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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684화 (684/1,277)

##  684화

서로 공유할 이야깃거리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내 이야기가 아닌 미하일 선생님의 이야기로 주제가 넘어가면서, 어색한 분위기도 옅어지고 이야기하기에 편해졌다.

그렇게 듣게 된 선생님의 젊은 시절 이야기는 생각보다 파격적이었다.

자기 고집이 아주 완고해서 오케스트라와 조화가 잘 안 되는 부분을 변경해 주길 요청해도 그저 무시해 버리기 일쑤였고, 때문에 걸핏하면 지휘자나 단원들과 싸우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 그 온화한 모습을 생각하면 상상도 안 가지만, 선생님은 젊은 시절 까탈스러운 연주자로 꽤 유명했었던 것 같다. 반대로 구세프 선생님이야말로 어떤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더라도 완성도 높은 연주로 모두를 만족시켰다고 하시고.

나이가 들면서 성향이 바뀌신 건가 싶었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말도 잘 못하던 날 중앙음악학교로 데리고 간 건 바로 미하일 선생님이었다. 그것도 그 무서운 아버지와 직접 담판을 지으면서까지.

아마 어지간한 담력으론 그런 건 엄두도 못 냈을 테지.

그런 모습들을 생각하면 미하일 선생님이 젊었던 시절 꽤 대단하셨다는 건 믿을 만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특히 당시 악장과 사이가 별로 안 좋았었죠. 같이 식사도 안 할 정도였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내 선생님이라는 것도 잊고 막 나가는 한 연주자의 일화처럼 듣고 있었다. 그래서 웃으며 맞장구를 쳤는지도 모르겠다.

“아하하, 정말요?”

“정말이죠. 한 번은 결국 악장이 못해먹겠다면서 리허설 중에 보면대를 차고 나갔는데, 중간에 끼어 있던 전 어떤 기분이었겠습니까?”

가만 생각해 보니 지금 즐겁게 들을 때가 아니었다. 난 나도 모르게 어깨를 옹송그리며 말했다.

“어…… 그건 정말 난감하겠네요…… 죄송해요.”

“왜 타티아나가 죄송해합니까?”

“그러네요……?”

제 선생님이라서요? 하지만 이미 내가 없던 시절에 벌어졌던 일이니까 전혀 상관없었다. 난 이상한 사과를 한 것에 대해 설명하기 어려워서 괜히 찻잔만 홀짝였다.

지휘자님은 피식 웃더니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의 시간대를 과거에서 현재로 되돌렸다.

“아무튼 재미난 일들이 많았죠. 그런데 어제, 정말 간만에 연락이 와서 받아 보았더니 타티아나의 이야기를 하더군요.”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로부터 요청을 받은 게 먼저고, 그다음 객원 지휘자를 확인한 다음 연락을 취하신 것 같다.

객원 지휘자가 아는 사람이라고 내게 미리 말씀해 주시지 않은 건 아마 이러한 친분을 밝히는 걸 온전히 상황에 맡기기 위하기 따름이었겠지. 선생님은 음악에 대해서만큼은 엄한 분이시니까.

만약 내가 리허설을 망쳐 놓았다면 김성조 지휘자님은 지금 이런 이야기들을 내게 해 주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전화를 하신 거라면 다른 부탁도 하신 게 아닌가 싶어서 살짝 떠보듯 물어보았다.

“혹시 혹독하게 리허설 하라던가…… 그런 말씀을 하신 건가요?”

“아뇨?”

지휘자님은 무슨 소리냐는 듯 웃더니 손을 내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잘 부탁한다면서, 자기 무대를 할 때도 그런 말 잘 안 하던 사람이 그런 말을 합디다.”

“……그런가요.”

“농담도 못 하겠더군요.”

나도 농담을 못 할 것 같다.

미하일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욕심도 있고 혹독한 면도 있는 분이시다. 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곧바로 무대 위에 세우려 한다. 예전부터 난 그 기대에 몇 번 떠밀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만큼 따뜻한 정열을 지닌 분이시기도 했다. 음악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내가 영향을 받아왔는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말없이 고개를 숙이자 지휘자님이 이어 말했다.

“아무튼……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을지 궁금했죠. 실력이야 영상으로 봤으니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무대 뒤에서 어떻게 하는지는 잘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죠.”

성격 이야기가 나오다 보니 날 어떻게 보셨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음악 외적인 평가에 대해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서, 일부러 찻잔에 시선을 두고 귀만 열어두었다.

지휘자님은 간단히 평했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까…… 앞으로도 여러 오퍼offer 많이 받겠다 싶네요.”

“오퍼요?”

“어느 지휘자라도 타티아나 같은 연주자라면 함께 하고 싶어 할 테니 말이죠.”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칭찬이었다. 연주회를 끝낸 것도 아닌데 이런 말을 들어도 되나 모르겠다.

내가 칭찬에 기뻐하면서도 조금 의아해한다는 걸 느꼈는지 지휘자님이 차근차근 설명을 덧붙였다.

“일을 결정한 지 하루 만에 도착한 것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내가 빠르게 움직인 것만 놓고 시어도어는 날 굉장히 높게 평가해 주었지만, 지휘자님은 그 부분에 대해선 훨씬 담백했다.

하기로 한 일이 급박하게 느껴진다면 서두르는 건 당연하다. 쓸 수 있는 조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중요한 건 직접 본 뒤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리허설에 끌어들였을 때도, 타티아나는 불평이나 의문 하나 없이 제 의사에 따라주었죠. 그것도 악장도 함께 데리고.”

난 가만히 지휘자님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입장을 바꿔 지휘자 입장에선 정말 좋은 협연자였다. 따로 협조를 구하거나 심지어 달랠 것 없이 그냥 음악만 툭 던져 둔다면 뭐라도 알아서 하려고 하니까.

그 음악이 합리에서 많이 벗어나 있지만 않다면 난 그리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다루기 쉬울 테니, 함께 하고 싶어 할 만한 연주자라 평할 만한가?

“그건…… 제가 편리하다는 뜻인가요?”

“직설적이군요. 그렇게 받아들였습니까?”

딱히 잘못 이해한 것 같진 않은데, 지휘자님은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다시 이야기했다.

“전 타티아나가 같은 동료로서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하려 했습니다.”

말만 살짝 바뀐 게 아닌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이어진 질문은 꽤 예리했다.

“하나 묻죠, 타티아나. 제 리허설 제안을 곧장 받아 주신 게 제 기분을 살피거나 분위기를 좋게 하기 위해서 했던 겁니까?”

“……?”

전혀 그렇지 않았다.

리허설 현장의 분위기도 굉장히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난 단지 어느 정도 예상했던 부분이 있었으니 때마침 잘 되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아니에요.”

“그럼 왜 그랬습니까?”

“……우리가 어떤 음악을 할 수 있을지 저도 궁금해서요.”

잘 모르는 음악가들이 만나서 교류를 할 땐 말보다 음악이 훨씬 편할 때가 많다. 그 결과물 역시 말이 아닌 음악이기에 시작도 음악으로 하는 게 빠르기도 하고.

“그렇죠.”

지휘자님은 고개를 까딱여 내 말에 동의하고는, 의자를 젖히며 살짝 위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간혹 분위기가 틀어지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속으로 불만이 있더라도 참고 응하죠. 정말 고마운 분들이지만 결정적으로 언젠가 그 불만이 터지는 날이 오곤 하죠.”

수많은 오케스트라들을 거쳐 오면서 겪은 경험 같은 이야기였다. 여러 사람들을 이끌게 되면 자연스레 깨닫게 되는 부분들. 그 점들에 대해 지휘자님은 조심스레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로지 완성된 음악이라는 하나의 목표만을 놓고 스쳐 지나가는 모든 과정들을 받아들이는 분들도 있습니다. 리허설은 물론이고 논쟁 역시도 하나의 과정이라 여기는 분들.”

위쪽을 바라보던 시선은 서서히 내려오더니 내게로 향했다. 난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지휘자님은 기분 좋게 웃더니 말했다.

“전 리허설을 받아들일 때 타티아나의 표정을 봤습니다. 약간 즐거워하더군요. 사실 그건 까다로운 주문이었는데도.”

곡을 정하지도 않고 바로 악장과 리허설. 그것도 단둘이서 총보 연주를 하라는 건 꽤나 부담스럽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난 그간 연습해 온 내 시간들을 믿고, 또 시어도어라는 연주자를 믿었기에 거기에 응했다.

그렇게 한 세 명의 리허설이 그 무엇보다 빠르게 우리들을 엮어 주고 열흘 후 무대를 완전하게 하리라 생각했기에.

지휘자님은 테이블을 툭 치며 말을 이었다.

“때문에 미하일이나 타티아나는 후자에 가깝다 생각합니다. 그런 연주자는 생각보다 찾기 쉽지 않죠. 그것도 협연자라면 더더욱.”

협연자는 이미 완성된 오케스트라에 끼어드는 이방인에 가깝다. 당연히 분위기에 휩쓸리기도 쉽고 색을 잃기도 쉽다.

그 부분에 대해선 적어도 걱정하지 않는다고, 나란히 갈 수 있는 음악가 동료로써 인정한다고. 지금 지휘자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었다.

난 가볍게 웃어 보였다.

“칭찬 감사합니다.”

“하하, 오해하지 않아서 다행이군요.”

“사실 편리하게 여기셔도 상관없다 생각하긴 해요.”

다루기 좋다고 생각하더라도 음악만 할 수 있다면 사실 별 상관 없기도 해서, 농담처럼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지휘자님은 내 농담을 받아 주지 않고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더니, 미하일 선생님 쪽으로 다시 이야기의 방향을 살짝 틀어놓았다.

“미하일이 걱정이 많은 것 같던데, 직접 오지 못하게 된 건 아쉽군요. 나중에 전화나 한 통 해 줘야겠습니다.”

국적도 전공도 다른 두 음악가임에도 그 사이의 친밀함이 느껴지는 것 같다.

난 그런 부분이 조금 부럽기도 했다.

지금도 한승우나 임세연 같은 아이들과 친하긴 하지만, 항상 어느 부분에서 경계하고 말 것 같단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난 잠시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가, 지금은 연주회보다 더 중요한 게 없다는 것을 깨닫곤 고개를 들었다.

지휘자님은 느긋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연주회 잘해 봅시다. 타티아나.”

“예, 지휘자님.”

“오늘은 푹 쉬도록 하고요.”

푹 쉬는 것도 좋겠지만 지금 이 시간이면 모스크바는 몇 시일지, 난 머릿속으로 그런 계산을 하고 있었다.

***

오후 2시. 사무실에서 밀린 행정업무 등을 처리하던 미하일은 익숙한 번호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사실 오늘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었던 전화이기도 했다.

화면을 누르자 익숙한 목소리가 밝게 들려왔다.

- 선생님.

“그래, 타티아나. 도착은…… 아까 했겠구나.”

- 예, 잘 도착했어요. 미팅도 잘 마쳤고요.

하루 만에 동쪽 끝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 버려서 내심 걱정이 많았는데, 별일 없는 것 같아 천만다행이었다. 미하일은 들리지 않도록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목소리 들으니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구나. 하하.”

- 다행이에요.

타티아나는 되도록 선생의 걱정을 사지 않으려 하는 상냥한 성격의 학생이었다. 그 때문에 이렇게 전화까지 해 준 것이겠지. 늦은 저녁일 그쪽 시간을 생각하면서, 미하일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 타티아나가 문득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을 건네 왔다.

- 지휘자님에게서 말씀 들었어요.

그 말만으로도 미하일은 상황을 얼추 파악할 수 있었다.

애초에 김성조 지휘자에 대해선 타티아나에게 말해 놓지 않았다. 딱히 안다고 해서 연주회에 도움이 될 이야기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었다.

김성조 역시 그 뜻을 안다면 타티아나에게 괜히 친한 척하지 않고 철저하게 객원 지휘자와 협연자의 관계로서 좋은 연주회를 위하는 데에 집중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 친한 척을 해 버렸나 보다.

상황을 반쯤만 이해한 미하일은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해져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타티아나에게 물었다.

“그래? 무슨 이야기?”

- 예전에 자주 싸우셨다는 이야기요.

“큽, 뭐…… 뭐?”

태연하게 목을 축이던 미하일은 순간 찻물을 뿜을 뻔했다.

그냥 친한 척을 한 게 아니라 아주 뒷담을 제대로 해 버린 것 같다. 미하일은 찻잔을 떨어뜨리기 싫어서 얌전히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옆머리를 짚었다.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소릴…… 타티아나. 무슨 말을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다 잊거라. 그리고 90년대엔 원래 다 그렇기도 했…….”

- 후후.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으려 하자 타티아나가 나지막이 웃었다. 그리곤 부드럽게 부탁하듯 이어 말했다.

- 돌아가면…… 그때 이야기를 더 해 주세요. 제가 모르는 이야기들요.

“재미없을 텐데.”

- 선생님에게서 직접 듣고 싶어요.

“……타티아나.”

타티아나가 김성조에게 들은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전한 건 뒷담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순진해서가 아니었다. 모든 걸 알면서도 흥미를 느끼고, 또 더 알고 싶어 하기 때문이었다.

미하일은 사실 조금 난처했다.

보통 학생들이 이런 걸 궁금해하나? 선생의 이야기 같은 건 해 주려고 해도 인상이나 쓰는 게 요즘 애들이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이전부터 선생들에게 보이는 관심이 조금 많은 편이긴 했다. 구세프는 그것을 두고 선생들에게 의리가 깊다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미하일은 약간 다른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마치 무언가에 대한 보상과도 같은 느낌.

하지만 그런 걸 직접 물어볼 순 없었다. 기억이 사라지는 일도 겪었던 아이니까 평범한 아이들과는 약간 다른 특별한 면모가 있을 뿐이라 생각하면서, 미하일은 농담조로 말했다.

“그때 가서 옛날이야기나 하는 늙은 선생이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

- 아하핫, 그럴 리가요?

“그래…… 그리고 킴이 이야기 하는 건 다 흘려듣거라.”

- 제 지휘자이신데요?

“음악은 새겨듣고.”

- 후후, 알겠습니다.

타티아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씩씩하게 답했다. 미하일은 내심 했었던 걱정이 또 한 번 쓸려 내려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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