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3화
리허설을 위해 지금 여기 수십 명이 모여 있다. 그런데 나 하나 때문에 아무 진행도 못하게 생겼다. 그 사실만으로도 식은땀이 나려 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할 수 있다고 나설 자신도 없었다. 당장 예술감독으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피아노는 어찌어찌 연주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솔직히 지금 이렇게 흐트러진 정신으로는 그마저도 확신이 없다.
분하고 창피했다.
끔찍한 기분으로 앉아 있는데, 지휘자님은 이미 다 결정을 내린 목소리로 다른 단원들에게 말했다.
“각자 사정을 미루고 일요일임에도 출근해 주신 여러분에게도 미안합니다. 조금 일찍 마친 셈 쳤으면 좋겠군요.”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리허설 한 번 만에 끝내자고 할 줄은 모두들 상상도 못 했는지 불안한 표정이 여기저기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당혹스러워한 건 밀라였다. 그녀는 마치 자신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저기요, 지휘자님. 제가 쓴소리를 하긴 했지만 이렇게 연습이고 뭐고 그만두잔 뜻은 아니었는데요?”
“압니다.”
“제 말에 기분이 상하신 거라면…….”
리허설이 우선이라 생각하는지 밀라가 사과하려는 찰나, 지휘자님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밀라. 혹여 절 더 무책임한 사람으로 판단하진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당신이 한 비판은 정당했습니다.”
지휘자님은 지금 단순히 오케스트라의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들어서 즉흥적으로 리허설을 중단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기분파로 멋대로 하시는 분이었다면 애당초 단원들이 지휘자님을 따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보다 냉정하고 자기객관적으로 지휘자님은 말을 이었다.
“전 오늘 무신경했고…… 뻔뻔하기도 했죠. 결정적으로 욕심이 많기도 하고요. 맞는 말입니다.”
“…….”
지휘자님은 상황을 설명한 뒤엔 가만히 듣고만 있었지만, 밀라의 비판은 물론이고 떠들썩하게 오간 대화들 역시 모두 진지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침묵하는 단원들 사이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함에도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전부 반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장 저 하나가 생각을 바꿔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지금이라도 우리 예술감독을 케어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드는군요.”
지금 지휘자님에 대한 비판은 그저 원인제공에 대한 성토일 뿐, 진짜 문제는 다름 아닌 내게 있었다. 그야말로 나 하나만 바꿔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지휘자님…… 저도 한 명일 뿐이에요.”
“이 연주회를 성공시키기 위해 필요한 판단입니다. 이번만큼은 제 판단에 따라 주시죠. 타티아나.”
“…….”
이 상황에서 날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 정도는 안다. 때문에 난 더더욱 강한 책임감을 느끼고 이 자리에 있다.
오늘 리허설 역시 그대로 진행하고픈 마음이 훨씬 많았다. 수면부족과 심리적 불안 같은 건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지휘자님은 마치 내 음악을 꿰뚫어보는 심사위원과도 같은 눈으로 진중하고 엄격하게 말씀하셨다.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타티아나가 명확한 의도에 따라 해석을 내고 오케스트라를 이끌 수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죠.”
한 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솔리스트로선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수십 명의 사람들에게 음악을 이해시켜야 하는 예술감독이라면 이대론 안 된다.
난 물끄러미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생각했다.
잘 해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한계인가 보다. 여러모로 난 자격미달임을 증명하고 말았다. 피아노 하나만으로도 벅찬 내게 그 이상은 아무래도 욕심이었다.
지휘자님뿐만이 아니라 나 역시도 스스로에게 욕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피아노 연주자를 교체할 순 없을 테니까, 예술감독직에선 내려와야 하겠지. 그리고 그 자리는 박 교수님이 맡으실 테고. 마침 블라디보스토크에 와 계시니까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문제는 그 후로도 계속 이어진다.
교수님을 잠깐 본 것만으로도 죄의식에 목이 졸리고, 예술감독직에 대신 앉았다는 이유로 리허설에 트러블을 일으킨 나였다.
그런데 앞으로 계속 연주회까지 쭉 음악을 만들어 나갈 생각을 하니, 나 스스로를 믿기가 어려워졌다.
난 교수님의 음악을 너무나 잘 안다. 잘 따를 자신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 것일까. 그런 끔찍하고 어두컴컴한 의문이 뒤따라와서 내 등에 달라붙는다. 그 의문은 차갑게 내 등을 불태운다.
“…….”
앞으로 있을 여러 상황들을 상정해 본 나는 지금 내가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와서 모두 그만두고 도망칠 수도 없고 다시 모든 걸 잘 해내겠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결정권을 쥔 지휘자님을 올려다보았다. 그 표정엔 별다른 감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난 멍하니 물었다.
“그럼 원래 계획대로 되돌리시기로 결정하신 건가요……?”
“원래?”
“예술감독으로 모시기로 한 분을…….”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예술감독을 경질하겠다는 답변이 오리라 예상하며, 난 마음속으로 대답을 정돈했다.
그런데 내 예상과 전혀 다른 결정이 떨어졌다.
“아니오. 전혀.”
당황한 눈으로 올려다보자 지휘자님은 턱을 좌우로 까딱이더니 마치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 말씀하셨다.
“불안해하실 건 없습니다. 전 타티아나를 여전히 굳게 신뢰하고 있으며, 하물며 예술감독직을 맡긴 것에 대한 후회도 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타티아나의 능력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
“계속 맡아 주십시오. 타티아나.”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이대로 속행한다.
순간적으로 난 안도를 느꼈다. 예술감독이란 직책을 지킬 수 있어서가 아니라, 아직 지휘자님에게 신뢰를 완전히 잃진 않았다는 사실이 느껴졌기에.
하지만 이러한 안심을 말할 수도, 감사를 말할 수도 없어서 가만히 바라보자 지휘자님은 내 옆으로 다가오시더니 보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겪지 않아도 될 심리적 압력을 느끼게 한 것에 대해선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그분과 만나게 될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시고 오늘 하루 생각을 정리하길 바랍니다.”
“……만날 일이…… 없나요?”
“없죠. 그분은 이제 제 손님이지 우리 관계자가 아니니까.”
지휘자님이 생각하는 문제는 예술감독이란 자리를 내가 빼앗은 것처럼 느끼고 있다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때문에 나와 교수님이 접점이 없어 다시 마주하지만 않는다면 그러한 불필요한 부담감은 곧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진정 내가 느끼는 감정은 그렇게 한 가지만이 아니었지만, 그 전부를 설명할 순 없었다.
지휘자님은 머쓱하게 웃더니 이어 말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시죠. 타티아나가 느끼기엔 제가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것도 우습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아뇨, 그렇지 않아요. 지휘자님께서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으셨다고 생각해요.”
“이해해 주니 고맙군요.”
지휘자님은 어떻게든 잘 해보려고 하고 계시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예상하지 못한 분을 만나게 되어서 조금 당혹스럽고 마음이 어지럽긴 하지만 그 어떤 이유라 하더라도 리허설과 연주회를 망치게 될 이유가 되진 않는다.
적어도 일주일 사이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그저 연주회뿐이었다.
그런 내 생각이 눈빛과 표정으로 전해졌는지, 지휘자님은 한결 나아진 미소로 말했다.
“어쨌든…… 오늘은 푹 쉬시죠. 일요일인데다가 날씨도 좋은데, 좋지 않습니까? 기분 전환도 하고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은…… 다시 기분 좋게 볼 수 있길 바라도 되겠습니까?”
하루 만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아무 문제 없도록 해야 한다.
오늘처럼 어수룩한 마음가짐으론 어림도 없다. 여기 있는 지휘자님과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모두 음악으로 목소리와 감정을 읽어내는 프로 중의 프로들이었으니까.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다. 난 다시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자님은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계속 무언가 바라기만 하는 것 같아 면목없군요.”
이해를 바라고 이겨내길 바라고 내 사정보단 연주회가 성공하길 바란다. 책임자로서 응당 그래야만 하지만,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이 느끼는 솔직한 감정이 내게만 살짝 드러난다.
그러나 그러한 빈틈도 잠시뿐, 곧 지휘자님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의뭉스레 웃었다.
“하지만 제가 연주자분들께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인지라. 어쩔 수 없군요. 못난 지휘자라 욕해 주시길.”
“지휘자님…….”
누군가 탓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렇게 지휘자님이 내게 기대하고 바라는 것 자체로 이미 힘이 되고 있을 뿐이다.
나와 이야기를 끝낸 지휘자님은 곧 단원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요 며칠간 다들 열심히 하신만큼 그 관성을 유지하는 것도 좋지만, 오늘은 모두 푹 쉬셨으면 합니다.”
“정말 돌아갑니까?”
“이것참.”
이곳저곳에서 한마디씩 나오긴 했지만 지휘자님은 이미 내린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 없었다. 깔끔하게 박수를 치며 모두를 해산시킨다.
“자, 내일 봅시다.”
오후 2시가 조금 넘은 시각. 정말 끝난 건지, 가도 되는 건지 다들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다가 한두 사람이 악기를 챙겨 나가는 것을 시작으로 다들 뒤따라 떠나기 시작했다.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시어도어는 약간 걱정된다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더니 눈인사만 하고는 바이올린 가방을 들었다. 무언가 말로 하기보단 믿고 기다리겠다는 표현처럼 보였다.
***
프리모르스키 콘서트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늘 걸어 다니는 짧은 거리이지만 이번엔 차로 움직이기로 했다.
운전대는 빅토르가 아닌 자하르가 잡았다. 드문 일이었다.
“리허설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셨군요. 빅토르는 이곳 지부에서 보안에 관련된 업무를 보는 중입니다.”
“그런가요.”
지금까진 빅토르에게 전부 일임하고 있었는데, 자하르에게 조금 더 자세히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들을 수 있었다.
빅토르는 내가 리허설을 하는 사이에 내 주변 경호뿐만 아니라 넓게는 콘서트홀, 더 넓게는 이 근처의 모든 구역, 그리고 프리모르스키 구 전체에 대한 보안사항을 점검하고 관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일 때문에 잠시 자하르에게 날 맡기고 떠나 있는 사이에 내 리허설이 끝나 버린 것이다.
난 내 경호원들 중에서도 빅토르와 특히 친한 편이었기 때문에 그가 운전해 주는 걸 보다 편하게 여기긴 했지만, 사실 지금은 자하르여서 나은 면도 있었다. 지금 내 바보 같은 모습을 더 친한 사람에겐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차는 한동안 침묵 속에서 달렸다. 장난기가 있는 빅토르와 달리 자하르는 조금 과묵한 편이었으므로 그와 있으면 할 말이 그리 많지 않았다.
“날씨가 좋네요…….”
난 괜히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자하르는 백미러로 날 힐끔 돌아보더니 물었다.
“어디론가 모실까요?”
“……어디로요?”
“원하시는 곳이 있으신지?”
가끔은 자하르에게도 신경을 써 주는 게 좋으려나.
블라디보스토크 관광을 하거나 드라이브를 하면서 그와 이야기를 더 해 보는 것도 좋겠지만, 문제는 내가 그럴 컨디션이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아뇨, 미안해요.”
자하르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지금은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다. 피곤하고 어지럽다. 내일 있을 리허설을 대비해야 한단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할 엄두가 안 났다.
“그냥…… 자고 싶네요.”
“많이 피곤하십니까? 아직 날이 밝은데.”
“……어제 잠을 설쳐서요.”
어제는 물론이고 점심에도 못 잤고 오늘 밤도 못 잘 것 같다.
요즘에야 나아졌지만 이전에 불면증이 있었던 나는 지금 이 감각을 너무나 잘 알았다. 바짝 곤두선 신경이 어디까지 내 몸을 혹사시키는지, 몇 번이나 겪어 본 바 있었다.
지금은 정말 곤란했다. 컨디션이 이 이상으로 더 망가진다면 감당이 안 될 텐데.
“리허설도 중단되었고…… 내일은 제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걱정이네요. 오늘도 못 자면 어쩌죠.”
“피곤한데 잠이 안 오십니까?”
“예.”
“무슨 걱정이라도? 저희가 도울 수 있다면 돕겠습니다.”
“아하하,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런 일은 아니에요.”
내 경호원들은 정말 유능하지만 이런 것까지 어떻게 해 줄 수 있진 않을 테지. 난 가볍게 웃어넘겼다.
하지만 자하르는 상당히 진지했다. 차가 잠시 신호에 멈춰 선 사이, 그는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선글라스 너머 그의 눈이 보이진 않았지만 지금 내 상태를 관찰하고 있다는 기분이 확 들었다.
살짝 눈을 피하자 그가 조용히 말했다.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시니…… 혹시 반드시 주무셔야 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응……? 뭔가요? 어떻게든 자야 하는 상황인 건 맞는데요.”
자하르 역시 무술 유단자일 테니까…… 영화처럼 내 뒷목을 손날로 쳐서 기절이라도 시켜 줄 수 있으려나? 아프지만 않다면 정말로 부탁해 보고 싶은데.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가씨는 기억상실증도 앓으셨고 불면증도 있으셨죠. 이럴 때를 대비하여 제가 가지고 있는 약들이 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드실 수 있도록.”
“……예?”
그는 내 목을 쳐서 기절시키는 것보다 훨씬 현실적인 방안을 제안했다.
상상도 못했던 말이라서 놀라 되묻자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빅토르는 거부했기 때문에 제가 맡고 있는데…… 모두 의사에게 안전하게 처방받은 것들이니 걱정하진 않으셔도 됩니다.”
“잠시만요. 누가 자하르에게 약을 맡겼죠?”
자하르가 하는 몇 마디 말만으로도 난 많은 것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과거 불안하며 신경질적이었고, 혼수상태에 빠진 후로도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많이 보인 내가 언제든 긴급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는 걱정 정도는 누구나 했겠지.
대부분의 일들은 경호원들이 막아 주겠지만 상황이 심각하다면 날 진정시킬 수 있는 약 등이 필요하다. 빅토르는 거기까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거부한 것 같고, 자하르가 대신 받았다.
이럴 때만 빠르게 돌아가는 내 머리는 그런 상황을 걱정했을 누군가를 빠르게 유추해내며 자하르에게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난 그 생각을 딱 끊어냈다.
“아니, 아니에요. 대답하지 마세요.”
“모두 아가씨를 걱정해서 그런 겁니다.”
“……알아요.”
날 정말로 못 믿고 나쁘게 생각해서 이런 걸 준비시켰을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만전을 기했을 뿐이다. 그 정도도 이해 못하고 배신감 같은 걸 느끼는 건 정말 짧은 생각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전혀 몰랐다는 것이 곧 내가 잘 버텨왔다는 방증 아닐까? 자하르도 지금 내가 심각하게 불안정하다고 생각하진 않았기에 사실대로 말했으리라.
난 그의 믿음에 여유 있게 답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수면제가 있는 건가요?”
“있긴 합니다. 하지만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는 수면제를 피아니스트인 아가씨에게 드리는 건 되도록 피하고 싶군요.”
그런 건 나도 절대로 먹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불면증을 겪으면서도 약 같은 걸 전혀 쓰지 않고 버텨 낼 수 있었던 건, 아버지가 유독 병원과 의사를 잘 믿지 않으신 점도 있지만 내가 몸에 해가 갈 만한 것들을 가까이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난 검은 새에게 깊은 부채의식 등을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언제나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내 마음대로 약을 쓴다는 것에 대한 거대한 트라우마 역시 존재했고.
“수면유도제까진 드리겠습니다. 아니면 베타 차단제 같은 안정제라든지.”
자하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약들에 대한 교육도 철저하게 받은 것 같았다.
나도 약사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지식은 있었다. 수면유도제는 부작용랄 게 별로 없다. 사실상 감기약을 먹는 거나 다름없는 정도다.
그리고 자율신경계에 작용하는 베타 차단제는 무대 공포증을 겪는 연주자들이 먹는다는 걸 들은 적 있다.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지만 내게 필요한 상황은 아니었다.
사실 부작용이 있고 없고를 떠나 불안감이 차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래된 트라우마가 무분별하게 날 공격해 온다.
그러나 지금 그런 것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정말 뭐라도 해야 될 때였다.
결정은 이미 내렸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또 다른 걱정이 들어서 난 자하르에게 물었다.
“자하르, 제가 약을 받으면 누군가에게 보고할 건가요?”
“예.”
“……말하지 않으면 안 되나요?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요.”
“안 됩니다.”
자하르는 칼같이 딱 잘라 말했다.
그에게 이 임무를 맡긴 게 누군진 모르겠지만, 절대 걱정시켜선 안 될 사람이라는 건 분명했다.
때문에 난 어떻게든 자하르를 설득하고 싶었지만, 어림도 없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난 부탁했다.
“그렇다면 되도록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보고해 주세요. 제가 긴장으로 잠을 못 이루어서 주었다고…… 그렇게 간결하게. 그 정도는 괜찮죠?”
“…….”
자하르는 물끄러미 날 바라보았다. 눈은 보이지 않지만 그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반드시 보고하겠다고 하면 내가 포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평소 같았으면 보고가 올라간다는 걸 안 시점에서 없던 일로 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내가 가만히 바라보자 이번엔 자하르가 내 시선을 피했다. 때마침 신호가 바뀌어서, 그는 차를 출발시키며 말했다.
“그간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늘 무뚝뚝하고 칼날 같던 그는 처음으로 무른 태도로 말했다.
“오래전부터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아가씨.”
“……?”
내가 무언가 성공시켰을 때도 아니고, 엉망진창이나 다름없는 지금 자하르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난 이해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