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90화 (690/1,277)

##  690화

일요일 일찍 프리모르스키 콘서트홀로 온 김성조는 연주회에 대한 일들을 처리하기도 하고, 리허설 녹음을 들으며 피드백할 부분들을 체크하기도 했다.

당장 내일 무대에 올려도 박수를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완성도였지만, 그는 이 음악집단의 힘이 겨우 이 정도라 생각하지 않았다.

숙련된 오케스트라는 정말 마음이 통하는 것처럼 지휘를 잘 따라와 주었고 하나를 말하면 거기에 연관된 수십 가지를 자연스럽게 수정하며 보완했다. 거기엔 악장 시어도어의 능력이 크게 작용했다.

거기에 열여섯 살이라곤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깊은 음악성을 지닌 타티아나가 피아니스트이자 예술감독으로서 참가하니 정말 연주회 전체의 수준이 나날이 높아지는 느낌이었다.

앞으로 일주일. 다가올 연주회를 기대하며 김성조는 보다 심혈을 기울여 녹음을 듣고 또 들었다.

점심 즈음까지 그렇게 연구를 하던 그는 손님을 맞이하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바쁘신 분을.」

「아닐세. 그래도 비행기와 연주회 티켓을 줬으니 보러 와야지.」

사실 이렇게 일찍 초대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쩔 수 없이 비행기 티켓을 일찍 끊어 놓게 되었다. 그 상황을 박성재 교수는 가볍게 받아들이며 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어제 도착했다.

김성조는 교수를 거의 3년 만에 보는지라 반가웠지만, 약간은 안타깝기도 했다. 저번에 봤을 때만 하더라도 그 나이대로는 안 보이는 꼿꼿한 초로의 교수였었는데, 지금 보니 확실히 노년에 접어들었다 할 수 있었다.

잠시 홀 로비에 서서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성조는 교수에게 미안함을 굉장히 많이 느끼고 있었기에 오늘 식사는 물론이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경비 정도는 모두 대신해 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여기에서 긴 이야기를 하긴 어렵고, 일단 점심식사나 함께 하러 가자고 말할 참이었다.

“아.”

“오, 타티아나.”

홀 옆으로 뻗은 복도에서 한 소녀가 걸어오더니 이쪽을 보곤 멈칫 멈춰 섰다. 채도가 옅은 금발이 살짝 흔들거리다가 차분하게 제자리를 찾았다.

피아노 리허설룸 쪽은 확인하지도 않았는데, 역시나 일요일이라고 해서 연습을 쉬거나 하는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복장도 단정하고 가지런했다. 언제 봐도 본데 있는 태가 눈에 띄는 피아니스트였다.

김성조의 시선을 따라 박성재도 고개를 돌렸다. 김성조는 마침 잘되었다 생각하며 그녀를 이쪽으로 불렀다.

“일요일 아침인데도 변함없군요. 타티아나.”

“리허설이 있으니까요.”

“연습은 잘 했습니까?”

“……예.”

어딘가 약간 메마른 목소리였다. 평소 타티아나가 진지하긴 하지만 이렇게 삭막한 경우는 잘 없다는 걸 아는 김성조는 약간 의아했다.

하지만 피아노 연습을 막 마치고 나온 연주자가 예민한 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타티아나 정도면 아주 정상이었다. 원래 피아노에 집중하는 그녀는 가끔 무서울 정도로 날카로운 표정을 짓기도 했고.

“…….”

타티아나는 연주에 섞었던 감정을 가급적 보이지 않으려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은 않지만 그녀의 흥미가 옆에 있는 박성재에게 향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김성조는 옆으로 손을 펼치며 말했다.

“아, 소개를 드려야겠군요. 한국에서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교수이신 박성재 교수님입니다. 정말 많은 학생들을 키워 내셨죠. 전 피아니스트는 아니지만, 지휘자로서 인연이 조금 있는 편이고.”

소개를 들으며 타티아나는 조용히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지만 김성조는 혹시 그녀가 이미 교수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단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딱히 물어볼 건 없는 건가. 타티아나는 가만히 있기만 했다.

김성조는 타티아나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그녀는 낯을 조금 가리는 편이었다. 착실하고 선한 성격이지만 마냥 아무에게나 살갑게 굴진 않는 것이다. 김성조도 그녀의 선생인 미하일의 이야기를 주제로 올리고 나서야 친해질 수 있었다.

지금도 비슷한 상황에 가까웠다. 그리고 김성조는 할 수 있다면 이번에도 타티아나의 낯가림을 풀어주고 싶었다. 그녀가 얼마나 진지하고 좋은 피아니스트인지 교수에게 제대로 소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교수님도. 이쪽이 바로 이번 협연자인 타티아나입니다. 그…….」

「알고 있네.」

어떻게 하면 첫인상을 좋게 소개해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며 말을 붙였는데, 교수는 짧게 말을 잘랐다.

김성조가 교수를 바라보니 교수는 당연하지 않느냔 투로 말했다.

「이젠 그 이름을 모르면 안 되지.」

「역시, 피아니스트들 사이에선 꽤 유명한가 봅니다?」

「그럭저럭.」

이미 한참 전부터 알았다는 투였다.

평생 쟁쟁한 피아니스트들만 봐 온 박 교수가 그럭저럭이라고 말하며 알 정도면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타티아나는 러시아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알 정도로 이름이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벌써 이 정도라면 내년에 큰 콩쿠르에서 상이라도 하나 얻으면 그다음엔 이렇게 협연하는 것도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오케스트라가 그녀를 찾을 것이라 김성조는 장담할 수 있었다.

아무튼 그렇다면 지금 주어진 이 시간에 충실하는 게 제일 중요했다. 김성조는 웃으며 박 교수에게 말했다.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인사하시죠?」

이 아이가 나중에 더 유명해지기 전에 알아 두는 건 나쁘지 않지 않겠습니까?

같은 악기를 다루는 두 사람이니 어떻게든 나쁠 것 없다고 생각하여 한 제의였는데, 박 교수는 조용히 김성조를 바라보더니 왼손으로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자네도 이 아이를 굉장히 예뻐하는 것 같군.」

「그렇게 보입니까?」

한 연주회를 위해 협력하는 음악가로서 김성조는 충분히 자신이 객관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교수가 하는 말을 부정할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도 보시죠. 일요일인데도 아침부터 나와서 피아노 리허설 하고 나오는 걸. 이런 연주자를 예뻐하지 않는 건 말이 안 되죠. 그렇지 않습니까?」

「…….」

타티아나는 정말 책임감 있게 사람과 음악을 대할 줄 아는 연주자였다. 그리고 예술감독이라는 직책을 맡겼음에도 그녀는 처음에만 약간 난색을 표했을 뿐, 곧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해내려 노력했다.

어린 연주자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하면 안 된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무게와 책임을 짊어질 때마다 더욱 깊게 발자국을 남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물론 열심히 하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건 실력이니까. 그리고 실력에 대해 평하자면…… 솔직히 말하자면 엉성한 프로들보다 훨씬 낫습니다.」

영상으로 봤던 건 타티아나의 실력을 반절도 채 못 보여 주는 것이었다. 실제로 공간을 통째로 뒤흔드는 것 같은 타티아나의 연주는 실황으로 들을 때 진가가 나타난다.

피아니스트로선 흠잡을 곳이 거의 없다.

때문에 김성조가 할 수 있는 건 미하일이 부탁한 대로 타티아나가 최고의 연주자로서 한 걸음을 깊게 디딜 수 있게 해 주는 것뿐이었다.

그녀에게 어느 선까지 맡겨도 되는지 때때로 시험하기도 하고, 힘껏 도와주기도 하면서 예술감독직을 맡겨 버린 것 또한 그 일환이었다.

「음…… 그래서 말인데.」

원래 그 예술감독은 박 교수에게 부탁했었던 것이다.

처음 이 연주회의 객원 지휘자로 초빙되자마자 김성조는 박 교수를 예술감독으로 끌어들일 생각을 했다. 그가 아는 한 가까운 곳에서 바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최고의 음악가는 바로 박 교수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탁을 하고 비행기 티켓을 준 뒤에, 뒤늦게 김성조는 모든 것을 뒤엎었다.

「전화로 말씀드리긴 했지만…… 제가 교수님에게 예술감독 자리를 제의했다가 취소한 게 이 아이를 편애해서 그렇다고 오해하진 않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맡겨도 충분한 실력이라 생각해서 그런 것이니.」

교수는 피아니스트로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연주회를 성공시키며 커다란 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 또한 몇 번이나 역임했던 경력을 지닌 음악가였다.

만약 그대로 교수가 예술감독을 맡아 주었다면 굉장히 수준 높고 안정적인 연주회가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성조는 타티아나가 이끄는 연주회가 보고 싶었다.

타티아나가 지닌 음악성과 해석. 그건 정말 흔하게 찾아보기 힘든 특별함과 가치를 지닌 것처럼 느껴졌다. 객관적인 수준 역시 무대에 올리기에 전혀 모자람 없었고.

때문에 김성조는 모든 걸 자신이 책임지면서 그녀에게 예술감독을 맡겼다.

물론 그 일 때문에 교수에겐 정말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이건 교수가 굉장히 기분 나쁘게 받아들여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큰 실례였다.

「그런 욕심이 났다고 해도 상관없네.」

하지만 교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나도 두말 하지 않았잖나.」

「…….」

인격자인 교수가 그러리라 생각은 하지 않지만, 만에 하나 타티아나를 안 좋게 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조금은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교수는 모두 좋게 여기기로 한 것 같았다.

「그래서 인사는 언제 하면 되나?」

「아.」

다행이다. 김성조는 속으로 살짝 안도하며 타티아나에게 말했다.

“타티아나. 교수님은 타티아나를 이미 알고 계시더군요.”

“……그런가요?”

“간단히 인사라도 하시겠습니까?”

“…….”

타티아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까 유명한 교수라고 소개를 하긴 했지만, 역시 처음 보는 노년의 남자와 갑자기 인사하는 건 꺼려지는 건가. 타티아나가 그런 부분에서 예민하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김성조는 그냥 기다렸다.

그러나 잠시 후 고민을 마친 타티아나는 교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 해요.”

“반갑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교수 역시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인사에 답했다. 러시아인들과의 교류도 많이 해 온 교수는 인사나 호칭을 정확하게 지켰다.

타티아나는 묘한 눈빛으로 교수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러시아어도 하시나요?”

김성조가 알기론 아니었다. 하지만 혹시나 해서 교수에게 물어보았다.

「러시아어도 하십니까?」

「전혀. 방금 그 인사말밖에 모르네.」

박 교수는 프랑스어와 독일어에 정통하지만 러시아어는 할 수 없었다. 그중 타티아나와 겹치는 언어가 있다면 두 사람이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그렇진 않을 것 같았다.

“인사말만 할 줄 하신다는군요. 혹시 통역이 필요하다면 제가 해 드리죠.”

“…….”

그러나 타티아나는 또다시 입을 꾹 닫아 버렸다.

낯을 가리더라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던 것과 달리, 이번엔 정말 어려워하는 모습이었다.

순간 김성조의 머리에 한 가지 가정이 들어섰다. 그녀에게 주어진 예술감독 자리가 원래 지금 여기 있는 박 교수에게 갈 것이라는 걸 눈치챈 게 아닐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지금 그녀에겐 약간 불편한 자리일 수도 있었다.

물론 성격에 따라 그런 것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도 많지만, 김성조가 보기에 타티아나는 그렇게 쿨하거나 무덤덤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타티아나가 침묵하자 박 교수 역시 길게 할 말은 없는지 짤막한 격려를 보냈다.

「리허설 잘 하시고, 연주회 기대하겠습니다.」

그리고 김성조가 미처 번역하기도 전에 그를 바라보더니 어깨를 툭 짚으며 말했다.

「오늘은 먼저 온 김에 김 지휘자만 보러 온 것이니 이만 가 보지.」

「바로 가십니까?」

「오랜만의 블라디보스토크니 여기저기 관광이나 해야지.」

「점심이라도 함께 하시면……」

「괜찮네. 난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

연주회 관계자로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주일 후 있을 청중으로 왔음을 확실히 하는 말이었다. 김성조는 할 말이 정말 많았지만, 지금 불편해하는 것 같은 타티아나 때문에라도 교수를 붙잡기 어려웠다.

그때였다.

“자, 잠시만요.”

「?」

막 반쯤 몸을 돌린 교수를 타티아나가 말로 붙잡았다. 목소리가 굉장히 다급해져 있었다.

물론 그 말을 이해할 순 없었겠지만 자신을 부른다는 것 정도는 뉘앙스로 충분히 알아들은 교수가 다시 타티아나를 돌아보았다.

타티아나는 어깨를 흠칫하더니, 곧 괜찮아졌는지 이어 말했다.

“저도 처음 뵙지만 알고 있었어요. 세연의 교수님이시잖아요?”

세연? 그건 누구지?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없는지 김성조가 떠올리는 사이, 교수는 그 이름에 곧바로 반응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조금 더 이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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