 게 단지 경력만으로 모두 설명되지 않는다.

이것도 기회겠다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악장 시어도어도 나와 주시죠. 바이올린과 같이.”

시어도어는 군말 않고 바이올린을 들고 내 옆에 섰다.

그렇게 지휘자, 악장, 협연자가 한자리에 모였다. 모두 음악적 교류라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사이였다.

그 사이로 지휘자님이 간단하게 제안했다.

“우리 세 명이서 즉석 리허설을 해 봅시다. 가능합니까?”

지휘자의 능력이란 역시 음악을 놓고 드러난다. 때문에 전혀 맞춰 보지 않은 협주곡을 해 보자 하는 것 같았다.

시어도어는 조금 난색을 표했다.

잘 되면 상관없다. 그야말로 모두에게 믿음을 주기에 충분하겠지.

하지만 만에 하나 잘못된다면? 그야말로 첫 단추부터 엉망으로 꿰는 일이 된다.

그는 연주자이기도 하지만 악장으로서 단원들의 관리하는 일 등도 맡고 있었다. 이 리허설이 실패하면 어떤 악영향이 갈지 이미 예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해 봐요, 시어도어.”

“…….”

난 고민하는 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우리가 아직 어떤 음악을 하는진 서로 모른다. 하지만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협조하려는 음악을 잘 할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간에 한 번쯤 해 보고 싶었다.

괜찮다는 의미로 웃어 주자 시어도어도 잠시 후 시원스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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