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85화 (685/1,277)

##  685화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니 내 방이 아니었다.

푹신한 이불을 반쯤 걷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모던한 디자인의 가구들과 벽에 걸린 텔레비전이 보인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동안 머물기로 한 호텔방이었다.

“…….”

아직 이른 시간 같았지만 기지개를 켜면서 정신을 차려보았다. 어제 이곳에 도착해서 본 것들, 만난 사람들, 들었던 음악들. 모든 것들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다.

다시금 내가 여기에 왜 있는지 돌이켜 본 난 비로소 똑바로 고개를 들었다.

평소 습관처럼 컨디션을 확인했다. 어제 긴 비행과 리허설, 그리고 시차로 인해 흐트러진 패턴 등이 문제가 될까 싶었지만, 편안한 잠자리에서 잘 잔 덕분인지 그런 문제는 느껴지지 않았다. 목만 조금 마를 뿐이다.

그 상태로 목과 허리를 스트레칭하기도 하고, 간밤에 연락이 온 것이 있는가 스마트폰을 확인하기도 했다.

내게 연락할 만한 사람이라 해 봐야 몇 명 없지만, 마지막으로 온 아나스타샤의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 잠들기 전에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던 것이다.

그게 6시간 전이었지만 아나스타샤는…… 아마 지금도 깨어 있겠지?

모스크바의 시간을 거꾸로 계산해 본 나는 괜찮겠지 싶어서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주무시나요? 아나스타샤.]

5초도 되지 않아 답장이 날아왔다.

[아니.]

그리고 다시 무어라 메시지를 보내기 전에 전화가 걸려왔다. 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아나스타샤는 묘하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마치 잠들어 있는 사람에게 말하는 투였다.

- 일어난 거야?

“예, 이제 막.”

- 잘 잤니?

“덕분에요.”

- 내가 느끼기로는 방금 전에 잔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하하, 그렇게 느껴지죠?”

그녀 입장에선 저녁 시간을 보냈을 뿐인데 내가 자고 일어났다고 하니까 조금 묘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부턴 반대다. 잠시 후에 그녀가 잠든다 해도 난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을 테니까.

“아나스타샤도 곧 주무시면…… 음, 이따 전화해 드릴까요?”

- 아니, 괜찮아. 한창 정신없을 시간일 텐데.

내가 어디에 무엇을 하러 왔는지 잘 아는 아나스타샤는 내가 필요한 일 외에 다른 곳에 신경을 쓰길 바라지 않는다.

그녀는 짤막하게 오늘 내 일정을 물어보았다.

- 몇 시에 오케스트라 사람들 만나기로 했니?

“10시에요.”

- 그럼 아침엔 뭐 하면서 보내려고?

“특별히 다른 계획은 없어요.”

도시를 돌아본다거나, 가까운 미술관 등에 가 볼까 했지만 이렇게 이른 시간엔 문을 연 곳도 별로 없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뿐이었다.

“일찍 가서 연습해야죠. 피아노 연습실은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허락도 받아두었어요.”

- 아침부터 가도 된대?

“예. 게다가 피아노도 브랜드별로 4대나 있어요. 어서 가서 만져 보고 싶어요.”

사진으로 본 블라디보스토크의 관광명소들도 훌륭한 곳이 많았지만, 그보다 프리모르스키 콘서트홀의 피아노 리허설 룸에 가 보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다.

미술관 등에선 미술품을 만져 볼 수 없지만, 피아노는 내 마음대로 만질 수 있으니까 더더욱.

여러 대의 피아노를 연주해 볼 생각으로 신이 난 목소리가 전해졌는지, 아나스타샤도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뒤이어 물었다.

- 결국 스타인웨이로 귀결되지 않겠어?

“보통은 그랬었지만…… 이 오케스트라의 사운드엔 뵈젠도르퍼를 써 봐도 괜찮을 것 같아요. 여러 가지 써 보려고 해요.”

- 그러니?

악장 시어도어는 내게 리허설룸을 상시 들어갈 수 있게 해 둘 테니 언제든 가서 마음대로 피아노를 연주해 보라고 했다.

오케스트라의 음악은 이제 들어 봤으니까 다양한 피아노를 연주해보고 내가 쓸 피아노를 골라 보라는 뜻이었다.

선택권이 주어졌지만, 난 그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보통 피아노 협주곡 콘서트는 주연이 될 협연자의 취향과 해석을 많이 존중해 주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협연자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오케스트라와 보다 잘 어우러질 수 있는 피아노를 택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 뵈젠도르퍼의 음색이 아른거리긴 하지만,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피아노들의 상태와 음색을 확인하고 골라 볼 생각이다.

내 이야기를 듣던 아나스타샤는 연주회가 어떻게 이루어질지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직접 보고 싶을 테지. 그녀는 피아노 연주자이기도 하고, 내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하니까.

그래도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아쉬움을 풀어내기만 했다.

- 내가 가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저도 아쉽지만, 괜찮아요.”

- 응, 알아. 미하일 선생님도 혼자 해내라 하면서 멀리 보내신 거니까. 저번에 리빈스크에 갔을 때도 그렇고.

내가 만약 아나스타샤의 입장이더라도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무언가에 구체적으로 얽매여 있거나 한 건 아니다. 우린 원한다면 언제든지 서로를 보러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가끔은 혼자서 해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는 걸 모를 나이는 아니었다. 며칠 전 함께 사진을 찍으러 갔던 것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연주회를 관람하는 것 역시 이번엔 건너뛰기로 했다.

이런 부분에서 서로 의견이 안 맞으면 곤란했을 텐데. 그간 함께 오래 지내서인지, 우린 길게 이야기 하지 않아도 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현실적이며 적절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내가 혼자일 것이라 생각하다가 문득 떠올렸는지 말했다.

- 그 애들도 안 오는 거니?

“누구 말씀이신가요?”

- 한국에 있는 애들.

그녀는 한승우나 임세연을 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모스크바보다 서울이 더 가까울 테니까, 어쩌면 내가 그 두 아이를 초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거리가 문제였다면 난 아나스타샤에게 전용기를 보내 주었을 것이다.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예.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 그렇구나.

아나스타샤가 납득하는 게 느껴졌다. 미하일 선생님도 오지 않으시기로 했으니 난 정말 이번엔 혼자였다.

약간 외롭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나스타샤도 내게 신경 쓰는 것 외에 할 일이 많을 것이라 생각하니 괜찮았다.

“…….”

이쪽은 막 일어난 아침, 저쪽은 막 잠들기 직전의 밤.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겐 이 이상 특별히 할 만한 이야기가 없었다.

적당히 오후 즈음에 다시 전화하면 재밌는 이야기가 많을지도 모르겠다.

아나스타샤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슬슬 정리하려는 듯한 말을 꺼냈다.

- 아무튼…… 오늘도 연습 잘 해. 타티아나. 멀리에 있지만 응원하고 있어.

“잘 해낼게요.”

- 응…….

잘 생각을 하니 졸린지 아나스타샤의 목소리가 살짝 잠겨들었다. 난 저편으로 웃음소리를 흘려보내며 물었다.

“이만 주무셔야죠?”

- 넌 이제부터 연습한다는데 자려니까 기분 이상해.

“교대로 연습한다 생각하면 재미있지 않나요?”

- 그게 재밌니……?

내가 연습하다가 지쳐 잠들면 네가 일어나서 연습하는, 뭐 그런 거야? 아나스타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리더니 결국은 키득거리며 웃어 버리고 말았다. 내가 가끔 이상한 이야기를 할 때도 그녀는 잘 들어 주고 또 잘 웃어 준다.

낮게 웃던 그녀는 마음을 정했는지 조용히 내게 말했다.

- 자러 갈게.

“좋은 꿈 꾸세요. 아나스타샤.”

- 응. 또 전화할게. 무슨 꿈 꿨는지 가르쳐 줄게.

“기다릴게요.”

그렇게 전화를 끊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

너무 조용했다. 내가 혼자 머물기에 굉장히 비싼 이 호텔 방은 방음도 굉장히 잘 되는 것 같았다. 정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다시 침대에 스르륵 흡수되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나약하진 않다.

난 텔레비전을 틀어놓았다. 대강 아무 채널이나 돌려 놓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침대에서 뛰어내린 나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욕실로 향했다.

***

호텔 조식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프리모르스키 필하모닉 홀까지 걸어갔다. 빅토르는 차를 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지만 난 가볍게 산책삼아 걷겠다고 답했다.

“…….”

호텔 주변 번화가라 그런지 커다란 건물들과 아침부터 돌아다니는 차량 등으로 주변은 복잡했다. 난 흥미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걸었다. 가끔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아침은 모스크바와 다른 느낌이었다. 분주함은 비슷하지만 조금 더 자유로운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 분위기. 바다와 가까워서 그런지 공기의 냄새도 무언가 다른 듯했다.

문득 호텔의 창문으로 보이던 바다가 생각났다. 모스크바에선 바다를 보기 어렵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다에 잠깐 들렀다 가도 되냐고 빅토르에게 물어볼 걸 그랬다. 이제 와서 다시 전화로 부르거나 걸어서 가자니 많이 늦어 버렸지만…….

당장 꼭 가야 하는 건 아니니까 나중에 가 보기로 하고, 천천히 길을 따라 걸었다.

“후.”

30분 정도 걷자 어제 보았던 커다란 주청 건물이 먼저 보였다. 다 왔다는 뜻이었다.

코너를 돌아 두 블록 정도 더 가니 목적지인 프리모르스키 필하모닉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입구로 들어선 난 직원분에게 물어보았다.

“피아노 리허설을 하러 왔어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예요.”

“아, 말씀 들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오신 협연자이시죠? 가장 좋은 리허설룸을 쓰실 수 있게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그냥 위치만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직원분이 앞장서서 날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복도를 돌아 몇 개나 되는 방을 거치니 이윽고 피아노 리허설룸이라고 쓰여 있는 방이 보였다. 아마 안내 없이 혼자 찾았다면 약간 헤맸을지도 모르겠다.

직원분이 문을 열어 주었다. 그 안으로 들어선 난 눈을 크게 뜨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냥 말로만 듣기로 작은 리허설룸에 피아노가 4대 정도 있다고 했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 내게 있어선 천국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스타인웨이, 뵈젠도르퍼, 야마하, 벡슈타인. 모두 유명한 피아노 브랜드의 콘서트 모델들이었다. 난 한눈에 이 피아노들이 얼마나 좋은 모델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기뻐하는 걸 느꼈는지 직원분도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모든 피아노를 사용해 보실 수 있게 위치를 조정해 놓았고…… 전반적인 메인터넌스는 어제 저녁에 해 놓았으니 별 문제 없이 사용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 감사합니다.”

이미 내가 쓴다는 말을 듣고 조율도 해 놓은 것 같았다. 이런 편의도 시어도어가 봐 준 덕분이겠지. 나중에 그에게 정말 감사해야 할 것 같다.

내가 피아노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살피고 있자 직원분은 가볍게 웃더니 자리를 비켜 주었다.

“혹시 사용하시다가 문제가 느껴지시거나 문의사항이 있으시다면 바로 저쪽 벽에 걸려 있는 인터폰으로 전화 주세요. 제가 바로 오겠습니다.”

문이 살며시 닫히고, 난 피아노들 앞에서 무엇부터 연습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물론 뵈젠도르퍼로 어제 이야기했었던 고전 음악들부터 해 볼 생각을 하고 왔지만, 막상 이렇게 보니 욕심이 생긴다.

난 일단 가까이에 있는 스타인웨이부터 만져 보았다. 가장 익숙한 것부터 얼마나 내가 알고 있는 그 익숙함에 부합한지 느껴 볼 생각이었다.

첫 곡 역시 협주곡이 아닌 내가 자신 있는 라흐마니노프의 연습곡의 독주 연주로 시작된다.

자연스럽게 아르페지오로 건반을 오르내리면서 그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감각들을 되새겼다. 그리고 그 감각이 사라지기 전에 다른 피아노에 앉아서 똑같은 방식으로 건반을 연주했다.

건반의 재질부터 해머의 무게까지 모든 게 다르다. 이 정교한 기계를 다루기 위해선 연주자 역시 정교한 기술과 감각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난 더더욱 집중해서 건반을 어루만졌다. 마치 예술품을 놓고 감정하는 감정사가 된 기분이었다.

“…….”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피아노를 돌아가며 연습인지 놀이인지 모를 시간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문에서 노크 소리가 똑똑 들렸다.

난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들었다. 이미 10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급히 문을 열어 주자 거기엔 김성조 지휘자님이 짙은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아침부터 지휘자님을 마주하니 나도 모르게 약간 긴장되었다.

“연습 중에 방해한 건 미안하지만, 이제 단체 연습을 해야 할 때라서요.”

“아…… 알아요. 죄송해요.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 몰랐어요.”

“하하. 집중력 좋네요.”

약간 어색하게 바라보자 지휘자님은 부담스럽게 다가오진 않겠다는 듯 살짝 물러나며 말했다.

“그럼 같이 갈까요? 아니면 저 먼저 가 있을까요.”

연습에 빠져 있는 협연자를 직접 찾으러 와 주셨는데 먼저 가시라고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예의가 아니었다. 난 고개를 젓고는 바로 대답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러죠.”

리허설룸 정리를 특별히 할 건 없었다. 내가 어지럽힌 것이라곤 건반 덮개를 모두 열어놓았을 뿐이었으니까.

처음 왔던 그대로 피아노를 정리하고, 난 지휘자님을 따라 나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