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86화 (686/1,277)

##  686화

지휘자님을 따라 오케스트라 리허설룸으로 들어서니 이미 단원들은 거의 다 도착해 있었다.

혼자 틀어박혀서 연습을 하다 보니 지휘자님과 같이 마지막에 도착한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일찍 와서 연습하고 있었다고 하자니 누군가 묻지도 않았는데 혼자 말하기 어색해서 그냥 내 자리에 가서 앉으려는데, 시어도어 앞을 지나치려 하자 그가 갑자기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돌아보니 그가 손을 들어 흔들거렸다.

“일찍 와서 연습하고 있었죠? 타티아나.”

“아, 맞아요. 어떻게 아셨나요?”

“피아노 리허설룸을 쓸 수 있게 해 드린 게 저란 걸 잊었어요? 당연히 확인도 해 봤죠. 사용하고 있는지.”

시어도어는 당연한 이야기 아니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몇 시간 전에 와 있었다는 걸 알고도 내버려 둔 것이다.

그럼 지휘자님이 오시기 전에 일찍 메시지라도 보내 주시지 그러셨어요? 전화번호도 드렸는데.

말도 안 되는 투정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데, 시어도어는 장난스레 덧붙였다.

“혼자 몰래 연습하고는 우리한테 이야기도 안 하려던 거네요?”

“??”

난데없이 시험기간에 밤샘 공부하고는 시치미 떼는 사람 취급이었다. 내가 당황해하자 그는 그야말로 배를 잡고 웃었다.

“농담입니다 농담.”

“시어도어…….”

악장과 격의 없이 지내는 건 좋은 일이라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 당황하게 하는 농담은 자제해 주었으면 좋겠다.

시어도어는 미안하다는 듯 미소를 짓더니 왜 이상한 장난을 걸어왔는지 말해 주었다.

“개인적으론 조금 놀라기도 해서요. 어제 마음대로 써도 된다도 말씀은 드렸지만, 잘 해봐야 15분에서 30분 정도 손 푸는 정도일 거라 생각했거든요.”

일반적으론 보통 그럴지도 모르겠다. 원래 콘서트홀의 리허설룸은 피아노 상태를 확인하고 무대에 오르기 전 웜업 정도를 하는 용도로 쓰인다.

“그런데 2시간이나 있어 버릴 줄은.”

“저도 모르게…….”

쓰라고 했다고 정말 염치없이 자기 개인 연습실처럼 써 버릴 줄은 나도 몰랐다. 하지만 각기 다른 모델의 피아노가 네 대나 있으니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시어도어의 말처럼 한 대당 30분씩이라 치면 딱 2시간이기도 하고.

하지만 오래 있는다고 해서 흠 잡힐 일은 아니었다. 시어도어도 손을 팔랑팔랑 젓더니 신경 쓰지 말라는 것처럼 말했다.

“아무튼, 손은 잘 풀었습니까?”

“예.”

“우리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군요.”

그는 뒤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다른 단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편하게 풀어져 있던 눈빛은 어제의 그 연주자들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모두가 준비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지휘자님은 우리 쪽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럼 오늘 리허설 시작합니다. 타티아나, 시어도어. 베토벤부터 다시 확인 들어갑시다.”

그렇게 이튿날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큰 골자는 어제 했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빠르게 곡을 준비해야 하니 기존 있는 레퍼토리 내에서 곡을 골라 지휘에 따라 연주를 해 보는 것이다.

스케줄에 따르면 내일까진 이렇게 나와 오케스트라의 음악에 대한 정보를 지휘자님에게 전해 주고, 모레부터 프로그램을 확정하게 된다.

그렇게 곡이 정해진 다음엔 지휘자, 오케스트라, 협연자 세 부류의 음악가들이 가지고 있는 음악과 해석을 하나로 만드는 본격적인 리허설이 시작된다.

시간이 길진 않지만 트러블 같은 것 없이 빠르게 잘 진행되고 있으니 분명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모두들 그렇게 적극적으로 리허설에 임하고 있었다.

악보를 넘기던 시어도어가 내게 말했다.

“이 악장은 저희가 자신있어하는 레퍼토리이기도 하죠. 혹시 찾아서 들어 본 적 있습니까? 타티아나.”

“죄송해요. 아직 없어요.”

“그럼 들어 보시면 되죠.”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몇 개 정도 찾아 들어 보긴 했지만 전부를 들어 본 것은 아니라서 고개를 저었더니, 시어도어는 시원스레 말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즉시 악기들이 준비되었다.

시어도어가 활을 긋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투티tutti로 장대한 화성이 터져 나온다. 곧바로 이 정도로 수준 높은 연주가 가능한 걸 보니 정말 이 오케스트라가 주력으로 하는 곡인 것 같았다.

악보도 지휘도 피아노도 없이 시어도어는 오케스트라의 실력을 마음껏 보여 주었다.

짤막한 연주 끝에 시어도어가 활을 하늘 위로 치켜들자 모든 소리가 뚝 멎었다. 단합된 음악가들의 행동은 종종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난 감탄하며 말했다.

“……대단해요.”

“타티아나만 괜찮다면 같이 해 보는 것도 어떨까 싶군요.”

“음…… 그럴까요.”

난 시어도어가 건네주는 악보를 들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눈으로 악보를 한 번 훑으니, 연습해 왔던 선율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다시 한번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오케스트라의 합창과 이어지는 피아노. 정확한 타이밍에 맞추어서 난 오케스트라의 템포와 사운드에 맞추어 피아노를 나란히 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튕겨져 나가 버린다. 집중하면서 피아노 건반을 타건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계단을 뛰어넘어 보다 나은 연주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암보는 하면 될 일이고, 속도도 큰 문제 없다.

중요한 건 음색.

어떻게 하면 이 역사 깊은 오케스트라에게 어울리는 연주를 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없는 리허설은 하나마나였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 최고를 모색하는 것이 우리 연주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한 프레이즈를 끝내고 손을 들어 올린 나는 결론을 이야기했다.

“피아노를 바꿔야겠어요.”

“네?”

시어도어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제가 듣기엔 문제없는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합니까?”

내가 결론을 짧게 이야기한 모양이다.

아까 그가 내게 농담을 했던 걸 돌려 줄 찬스이긴 했지만, 진지한 리허설 중에 장난을 치는 건 내 말의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난 살짝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이 피아노는 훌륭해요. 단지 뵈젠도르퍼를 쓰면 보다 좋을 것 같아서요.”

“뵈젠도르퍼요?”

“예.”

바이올리니스트라 하더라도 뵈젠도르퍼쯤 되는 피아노 브랜드를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약간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원래 뵈젠도르퍼를 썼었습니까?”

“그렇진 않아요.”

중앙음악학교의 모든 피아노는 스타인웨이다. 웬만한 다른 콘서트홀에 올라서도 우린 거의 스타인웨이를 쓰게 되고. 그만큼 피아노 연주자들에게 스타인웨이라는 브랜드의 점유율은 굉장히 높았다.

경쾌한 건반과 맑은 소리. 어떤 소리를 구사하려고 해도 잘 받아 주는 악기는 좀처럼 호불호가 갈리지 않아 좋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가끔은 음색에 변화를 주기 위해 다른 브랜드의 피아노를 써 보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아까 여러 피아노들을 비교해 보면서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고전 레퍼토리에 맞는 음색은 어떤 음색일지 연구해 봤거든요. 이렇게 직접 맞춰 보니까 점점 확신이 드네요.”

내가 오늘 아침 계속해서 머릿속에 새겨 넣었던 것이 바로 피아노들의 음색이었다.

뵈젠도르퍼는 거대한 질량감을 선사하기에 알맞다. 크기도 크고 심지어 건반의 수도 일반 그랜드 피아노들보다 많은 이 오스트리아제 피아노의 사운드는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뚫고 나오지 않고, 마치 망토처럼 어깨 주위에 두르고 그 중후한 걸음을 내딛는다.

그러면서도 높고 얇은 소리도 잘 내어 주는, 두 개의 피아노를 하나로 합쳐 놓은 것 같은 피아노였다. 그만큼 다루기 어렵다고 말하는 연주자들도 많았다.

하지만 난 피아노를 그렇게까지 따지지 않는다. 에르네스트처럼 하프시코드부터 신디사이저까지 모든 건반악기를 다룰 줄 아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피아노라면 어떤 것이든 이럭저럭 가리지 않고 쓰는 편이다.

까다로운 뵈젠도르퍼라 하더라도, 음색이 필요하다면 난 따지지 않고 그 무거운 건반을 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선택을 맡긴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제게 연습실을 내어 주신 거 아니었나요?”

“아니…… 저희에게 맞춰 달란 게 아니라, 그냥 타티아나가 선호하는 피아노로 마음껏 연습해 보란 뜻이었는데요.”

“……그런가요?”

특별히 그런 뜻은 없었나? 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시어도어를 바라보았다.

약간 놀란 기색이던 그는 곧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혹시 2시간이나 있었던 것도 피아노들을 모두 연주해보느라 그랬던 거였습니까?”

“아…… 맞아요. 그러니 한 대당 30분 정도이긴 했던 것 같네요.”

“원 참…….”

난 정말 적절한 시간을 연습에 활용했을 뿐이다.

시어도어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곧 바이올린을 옆에 내려놓으며 허리를 숙인다. 그리고 날 슬며시 올려다보며 말했다.

“하루 만에 모스크바에서 와 주질 않나, 2시간이나 피아노를 고르면서 오케스트라에 맞춰 주려 하지 않나. 이렇게까지 해 주시면 저희가 곤란한데요.”

“고, 곤란하시나요?”

“너무 기뻐서 곤란하죠.”

어쩐지 눈빛이 더 초롱초롱해지신 것 같아.

나야말로 그냥 협연자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곤란해져서 머뭇거리고 있자 그가 다시 허리를 폈다.

“아무튼, 뵈젠도르퍼?”

“음…… 제 생각엔요. 저기, 지휘자님?”

그는 내 의견을 들어줄 것 같다. 하지만 우리 둘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성조 지휘자님은 동시에 음악감독이기도 하다. 이 연주회와 오케스트라는 물론 피아노까지 모두 그의 허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내 물음에 지휘자님은 고개를 까딱였다.

“제가 음악감독 촉탁이라 묻는 겁니까?”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

잠시 동안 말없이, 그 뜻을 알 수 없는 시선이 내게 향한다.

무언가 가늠하려고 하는 것 같은 눈빛.

말은 않지만 속으로 무언가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 있는 중이란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지휘자님이 천천히 내 이름을 불렀다.

“타티아나.”

“예.”

“이번 연주회의 예술감독을 하시죠.”

“……예?”

갑자기? 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예술감독이라면 음악감독과 함께 연주회를 이끄는 직책이었다. 오케스트라에 대한 총괄적인 권리가 있진 않지만 음악적인 부분에서만큼은 음악감독에 비등할 정도의 권리가 주어진다.

악장과 협연자의 의견을 잘 수렴해서 음악감독이 혼자 연주회를 주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모든 오케스트라에 예술감독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직책이 주어진다면 공식적으로 지휘자와 곡의 해석을 놓고 토의를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넋이 나간 얼굴로 바라보니 지휘자님이 이어 말했다.

“원래는 예술감독을 따로 초빙하려 했었습니다. 전 협주곡이 아니라 교향곡이 전문이기도 해서.”

지휘자라고 해서 모든 곡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건 아니었다. 크게 나누면 오페라를 전문으로 하는 지휘자와 기악곡을 전문으로 하는 지휘자로 나누어지지만, 기악곡 중에서도 선호하는 작곡가나 곡의 형태에 따라 취급하는 전문 분야가 갈리는 것이다.

김성조 지휘자님은 짧은 시간 사이에 최대한 높은 결과물을 얻어내기 위해 또 다른 전문가를 포함시킬 생각이셨던 것 같다.

하지만 이틀 사이에 생각이 바뀌신 듯, 손을 휙 저으며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까 외부에서 따로 사람을 또 붙이는 것보단, 그냥 타티아나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게 나을 것 같군요.”

아무리 그래도…… 그냥 공석으로 두어도 괜찮은 직책을 이제 열여섯 살인 내게 맡길 필요가 있는 걸까?

스스로에게 의문이 생긴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니 지휘자님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제 말했듯, 타티아나는 음악을 어떻게 완성시켜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아는 사람 같으니 말입니다.”

지휘자님이 내게서 뭘 보셨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주위를 보니 날 제외한 그 누구도 의문을 표하지 않고 있었다.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건 나뿐이었다.

“잠시만요…… 지휘자님. 전 예술감독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몰라요.”

“전혀 모릅니까?”

“그…… 일반적인 지식 정도를 아는 정도예요.”

가끔 협연자들이 연주회의 예술감독을 겸임하기도 하는 걸 본 적은 있다. 그러나 그건 보통 연륜도 실력도 깊은 연주자들의 이야기다.

이 연주회는 내게 있어선 중요한 협연 경험이고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있어선 명예를 건 중요한 자리였다. 때문에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할 만한 상황이 아니다.

“타티아나.”

그럼에도 지휘자님은 날 믿고 더 많은 권한을 쥐어 주셨다.

“피아니스트가 예술감독일 땐 별것 없습니다. 본인이 생각하시는 최선의 연주가 어떤 것인지 저희에게 설명해 주시면 되니까.”

“…….”

“전적으로 따라가 드리죠.”

난 천천히 생각해 보았다.

단순한 협연자로 함께하더라도 난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최선의 음악을 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지휘자님께서 바라는 건 그런 내 목소리에 조금 더 힘을 실어 주는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별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제 와서 끝까지 거부하는 건 저 신뢰에 대한 무례한 대답이기도 했고.

생각을 정리한 나는 시어도어를 돌아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저도 같은 의견이에요.”

그는 굉장히 즐거워하며 그렇게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