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1화
이때다 싶어서 김성조는 타티아나의 이야기를 받아 교수에게 통역하여 전달했다.
「세연이란 제자 있으십니까? 타티아나가 한 다리 건너 교수님을 아는 모양인데.」
「……내가 요즘 가르치는 아이지.」
「그런 인연이 또 있군요.」
다른 국적의 피아니스트들이 친해지는 일은 흔한 일이지만, 아직 제대로 국제무대에서 활동하지 않고 학생 신분으로 있는 어린 피아니스트들 사이에 교류가 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게 이렇게 이어지기도 했고.
유난히 낯을 가리던 타티아나가 그걸 늦게나마 이야기한 것이 다행이었다.
교수는 물끄러미 타티아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나도 세연이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다고 전해 주게.」
교수가 타티아나를 안다고 한 것도 그녀에 대한 여러 매체의 기사나 풍문 등만이 아니라 제자인 세연에게 직접 들은 부분도 많이 있는 것 같았다.
말을 전해 주자 타티아나가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그 애가 저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 여쭐 수 있을까요.”
지휘자를 통역으로 쓴다는 게 죄송스러운지 굉장히 조심스러운 어투다. 김성조는 신경 쓰지 말라는 태도로 시원스레 웃으며 교수에게 그 말을 전달했다.
교수는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도와줬다지? 그 이야기를 제일 먼저 들었던 것 같은데.」
이야기를 전해 주지 않아도 상트페테르부르크란 말만 듣고도 타티아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유추했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아…….”
「작년 일이긴 하지만 늦게나마 고맙다고, 그렇게 전해 주었으면 하네.」
그 말을 김성조가 잘 정리해서 전해 주려는 찰나, 교수가 그 뒤에 덧붙였다.
「그리고…… 그 정도로 심지가 곧고 올곧으면서 같은 나이인데도 배울 점도 많고 의지가 되는 친구라 했었지.」
타티아나는 묘하게 어른스러운 부분이 많아서 아마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말을 전해 들은 타티아나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꽤나 적나라한 칭찬이었는데도 부끄러워한다거나 하는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듣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이 대화를 먼저 시작한 것이 그녀라는 걸 본다면 이제 와서 소극적인 태도를 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모를 일이다.
타티아나가 말이 없자 교수가 그녀의 질문과 비슷한 질문을 거꾸로 던졌다.
「네겐 세연이 어떤 친구지?」
평범한 질문이었다. 때문에 비슷한 대답이 나올 것이라 생각하며 김성조는 질문을 통역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신중한 침묵을 지켰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윽고 타티아나는 입을 열었다.
“그 애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해요.”
타티아나가 무언가 도와준 것이 있다고 했던 것처럼 세연 역시 그녀를 도운 적이 있었던 건가. 어떤 일이 있었는진 모르지만 타티아나가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는 건 분명하게 전해져 왔다.
이어서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교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명랑한 아이죠?”
그건 어떠한 질문이 아니라 확인에 가까운 말이었다. 김성조는 타티아나의 태도에서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지만 일단은 들은 그대로 교수에게 전했다.
「명랑하지 않냐고 물어보는군요.」
「……천성이 밝은 아이지.」
임세연이 누군지 김성조는 잘 모르지만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친구를 솔직하게 칭찬할 줄 알며 밝고 명랑한 성격을 지닌 것 같았다.
그 덕분인지 세연을 주제로 했을 뿐인데 대화의 긴장은 약간 풀려 있었다. 타티아나는 무언가 떠올리는 듯 천천히 이야기했다.
“전…… 그 애를 보면서 안도를 느껴요. 그러니 앞으로도 그렇게 있어 주었으면 해요. 모나지 않고, 말도 잘 듣고, 아프지 말고…….”
무언가 바람을 읊조리듯 작게 말하던 그녀는 갑자기 말끝을 얼버무렸다. 뭔가 말을 잘못하고 있다는 자각이 든 모양이다. 김성조가 듣기에도 그녀의 말은 어딘가 이상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그대로 전합니까?”
“아뇨, 말실수가 조금 있었어요.”
하지만 타티아나는 스스로 실수라 말하면서 다시 이번엔 조금 더 정제된 어투로 이야기했다.
“그 애도 좋은 연주자가 되었으면 한다고. 그렇게 전해 주세요.”
사실 이것도 어떤 친구냐는 질문엔 제대로 된 답변이 아니다. 그러나 타티아나가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인 것 같았다.
「타티아나는 그 아이가 좋은 연주자가 되길 바란다는군요. 꽤…… 친한가 봅니다?」
「친구에게 하는 말이라기엔 조금 이상하지 않나?」
「예?」
「아닐세.」
교수는 그 답변이 조금 마뜩찮은 모양이지만 길게 묻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아무래도 타티아나가 긴장해 있어서 말을 제대로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통역을 끼고 있어서 대화가 자연스럽지도 못했고, 타티아나가 붙잡고 이어 나가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이 대화는 길게 이어지기 어려웠다. 교수도 똑같이 생각하는지 천천히 만남을 정리할 준비를 했다.
「아무튼, 이런 기회가 없더라도 한 번쯤은 보고 싶었던 아이였는데……. 내 생각과 비슷한 점도 있고 아닌 점도 있고, 그렇군.」
「인상이 다릅니까?」
「글쎄. 생각 같아선 피아노를 한번 들어 봤으면 하는데.」
그 말대로 통역을 가운데에 끼고 대화하는 것보단 아예 피아노 연주를 한 번 보여 주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교수는 그저 바람이었을 뿐이라는 듯 바로 딱 잘라 말했다.
「부담스럽게 생각하겠지.」
「제가 아는 한 타티아나는 그런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습니다. 물어볼까요?」
「아서게. 이쯤하면 됐으니.」
타티아나에게 살짝 의향을 물어볼까 싶었지만, 교수는 완고하게 그렇게 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김성조가 앞장서서 피아노 리허설룸으로 데리고 가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약간 어색함을 느끼며 서 있자, 교수가 허공에 손을 두어 번 까딱이더니 물었다.
「마지막으로…… 요즘 쇼팽은 좀 치는지 물어봐 주게.」
갑자기 이게 무슨 질문인가 싶어 김성조는 교수를 바라보았지만, 곧 자신도 의문을 가졌던 부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타티아나.”
“예, 무어라 하셨나요?”
“어…… 요 근래 쇼팽은 연주하시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요 며칠간 오케스트라와 레퍼토리의 교집합과 그중에서도 무대에 올릴 수 있는 협주곡을 찾아나가면서 정말 많은 곡들이 타티아나의 손에서 연주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바흐에서 쇼스타코비치까지 정말 폭넓은 시간대의 곡들을 모두 원숙하게 연주하면서도 쇼팽은 좀처럼 연주하지 않았다. 김성조는 그게 약간 의아했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역시 마찬가지였다.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레퍼토리엔 있었지만 타티아나는 할 수 없다고 해서 목록에서 지워져 있었다.
피아니스트에게 특정 레퍼토리의 부재를 묻는 건 약간 실례되는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피하는 기색 없이 간결하게 대답했다.
“에튀드 종류는 종종 연주하곤 해요.”
“그럼 다른 곡들은?”
“필요하다면요.”
그 말인즉슨 필요하지 않다면 구태여 연주하지 않는단 뜻이었다. 그 필요한 게 어떤 의미인지 김성조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무튼 결론은 한 가지로 내릴 수 있었다.
“내년 쇼팽 콩쿠르에 나갈 생각은 없는 것 같군요?”
내년 열일곱 살에 참가할 국제 콩쿠르가 쇼팽 콩쿠르 하나뿐이라면 쇼팽을 연주할지도 모르지만, 다른 선택이 가능하니 그렇게 하지 않겠지.
타티아나는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퀸 엘리자베스로 결정했어요.”
“흐음…… 교수님께 그리 말씀드려도 될까요?”
“상관없어요. 대신…….”
그녀는 숨을 살짝 들이쉬더니, 그에게 요청했다.
“세연은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저에게도 알려 주세요.”
상당히 의식하고 있긴 한 건가? 묘한 흥미를 느끼며 김성조는 교수에게 말했다.
「교수님. 타티아나가 세연이란 아이는 내년 콩쿠르를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궁금해하는군요. 그건 서로 알려 주지 않았나 봅니다.」
「……그랬었지.」
이미 교수는 알고 있는 부분인 것 같다.
김성조는 이어서 쇼팽에 대해 교수가 물어보았던 것에 대한 타티아나의 대답을 전했다.
「쇼팽은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고…… 그래서 내년엔 퀸 엘리자베스에 나간다고 합니다. 제 생각엔 타티아나는 쇼팽도 정말 잘 연주할 것 같은데…… 취향이 아닌가 보네요.」
「우리가 모를 이유가 있겠지.」
타티아나가 상당한 실력자라는 걸 안다면 쇼팽을 왜 안 좋아하는지 궁금해할 만도 한데, 교수는 담백하게 그 정도만 말했다.
「세연이는 퀸 엘리자베스에 나가기로 결정했다네.」
「아, 타티아나와 같군요?」
「그리될 것 같았지.」
김성조는 개인적으로도 묻고 싶은 부분이 많았다.
세연이 타티아나와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실력자인 건가?
같은 최연소 출전자라면 아무래도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상황에서 어느 한쪽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큰 정신적 트라우마가 될지 김성조는 벌써부터 걱정될 정도였다.
하지만 교수는 그 부분에 대해서도 별로 따지고 싶지 않은 듯했다. 두 사람이 국제무대에서 마주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기까지 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그리 전해 주게나. 이야기는 이쯤 하면 될 것 같군.」
「음…… 알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물어보기도 애매했다. 느긋하게 이야기를 길게 할 생각도 없어 보이고. 김성조는 어쩔 수 없이 타티아나에게 전했다.
“생각 같아선 두 분 모시고 점심식사라도 제가 대접하고 싶은데, 교수님은 이만 가실 것 같군요. 타티아나.”
“…….”
타티아나는 조용히 교수를 바라본다.
낯을 가리는가 싶으면 떠나려는 교수를 붙잡고 이야기를 하려다가, 또 어렵게 말을 삼간다. 어떤 이유에서이든 교수는 타티아나가 쉽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 모든 의문들을 잠시 치워 두면서, 타티아나는 보다 정중한 인사를 교수에게 건넸다.
“무대 위에서 뵙겠습니다.”
그 말을 통역하지도 않았는데 교수는 뜻을 이해했는지 거기에 답해 고개를 숙였다.
「청중석에서 지켜보도록 하겠네.」
통역 없이 이루어진 마지막 인사말은 지금까지의 대화 중 가장 분명하게 서로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라고, 김성조는 직감했다.
***
해변공원에서 난 가로등도 없는 벤치에서 모자를 쓰고 어둠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교수님은 날 그때 알아보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난 어제 마주했던 것 덕분에 어느 정도 막연하게나마 마음의 정리를 하고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큰 문제 없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물론 모든 말을 알아듣고 있는 상황에서 적절하게 대처를 하기 위해 머리가 복잡하긴 했지만, 그래도 심각하게 이상한 태도를 보이진 않았으리라 확신했다.
어제 숨이 제대로 안 쉬어지는 기분을 느꼈던 걸 생각한다면 정말 다행이었다.
“…….”
대화를 마친 교수님은 마지막으로 지휘자님과 무어라 인사를 나누시더니 곧 휙 돌아서선 홀 밖으로 걸어 나가셨다.
그 뒷모습은 이전 내 기억에 있던 것과 정말 닮았으면서도, 많이 약해져 있었다.
세연을 새로 들이셨으니 여전히 예전처럼 열정적인 모습이 남아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야위고 힘을 많이 잃으신 모습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다. 하지만 난 경솔할 수 없었기에 말을 아끼고 또 아꼈다.
수없이 말을 고르고 스스로와 싸우면서 무언가 엄청나게 마모된 기분이 든다. 닳고 갈려 나간 것들이 가루가 되어 폐 안에 쌓이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이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
“타티아나. 리허설 전까지 시간이 조금 있는데, 어찌하시겠습니까?”
지휘자님은 나와 점심식사를 함께 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지금 누군가와 앉아서 이야기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난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정중히 사양했다.
“죄송해요. 잠시 혼자 쉬고 싶어서.”
“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잠시 이따가 뵙도록 할게요.”
“알겠습니다.”
지휘자님은 미련 없이 내 의견을 존중하여 자리를 떠나갔다.
원래 뭘 하려 했었지?
이곳에 오기 전까지의 기억이 잘 안 나서 잠시 멍하니 기억을 되짚어 보던 난, 직원에게 연주자 대기실이 어딘지 묻기로 했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렇게 직원에게 열쇠를 얻어 대기실로 향하던 나는 눈가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걸 느꼈지만, 곧바로 소매로 닦아 내곤 꿋꿋이 발걸음을 옮겼다.
전날 잘 못 잤었으니까…… 잠깐만 자야지.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테니까. 리허설을 앞두고 괜찮아져야만 하니까.
걸음마다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난 계속해서 무언가를 꾹꾹 눌러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