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83화 (683/1,277)

##  683화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프로답게 대처하고 있었지만 내심 불안을 느끼고 있었을 수밖에 없었다.

지휘자는 입원했고 그 대리로 온 객원 지휘자는 낯선데다가 협연자는 새파랗게 어린 중앙음악학교 학생.

이런 급조된 인원으로 열흘 안에 적어도 두 곡 이상의 협주곡 레퍼토리를 완성시켜야 한다. 정말 연주회를 취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 의심하는 건 음악가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리허설로 그 대부분의 불안과 의심은 사라지게 된 것 같았다.

날 바라보는 눈빛부터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몇몇 단원들은 아까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나와 인사를 나누길 원했고, 음악적 수준에 대해 알아보려 했다.

“첫 합주에서 이 정도라면 열흘 후가 기대되는군요.”

“오케스트레이션도 배운 적 있습니까?”

단순히 내 이력이나 향간의 이야기로 말을 걸던 것과는 또 다른 상황이었다. 실력으로 어느 정도 인정받고 나니 보다 이들 사이에 더 잘 어울려 들 수 있을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정신없이 단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던 시어도어가 내 옆에 다가오더니 웃으며 말했다.

“듣던 것보다 훨씬 더 우수하던데요. 타티아나.”

그의 눈빛 역시 많이 달라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해 보겠다고 나선 날 반신반의하는 것 같았지만, 이젠 정말 믿음밖에 보이지 않는다.

“감사합니다.”

“피아노 파트만 잘 연주해 주었어도 충분했을 텐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시어도어는 내 연주 영상 등을 보고 솔리스트로서의 기량만을 생각했는데, 갑자기 총보를 읽고 연주까지 하니 깜짝 놀란 것 같다.

작년에 내게 총보독법이 필요할 거라면서 가르쳐 주신 구세프 선생님이 어디까지 내다보신 것인지……. 날 진득하게 가르치면서 협연자로서의 역량도 키워 주신 게 이제 와서 정말로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감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협주곡 연습에 집중하라면서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신 미하일 선생님도.

“절 가르치신 선생님들 덕분이에요.”

“겸손하시긴.”

시어도어는 씩 웃으며 장난스레 그리 말했지만 난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방금 있었던 연주는 선생님들과 내 작품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저 혼자선 불가능했을 거예요. 시어도어가 바이올린으로 현악부 전반을 그렇게 맡아 주신 덕분에 연주하는 데에 무리가 없었어요.”

“예? 하하하, 칭찬 고맙습니다. 타티아나.”

난 혼자서도 협주곡을 편곡하여 연주할 수 있다. 하지만 현악기가 제대로 가미된 풍부한 사운드를 내진 못했으리라.

시어도어가 제대로 해 주었기에 리허설임에도 흡족한 음악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휘를 맡아 주신 김성조 지휘자님도.

“…….”

난 저편에서 악보를 보고 있는 지휘자님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왜 갑자기 리허설을 하자고 했는지, 그리고 왜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선택했는지 곧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믿고 최선을 다해 따라간 결과는 이렇게나 좋았다.

이건 한 집단을 이끄는 지휘자들이 지녀야 할 필수적인 요소이기도 했다.

단순히 무대 위에서 지휘를 정확하게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 수십 명을 사로잡을 수 있는 카리스마와 상황과 연주자들에게 알맞은 곡을 찾아내는 실력까지.

그 모든 것들은 겉으로 한눈에 알아보기 쉽진 않지만, 그 결과로서 완벽하게 증명되곤 한다.

믿음을 받아내겠다는 말을 지켜낸 것이다.

“자.”

보던 악보를 탁 덮은 지휘자님은 짧게 한 마디 하는 것만으로도 어수선하게 각자 이야기를 나누던 분위기를 집중시켰다.

이미 단원들에겐 이 객원 지휘자가 곧 열흘 후까지 자신들을 이끌 선장이었다.

항로를 체크한 선장이 지시하듯, 지휘자님은 확고한 목소리로 모두에게 말했다.

“그럼 열흘 후 있을 무대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 볼까요.”

그리고 지휘자님은 벽에 걸린 화이트보드에 마커로 칸을 열 개 나눠 그려 놓고는 스케줄표부터 짜기 시작했다. 앞으로 열흘 동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간략한 기획이었다.

원래는 객원 지휘자님에게 이런 프로그램 스케줄을 총괄하는 음악감독 자리까진 잘 맡기진 않는다. 하지만 이번엔 상임지휘자께서 입원하여 아예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음악감독직까지 맡으신 것 같았다. 잘 없는 일이기도 하고, 그만큼 부담이 가는 상황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김성조 지휘자님은 전혀 어려워하는 일 없이 척척 스케줄을 채워 나갔다. 대충 하는 것 같은데도 합리적이고 면밀한 구성이 돋보인다.

그것만 보더라도 이분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휘자로 계시면서 많은 무대를 이끌었고, 또 성공시켰는지 알 것 같았다.

“일주일에 연주회를 세 개씩 해치우는 오케스트라들도 있습니다. 우리에겐 열흘이나 있죠. 협연임을 감안하더라도 문제없습니다.”

앞으론 스케줄대로 하겠다고 말하며 완고한 어투로 이 상황에 대한 불안 등을 모조리 잠재운 지휘자님은 그다음 곧바로 리허설에 들어갔다.

날 빼고 오케스트라들만 하는 레퍼토리 리허설이었다. 특정 협주곡들에 대한 특정 악장과 프레이즈 등이 몇 개나 연달아 지나갔다.

“세컨드 오보에, 음정 정확히.”

그 어지러운 와중에도 지휘자님은 수십 명의 단원들을 한 명 한 명씩 정확하게 캐치해 내며 음악을 다듬고 통일성을 갖추도록 했다.

이미 다른 지휘자들이 이렇게 초인적인 예리함으로 오케스트라를 정렬하는 걸 몇 번 봐 오긴 했지만, 그래도 늘 새롭고 놀라웠다.

시간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난 피곤함을 느낄 새도 없이 모든 시간에 집중하며 하나도 허투로 흘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흠.”

그렇게 첫 만남부터 리허설까지 약 2시간 정도.

지휘자님은 시계를 확인하더니 가볍게 손을 휙 저으며 말했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하도록 하죠.”

7시 정도이니 슬슬 단원들은 퇴근해야 할 시간이긴 했다.

하지만 악장 시어도어는 연습시간을 더 늘리는 게 낫지 않겠냐고 은근히 종용했다. 일정이 촉박하면 늦게까지 연습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니.

“괜찮겠습니까?”

“뭐…… 여러분들의 기량이나 조화는 며칠이면 충분히 무대에 올릴 만큼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지휘자님의 판단에 그런 늦은 연습이 당장 필요한 것 같진 않았다.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프로들의 집단이고 준비되어 있는 레퍼토리들도 많다. 중요한 건 이제 이 준비된 요소들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였다.

“오늘 이렇게 본 것으로 프로그램을 밤새워 준비하는 건 객원 지휘자이자 음악감독 촉탁인 제 역할이겠죠.”

열흘간은 지휘자보다 음악감독으로서의 역할이 더 중요하기도 했다. 무대에 올릴 음악을 빨리 선택해야 연습에 오케스트라를 집중시킬 수 있다.

이건 다른 단원들이 도와준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오롯이 지휘자님에게 맡겨진 일인 것이다.

그래도 뭐라도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을까 싶어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지휘자님은 내 쪽을 보시더니 픽 웃었다.

“우리 협연자도 먼 길 오셔서 피곤할 텐데. 쉬셔야지.”

“전 괜찮은걸요.”

“체력이 좋으시군요. 젊어서 그런가?”

요즘 들어 처음 듣는 말이 참 많다 싶다.

농담 어린 칭찬이겠거니 싶어 감사로 답하려 하는데, 지휘자님이 이어 말했다. 이제 막 생각났다는 듯한 투였다.

“쉬어야 한다고 말해 놓고 이런 말 하자니 우습긴 한데, 혹시 괜찮은 거라면 잠깐 저와 차나 한잔 하겠습니까? 멀리서 온 사람들끼리.”

“……제가 지휘자님과요?”

“싫으면 말고요.”

“아, 아뇨! 좋아요. 차 정도는…….”

객원 지휘자와 협연자가 친목을 다지기 위해 차를 마시거나 이야기를 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상황을 피하려 하거나 부담스러워해선 안 된다. 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자님은 옅게 웃더니 날 제외한 다른 단원들에게 말했다.

“자, 그럼 돌아가고. 내일은 오전에 일찍 모입니다. 빠지지 말고, 늦지 말고. 가급적 모두 모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본격적인 리허설이 바로 들어갈 것 같으니…… 로스 씨. 오늘 없는 단원들도 잘 부탁해요.”

“예, 지휘자님.”

“내일 뵙죠.”

“고생 많았습니다. 다들.”

여기저기에서 인사들이 오가고, 악기들을 챙기는 소리로 분주해졌다. 자연스럽게 내게도 인사해 오는 단원들이 있었다. 나 역시 내일 또 보자는 답인사로 그들을 보냈다.

단원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곧 나와 지휘자님만이 연습실 안에 남았다.

갑자기 음악도 사람들도 사라지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멍하니 서 있는데, 한 목소리가 내 신경을 빼앗아 갔다.

“나가죠. 타티아나.”

“아.”

난 급히 가방을 챙기곤 먼저 나가는 지휘자님의 뒤를 따라 나섰다.

건물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빅토르가 내 옆으로 따라붙었다. 지휘자님은 걱정 말라는 듯 편안한 어투로 말했다.

“요 옆 카페에서 차만 한잔 마시려 합니다. 괜찮겠죠? 경호원 씨.”

“……그리하시죠.”

빅토르는 내 눈치를 힐긋 보더니 쉽게 허락했다. 이미 이분이 지휘자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홀 밖으로 나오니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차들이 빽빽하게 도로를 틀어막고 있었다. 길 건너로는 커다란 건물, 프리모르스키 주청이 보인다.

복잡한 도심 한가운데에 뚝 떨어진 기분이 들어서 잠시 주위를 살피는데, 지휘자님이 이쪽이라며 날 불렀다.

카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걸어서 몇 분 정도. 코너에 위치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아늑한 분위기의 카페가 있었다.

“…….”

테이블에 마주앉아 가방을 내려놓고 나니 뭔가 어색하기만 했다. 영어나 다른 언어를 쓸 것도 아니고 러시아어로 편하게 하면 되니까 그리 대화에 어려울 것도 없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머뭇거리는 날 보던 지휘자님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차는 어떤 걸로?”

“디카페인 허브티면 되어요.”

“그럼 캐모마일로 하죠.”

주문을 마치고 나서도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평소 캐모마일을 즐겨 마시는 편이기도 하니까 차 이야기로 서서히 이야기를 해도 될 텐데, 어쩐지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지휘자님은 내가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불편하기보단 조금 재미있어 보인 모양이었다. 흥미롭다는 미소가 이쪽으로 향한다.

“피아노를 다룰 땐 단원들을 양손에 쥐고 쥐락펴락하더만, 이제 와서 시치미 뚝 떼고 그러고 있어 봐야 소용없습니다. 타티아나.”

“제가 무슨…….”

“긴장 푸시죠. 전 그냥 포스트 없이 떠돌아다니는 객원 지휘자일 뿐이니까.”

오케스트라에 소속되어 있던 건 예전 일인가 보다. 하지만 떠돌아다닌다고 해서 그게 흠결이라 할 순 없었다.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세상엔 각자의 이유로 자유로운 음악활동을 하는 음악가들도 많았으니까.

난 그냥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김성조 지휘자님은 스스로를 조금 더 낮추는 것처럼 덧붙였다.

“한국인 객원 지휘자는 좀처럼 보기 힘들 텐데, 그래서 어색해하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그, 그렇진 않아요.”

이미 러시아 최고의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모스크바 필하모닉도 한국인 객원 지휘자가 몇 번이나 지휘한 적 있었다. 그리 이상할 건 없었다.

단지 지금 내가 친근하게 다가가지 못하는 건 내 개인적인 감정들의 문제였다. 자연스럽게 대해야 한다고 의식하기 시작하니 역설적으로 모든 게 어색하게 되어 버리는, 그런 바보 같은 문제일 뿐이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아무렇지도 않게 되리란 확신은 있었지만, 지금 당장 더듬거린다는 게 너무 창피했다. 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그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뭘 어떻게 합니까? 하하하.”

“어떤 대화를…….”

“대화 주제랄 게 있습니까? 타티아나와 제 사이에 교집합이랄 게 음악 외엔 있을 리가 없는데. 음악 이야기나 하면 되죠.”

“…….”

나이 차이가 두 배 넘게 나는 중년 음악가와 할 이야기라곤 음악뿐일지도 모르겠지만, 난 스타니슬라프 같은 분을 대할 때도 이렇게까지 어려워하진 않았다. 사적인 이야기도 잘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무 생각도 안 든다.

주문한 차는 언제 나오는 걸까. 그냥 방금 했었던 리허설에 대한 이야기나 할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또 멍하니 있었더니, 지휘자님이 천장의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 말고도 있긴 합니다.”

“예?”

내가 고개를 들고 되묻자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연락 받고 하루 만에 이렇게 날아와 준 게 고맙기도 하고…… 역시 미하일에게 들은 대로다 싶어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선생님을 아시나요?”

“음, 예전에 협연을 한 적 있었죠.”

생각 못한 이름을 듣게 되어 놀란 내가 묻자 지휘자님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20년쯤 되었던가.”

어마어마하게 옛날이었다. 수백 년도 전에 사람들이 음악을 했다는 건 상상할 수 있어도 불과 20년 전에 미하일 선생님과 여기 있는 김성조 지휘자님이 음악을 했다는 건 뭔가 상상도 잘 안 갔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이네요……?”

“아, 그땐 저도 미하일도 젊었죠. 우크라이나에서 첫 협연을 하는데 이 양반이 그때 얼마나 콧대가 높았는지…….”

내가 모르는 미하일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 흥미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더 이야기해 달란 눈빛으로 바라보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지휘자님이 웃었다.

“아무튼 이 바닥에 있으면 재미있는 일 자주 겪습니다. 객원으로 급하게 초빙받은 오케스트라에 왔더니 옛날에 함께 협연했었던 피아니스트의 제자가 협연자로 올라와 있기도 하고…… 참 세상 좁구나 싶죠.”

세상은 정말 넓지만 생각보다 좁기도 하다.

예전 사사했던 교수님의 제자가 내 친구가 되겠다고 다가왔을 때, 난 인연이라는 것의 강함을 느끼면서 조금은 무섭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미하일 선생님을 아는 분을 만날 수 있다는 건 기쁘게 마주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난 이전보다 조금 더 경계를 내려놓고, 미하일 선생님의 제자로서 이야기를 경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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