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82화 (682/1,277)

##  682화

주어진 시간이 짧은 만큼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즉석 엑섭excerpts이나 리허설이 있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예상보다 조금 더 난이도가 높긴 했다.

만난 지 이제 1시간도 안 된 세 사람은 지금 기다리고 있는 수십 명의 프로들을 납득시킬 만한 음악을 만들어 내야 했다.

시간이 길게 주어진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몇 분 정도.

하지만 같은 언어와 음악체계를 공유하는 음악가들에게 그 정도 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떤 결과물이라도 내놓을 수 있긴 하다. 게다가 나와 시어도어는 굉장히 적극적으로 이 즉석 리허설에 임하고 있었다.

난 별로 걱정하지 않고 모차르트부터 시작해서 연주할 수 있는 협주곡 레퍼토리를 시어도어와 공유했다.

시어도어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괜찮겠는데요……. 그중에서 현악과 피아노가 중점으로 부각되는 곡들을 추려 보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악장만 해도 괜찮겠죠?”

“그럼 협주곡들의 2악장들을 주로 보는 건 어때요? 연주하기에도 괜찮을 것 같고.”

“좋은 생각이에요.”

일반적인 피아노 협주곡들의 2악장은 느린 템포로 천천히 흘러간다. 화려하고 풍부한 관악기들은 아예 뒤로 빠지는 경우가 많았으니 피아노와 바이올린 단둘이서 축약하여 구사해 내기에 적합하다.

그렇게 활발하게 의견 교류를 하고 있는데, 그사이 지휘자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고 우리 둘을 보고만 있었다.

“…….”

언제쯤 지휘자로서 말씀을 해 주실까 약간 기다리면서, 시어도어와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나는 가끔씩 옆을 힐긋거렸다.

이 리허설을 제안하신 분이라면 무슨 말이라도 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저런 상황을 떠나서 그건 다른 어떤 대화라 할지라도 당연한 일이다. 대화를 주도하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책임감은 가지고 참가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눈빛을 먼저 눈치챈 건 시어도어였다. 그 역시도 의문이 있었던 건 나와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흠, 어떻습니까? 킴.”

그 짧은 말엔 지금 우리의 존중을 받고 싶다면 제대로 의견을 내 달라는 은근한 압력이 실려 있었다. 악장이 객원 지휘자에게 할 수 있는 정당한 요구였다.

여태껏 말없이 듣고만 있던 김성조 지휘자님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시어도어를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그러니까 뭐가 좋은지 말씀을 좀…….”

“두 분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겠군요.”

시어도어가 눈가를 찡그렸다. 지금까지 나와 대화를 나눈 것으로 지휘자에게서 무언가 인정을 받았다는 게 그리 기분 좋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우린 진지하게 음악을 구성하는 일원으로서 지휘자님 역시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었으면 한다. 멀리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다가 고개나 까딱이는 사람은 여기에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우리의 불만이 전달되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지휘자님은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냈다.

“모차르트로 가죠. 피아노 협주곡 21번. 1악장만 되겠습니까?”

이 리허설을 처음 제안했던 것처럼 짧고 독단적인 제안이었다.

우리 이야기 사이에서 적절한 곡을 찾아내어 선정한 것이라 생각하고 싶지만, 시어도어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아까처럼 바로 받아들이는 일은 없을 것이란 표현이었다.

나도 제목을 듣고 머릿속으로 빠르게 그 곡을 떠올려 냈다.

가능한지 아닌지 따져 보자면…… 나 혼자서 독주곡처럼 연주한다면 가능했다.

얼마 전에 다시 연습해놓기도 했고, 암보는 못 했지만 태블릿 컴퓨터로 악보를 띄운다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이올린과 함께, 조금 더 협주곡의 느낌을 본격적으로 살리고자 한다면 이야기가 약간 다르다.

“관악기 없이요?”

생각중인 나 대신 시어도어가 물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의 1악장은 초반엔 트럼펫이, 그리고 오보에와 플루트가 굉장히 중요하게 음악을 이끈다. 그 악기들 없이는 음악성을 제대로 살리기 쉽지 않다.

아예 2악장을 하거나, 아니면 피아노와 현악기를 주로 하는 다른 협주곡을 해도 괜찮을 텐데, 김성조 지휘자님은 이 곡을 선택하셨다.

“없이 해 보죠. 플루트와 오보에, 트럼펫 정도만 피아노가 함께 맡아 주시죠. 총보 연주를 잘 한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약간의 의문을 가지고 이 선곡의 저의를 파악해 보려던 난 이어지는 지휘자님의 말에 생각을 멈추었다.

이미 저분은 내가 얼마나 할 수 있는지 알고, 그만큼 신뢰하기에 이 곡을 꺼내어들었다.

지휘자에게서 초면에 이 정도 신뢰를 얻기란 쉽지 않다. 아마 미하일 선생님의 덕분일 테지.

그렇다면 내가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보세요. 지휘자님. 너무 쉽게 말씀하시는데, 앙상블 피아니스트로 교육받지도 않았을 솔리스트에게 지금 즉석 리허설에서 갑자기 그런 걸 하라 하시면…….”

“할 수 있어요.”

시어도어는 너무 무리한 요구라 봤는지 내 편을 들어 주려 했지만, 그에게 미안하게도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날 돌아보았다.

“……타티아나?”

하루 만에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날아온 것을 보고 그는 내게 기분 좋은 경의를 표했다. 하지만 이번엔 내 오만이 아닐지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기존 내 연주들을 들어 본 적이 있다 하더라도 오케스트라 총보 연주를 하는 건 보지 못했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그가 말했듯 모든 피아노 연주자가 총보 연주를 유연하게 잘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난 그의 걱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미소를 보였다.

“걱정 말아요. 열심히 해 볼게요.”

“아니…… 참나.”

그는 황당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결국 악장으로서 자신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눈빛을 했다. 그는 지휘자님을 바라보며 강력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대신 오보에 파트는 저한테 주시죠.”

“제 생각엔 피아노가 하는 쪽이…….”

“플루트에 앞서 오보에 선창을 제가 바이올린으로 어떻게 하는지도 한 번 보셔야 할 것 아닙니까?”

“…….”

악장이기 전에 시어도어 로스라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무엇을 얼마나 할 수 있는지 먼저 봐 두는 것 역시 이 리허설의 목적 중 하나이다. 그는 자진해서 자신을 시험대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 긍지를 느꼈는지, 지휘자님도 한층 더 진지해진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곡이 정해지자 나머진 별로 이야기할 것도 없었다.

1악장만 하기로 하고 템포는 특별히 튀지 않게 정석적으로. 사운드 역시 원전이라 할 것 없이 현대적으로. 이런저런 합의는 굉장히 두루뭉술하게 이루어졌다.

이런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 연주자도 있을 테지만, 일단 나나 시어도어는 이렇게 일단 음악을 마주하면서 맞춰 보는 방식에 대해 불만이 있지 않았다.

각기 다른 분야의, 세 나라에서 온 음악가들은 서로가 보이도록 자리 잡았다.

“이렇게 앉도록 하죠.”

피아노 연주자는 지휘자보다 더 무대 앞으로 나오기 때문에 지휘자를 제대로 볼 수 없다. 옆모습이나 등을 훨씬 더 많이 보게 된다. 그래서 지휘를 보면서 맞추기보단 지휘자가 이끄는 오케스트라를 들으면서 리허설한 템포에 맞춰 연주하는 편이다.

하지만 지금은 고개를 살짝만 돌리면 김성조 지휘자님과 악장 시어도어가 보였다. 함께 음악을 할 사람들이 눈에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조금 안심이 되는 부분이 있다.

“저에게 맞추라 하진 않겠습니다. 시야에 두고 약간 의식만 해 주면 됩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그렇게 할게요.”

“좋습니다.”

각자 악기와 악보를 세팅하고 준비를 어느 정도 마치자, 지휘자님은 깔끔하게 대화를 마무리 짓더니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약간 부산하던 연습실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는다. 리허설의 시작이다.

“…….”

조용해진 공기 속에서 세 사람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시어도어는 자세를 잡고 활을 쥐었으며, 김성조 지휘자님은 양 팔을 살짝 들어올렸다. 나는 손끝을 건반에 닿도록 올려놓았다.

그렇게 준비가 되었음을 눈빛으로 알리자마자, 지휘봉 없이 맨손이 허공을 위아래로 저었다.

아무런 설명도 없었던 시작이었지만, 시어도어는 곧바로 그 손짓을 캐치하고는 정확한 템포로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현악기의 저음으로 온화하게 시작된 음악은 곧 고음으로 밝아진다.

본래 수십 대의 악기가 이루었어야 할 그 음악을 시어도는 바이올린 한 대로 해내고 있었다. 순간순간 주법을 달리하면서 모든 음역을 넘나드는 실력이 굉장했다.

“…….”

난 그 엄청난 연주를 들으면서 내 음악을 준비했다.

원래 첫 리허설에선 그야말로 감각적인 연주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바이올린과 즉석에서 맞춰 보는 건 자주 해 본 일이라 그리 겁나진 않았지만, 피아노뿐만이 아니라 여러 악기들을 동시에 등장시키면서 협주곡을 완성시켜야 하니 집중이 흐트러지면 엉망진창이 될 게 뻔했다.

그렇게 한껏 집중력을 끌어올리면서 시어도어가 이끄는 음악의 템포와 컬러, 규모 등을 파악하고 있었다.

순간 지휘자의 손끝이 날 겨누는 것을 느꼈다.

“!”

아직 내 차례는 한참 남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었다. 내겐 트럼펫과 플루트의 역할이 맡겨져 있다.

순간적으로 총보를 읽고, 건반 위로 옮긴다. 플루트는 밝고 사랑스럽게, 그리고 이조악기인 트럼펫은 정확한 음으로 명료하게. 그간 계속 해 온 훈련이 자연스럽게 빛을 발했다.

그 위에 시어도어는 바이올린 소리를 길게 덧붙였다. 오보에 파트를 맡아 주겠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정말 혼자서 커버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게 첫 톱니바퀴가 맞아 돌아가기 시작하자 그다음은 훨씬 더 자연스럽게 이어져 나갔다.

난 악보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계속해서 총보를 해석하느라 바빴지만 그 와중에도 귀로는 시어도어의 소리를 듣고, 시야 한편에 지휘자님을 넣으면서 템포를 그쪽에 맞추려 노력했다.

“…….”

지휘는 종종 내 쪽으로 향했다.

살짝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피아노 연주자가 지휘를 이렇게 정면으로 볼 일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내가 느끼는 어떠한 특수한 긴장감 때문인 걸까.

악장과 함께 하는 리허설이면서도 동시에 시험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내 음악에 대한, 혹은 다른 무언가에 대한.

그리 틀린 생각은 아닐 테지. 시험이란 누군가가 자격을 걸고 내기도 하지만 나 스스로에게 부여하기도 하는 것이니까.

난 이런 시험이 언젠가 반드시 올 것이란 예상을 이미 하고 있었기에 능숙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이미 난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지금.’

2분가량의 화사한 음악이 완성된 후에, 본격적으로 피아노가 음악에 개입했다.

바이올린 하나로 만들었던 오케스트라의 음량을 기억한다. 피아노로 트럼펫과 플루트 소리를 묘사하며 이 연습실의 크기와 울림 역시 파악해 놓았다. 난 그 모든 것을 종합하여 정확하여 피아노의 음량 또한 조절했다.

살며시, 하지만 늘어지지 않게.

모차르트의 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할 땐 논 레가토non legato가 기본이다. 그러면서도 툭툭 끊어져 버리지 않도록 음 하나하나의 아티큘레이션을 놓치지 않고 살려냈다. 머릿속에 잠들어 있던 선율이 현실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형체를 이룬다.

“…….”

그렇게 내가 피아노 연주자로서 모차르트에서 보일 수 있는 갖은 기량을 보이고 있을 때, 다른 두 사람 역시 최선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었다.

시어도어는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한 연주로 오케스트라 세션 거의 전부를 떠안아 주었고, 지휘자님은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의 가교로서 능수능란하게 음악 전체의 사이즈와 음색을 컨트롤해 냈다.

사실 나와 시어도어 둘만 연주하더라도 템포 등을 맞추는 데에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우린 이 곡에 대해 꽤 숙련된 연주자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보다 세세한 디테일과 음악성을 즉각적으로 조화시키는 데엔 지휘자님의 역할이 정말로 중요했다.

고개를 들고 숨을 크게 들이쉬는 것 같은 제스처에선 우리도 모르게 소리가 커진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허리를 굽히면서 지휘를 작게 그리면 우리의 음악 역시 그와 같은 크기로 줄어든다.

한 번에 알아듣기 쉬운 지휘란 그만큼 중요했다.

사람의 동작은 아주 직관적이고 예술적이라서, 통일된 직관이 필요한 합주에서 그 존재만으로도 모든 것을 하나로 엮어냈다.

앞서 길을 비춰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땅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걷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 없이 적당한 집중력과 긴장만을 유지하면서 음악의 흐름에 따라가게 되었다.

그리고 즉석에서 시작된 합주가 길어지면서, 난 이 선곡이 아주 정확했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특별히 어려운 리듬 등을 요구하지 않으니 각자의 실력대로 음악을 구사하고, 또 상대의 음악을 보다 높이 끌어올리기에 적합했던 것이다.

지휘자님은 한순간에 우리가 이 곡을 잘 할 수 있으리라 꿰뚫어보신 것이 분명했다.

정말 기분 좋은 합주였다. 마치 몇 번이나 연습했던 것처럼 딱 맞는 합으로 시작된 연주는 매 초마다 더 나아지고 깊어지면서, 1악장이 끝나갈 무렵엔 시작했을 때보다 훨씬 좋아져 있었다.

“자, 여기까지.”

중단 지시에 연주를 그치고 나서도 아쉬움이 남을 정도였다.

난 고개를 들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시어도어는 다른 곡이라도 바로 이어서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고, 지휘자님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잘 해낸 것 같다. 나 역시 그런 만족감을 느낄 와중, 갑자기 주변에서 벼락처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폭발적인 환호가 어떤 의미인진 너무나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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