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89화 (689/1,277)

##  689화

가끔 세연은 그녀가 사사하고 있는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오늘 레슨 받은 곡에 대해 교수님께서 숙제를 내주셨는데 양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든지, 레퍼런스로 삼을 만한 새 음반을 추천해 주셨는데 들어 보니까 정말 좋아서 내게도 추천해 주고 싶다든지.

덕분에 난 간접적으로나마 박 교수님이 잘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즐거운 목소리로 재잘거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떠올리기 괴로운 마음에 한 줄기 바람이 스며드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내 쪽에서 묻는 일은 실수로라도 없었다.

그 이상 무언가 알고자 하는 마음은 잘 억눌렀다. 내겐 그 이상을 알 자격이 없을 테니까.

“…….”

이미 교수님은 임세연이라는 착하고 좋은 제자를 얻었다. 그녀가 누군가의 대신이 되어선 절대 안 되겠지만, 위안이 될 수는 있을 터.

명랑한 그녀가 교수님의 안 좋은 기억들을 지워 줄 수 있기를, 빈자리를 느끼지 않게 해 주기를, 어두운 감정들은 잊어버리시기를.

난 진심으로 바라고 기원했다.

가까웠던 사람들에게 미련과 죄책감을 느끼더라도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해선 안 된다. 그저 멀리서 잊히길 소망할 뿐이다.

난 그 엄중한 규칙이 내게도 어김없이 적용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미련이 남은 망령은 쉽게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여러 사람들의 허락과 합의를 얻어 이런 곳까지 도달했다.

정말 많은 기적이 날 이루고 있었고, 그렇게 주어진 현재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난 여념이 없어야 마땅했다.

“……으.”

하지만 늘 생각하고 경계해도, 종종 스스로의 비겁함을 느끼고 만다.

망령인 나는 누군가에게 잊히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영원히 음악을 남기고 싶다는 욕구 외에도, 작고 보잘것없으며 사사로운 욕망 또한 존재한다.

정말 교수님께선 옛 제자를 완전히 잊어버리신 걸까? 물론 그리하시길 진심으로 바라지만, 바라마지않는 그 마음이 새카맣게 물들어 굳어 있는 것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난 이런 자신을 느낀다는 것 자체에 화가 나고 분했다.

조용히 입 다물고, 쓸데없는 생각도 하지 말고 그저 허락받은 것들에 감사하고 또 최선을 다하라고 스스로를 향해 고함을 지르고 싶어진다.

하지만 음악만을 남기고 모든 것을 버렸음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했는데도, 끈질긴 잡초처럼 잊을 만하면 비겁함이 자라난다.

발을 들어 짓밟고 손으로 잡아 뜯어도 잡초들은 어느새 덩굴처럼 내 발을 얽어 왔다.

죄책감과 의무감. 심지어 지금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그저 외면하고 편해지고 싶은 마음에 대한 핑계가 아닐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까지.

그 모든 것들이 어지럽게 얽히고설키면서 날 괴롭혀 왔다.

도저히 혼자선 벗어날 수 없는 속박이었다.

“…….”

방금 본 사람이 진짜 박 교수님인지 아니면 닮은 사람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하고 강박을 느꼈다.

검은 새는 한심해할지도 모르겠다. 기억으로 들춰 본 그녀라면 이렇게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맺고 끊음을 확실히 했을 테니까.

너 그렇게 살라고 내가 허락해 준 줄 알아? 듣지도 못한 그런 목소리가 귓가에 환청처럼 어른거린다.

하지만 그녀라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하는 것조차 난 의심이 갔다. 지금 검은 새는 여기에 없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를 감시하는 건 어떤 방식으로는 절대 객관적일 수 없으니…….

“…….”

“아가씨?”

앉은 채로 꼼짝도 하지 못하고 고통을 끌어안고 있자 먹거리를 사 온 빅토르가 의아한 눈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빅토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올려다보려던 난 급히 고개를 숙였다.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마음 정리가 전혀 안 된 상태로 빅토르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맞추어 길게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머리를 냉정하게 만든다. 방금 전까지 내 발치에 수없이 많던 잡초들은 모조리 흙으로 덮어 버렸다.

깨끗해진 황무지 위에서 난 고개를 든다.

“아뇨, 아무것도.”

“바다를 멍하니 보고 계셔서…….”

“잠깐 생각이 많아져서요.”

“생각요? 음, 뭐 아가씨가 했을 법한 생각이라면 음악에 대한 것이겠죠. 밤바다를 보면서 적당한 악상이라도 떠올랐습니까?”

“비슷해요.”

적당히 맞장구 쳐 주며 웃었더니 빅토르도 조금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빅토르는 내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던 것이나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기억을 잃었던 것도 모두 본 사람이었다. 다시 그를 불안하게 하는 건 절대 해선 안 될 일이었다.

“사 오신 건 무엇인가요?”

“아, 야채튀김인데. 드시겠습니까?”

“예, 하나 주세요.”

그는 내 손에 꼬치를 쥐여 주었다. 노란 튀김으로 덮여 있어서 뭔진 잘 모르겠지만, 야채라는 빅토르의 말을 믿고 입에 넣는다. 그리고 아무 생각도 않고 입을 움직였다. 무슨 맛인지 잘 느껴지지 않지만 최대한 맛있게 먹으려 했다.

그렇게 튀김 하나를 순식간에 먹고 나니 뭔가 움직여야 할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갈까요. 빅토르.”

“즐거우셨는지 모르겠군요.”

“즐거웠어요. 정말로. 빅토르가 데리고 나와 주셔서 다행이에요. 그렇지 않았으면 전 호텔방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겠죠.”

난 가로등이 줄지어 서 있는 길을 다시 한번 일견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추워요. 이만 가요.”

“예. 아가씨.”

따뜻하게 입고 나왔다고 생각했는데도 몸이 으슬으슬했다. 난 재킷 앞섶을 여미고, 모자를 더 깊게 눌러썼다.

호텔로 가는 길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빅토르의 뒤만 따라가도 될 테니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걷는 와중엔 그저 걷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어 좋았다. 난 그렇게 눌러놓은 황무지 위를 무작정 걷는 기분으로 호텔까지 돌아왔다.

“쉬세요. 오늘 고마웠어요.”

“예, 편히 쉬십시오.”

“빅토르도요.”

방긋 웃으며 빅토르를 배웅하고 방문을 닫자 혼자가 되었다.

“…….”

가만히 있으면 또다시 생각들의 홍수가 날 휩쓸어 갈 테지. 난 어두운 기분을 느끼자마자 거기에 반발하듯 겉옷을 벗어 놓고 욕실로 향했다.

거울을 보니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밤중에 모자까지 썼더니 빅토르가 날 자세히 보진 못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난 옷도 벗지 않고 샤워 부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찬물이 머리 위로 확 쏟아진다. 옷은 순식간에 젖으며 피부에 달라붙었다.

난 전신으로 느껴지는 감각들을 하나하나 구분해 냈다. 양손을 모아 쥐고 천천히 내 주변을 감지해 나가다가 눈을 떴다. 속눈썹에 닿은 물들이 방울져 떨어지는 그 무게까지도 분명하게 느껴졌다.

지금 난 여기에 존재한다.

다시 한번 낮게 읊조리며 날 이곳에 있게 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누구든 실망시킬 수 없다.

“……추워.”

중얼거리며 난 찬물을 다시 적당히 따뜻한 물로 틀었다. 바보처럼 이러고 있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스스로에게 너무 실망할 것 같았기에.

***

잠자리에 언제 어떻게 들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누워서도 내 정신은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말똥말똥하게 언제라도 고민거리들을 가지고 와서 내 얼굴에 던질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난 그 모든 것들을 계속 경계하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그렇게 몇 시간이나 대립하고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잃듯 잠에 빠진 것 같은데, 알람을 듣고 일어나서도 영 피로가 가시지 않은 걸 보니 정말 몇 시간 못 잔 것 같았다.

“……바보 같네.”

냉정하고 똑똑하지 못한 건 둘째 치고 잠을 설쳐 버리기까지 한 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난 적어도 연주자로선 올바르게 기능해야만 했다. 컨디션 관리에 영향이 간다면, 그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결해야 한다.

“…….”

멍하니 침대맡에 앉아 있던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젓고는 팔을 쭉 폈다. 오늘도 리허설이 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내게 맡겨진 것들의 무게가, 다시금 날 움직이게 했다.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따라 아침에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짚어 나갔다.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틀어놓곤 천천히 스트레칭을 했다. 전날 피로가 제대로 안 풀렸을지도 모르니 조금 더 세세하게 컨디션을 점검하면서 몸을 풀어 나갔다. 유연성이 조금 떨어진 것 같긴 하지만 큰 문제가 느껴지진 않았다.

그 후엔 가볍게 씻은 뒤에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다. 룸서비스를 불러도 되겠지만 활기찬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식사를 하고 싶었다.

“엄마! 나도 접시!”

“응, 여기.”

“오늘은 다 먹을 거야!”

활기찬 아이들의 목소리가 마치 아침을 여는 듯하다.

조식 뷔페로 내려오니 일찍 식사를 하러 온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그리 북적거리는 분위기는 아니고 한가롭게 각자 접시를 들고 자신의 접시를 어떻게 채울지 고민하고 고른다.

가족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잠시 지켜보다가, 나 역시 접시를 하나 들고 가볍게 먹을 만한 것들을 골라 담았다.

이런 것에 대해선 크게 고민할 게 없어 좋았다. 속에 부담스럽지 않은 것들로 담으면 그만이니까.

접시를 반쯤 채운 나는 가까운 곳에 있는 빈자리를 찾았다. 2인용 테이블이지만 혼자 앉아도 되는 곳이다.

“…….”

그렇게 식사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내 테이블 앞으로 얼굴 하나가 쏙 하고 튀어나왔다.

“언니.”

아까 접시를 들고 뛰어다니던 아이였다. 가족들과 함께 있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날 왜 찾아온 거지?

내가 의아해하자 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물었다.

“피아니스트죠?”

갑자기 처음 보는 아이가 내 정체를 꿰뚫어 볼 줄은 몰라서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내 얼굴은 텔레비전이나 신문에도 몇 번 나간 적 있었으니 어디선가 본 건가 싶었다.

“맞아요. 절 아시나요?”

“아뇨?”

“?”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이는 까르륵 웃더니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뷔페 문을 지나 호텔 입구 방향이었다.

“저기, 저쪽 입구에 붙어 있는 포스터에서 언니 봤어요.”

“아.”

그제야 난 이 아이가 어떻게 날 찾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요 며칠 프리모르스키 콘서트홀 직원들과 지휘자님은 굉장히 바빴다. 연주회 준비는 물론이고 티켓을 미리 구매한 청중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연주회의 변동 사항에 대해 안내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도 며칠 전 사진을 찍고 연주회 포스터를 모두 교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으니 이 도시 곳곳엔 교체된 포스터가 붙어 있을 것이다.

그 포스터 중 하나가 호텔에도 있었고, 그것을 본 이 아이는 뷔페에서 날 발견하고는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 본 것이었다. 눈썰미가 꽤 좋은 아이였다.

내가 들켰다는 표정을 짓자 아이는 기뻐하면서 조금 더 테이블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다음 주에 열리는 클래식 연주회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거 맞죠?”

“예. 그렇게 봐도 되겠네요.”

“와! 싸인해 주세요!”

내가 평소 가지고 다니는 가방 안엔 메모장도 있었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가지고 오지 않았다.

“어쩌죠, 지금 용지가 없는데.”

“엄마한테 물어볼게요.”

크게 엄마를 외치며 달려 나가려던 아이는 멈칫 하더니 점잖은 걸음으로 태연하게 걸었다. 소란스럽게 하면 다른 사람들도 이쪽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혼자만 날 알아보았다는 특별함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그 귀여운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난 아이가 부모에게서 작은 용지를 얻어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 멀리서 어머니로 보이는 분이 이쪽을 향해 작게 묵례를 해 보였다. 잘 부탁한다는 뜻이었다.

난 최선을 다해 사인을 해 주고, 아이를 살짝 안아 주기도 했다. 나를 잘 모른다고 했으면서도 아이는 단지 연주회의 주인공이라는 이유만으로 날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

잔뜩 기분이 좋아진 표정으로 아이는 내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다음 주에도 인사하러 올게요!”

“후후, 기다릴게요.”

나 역시 웃음으로 답하고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이는 이번엔 빠른 걸음으로 부모에게 돌아갔다. 가자마자 무언가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나와 만난 걸 자랑하는 것 같았는데, 난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방울토마토 하나를 입에 넣었다.

다음 주 있을 연주회는 물론이고 오늘 리허설도 아무 문제 없이 해내야 한다. 그저 그것만이 지금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이리라.

어제 가로등 아래에서 보았던 사람은 내 착각인지 환각인지 아직 분명하지 않다. 나중에 혹시 세연에게서 듣게 된다면 그건 그때 일이고, 지금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난 다시 한번 그렇게 되새기며 입안의 방울토마토를 터트렸다.

식사를 마친 뒤엔 언제나와 똑같은 일정이었다. 일요일이라도 그건 전혀 바뀐 것이 없었다.

정확한 시간에 맞추어 난 프리모르스키 콘서트홀로 향했다. 살짝 피곤하긴 하지만 일단 아침 연습은 할 생각이었다.

“…….”

그렇게 피아노 리허설룸에서 뵈젠도르퍼를 가지고 음악의 분해와 재조립을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니 피로가 확 몰려들었다.

점심 후에 강도 높은 리허설을 해야 하니, 슬슬 컨디션 관리도 해야 했다. 무작정 몸을 혹사시키는 것만이 방법이 아니다.

적당히 30분 정도만 눈을 붙이면 조금 나아질 거라 생각하며 리허설룸에서 나왔다. 보통 연주자 대기실엔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어 있을 테니까 직원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다.

“아.”

“오, 타티아나.”

그렇게 로비 쪽으로 나온 난 일찍 출근한 김성조 지휘자님과 마주했다. 지휘자님이 내 쪽을 보고 반가워했다.

그런데 지휘자님은 혼자가 아니었다.

「…….」

해변공원에서 잘못 보거나 착각하지 않았음을 확인하면서, 난 작게 심호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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