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6화
다시 가방 안에 스마트폰을 집어넣은 나는 고개를 들고 멀리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 저녁에도 오가는 수상택시가 보인다.
세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오기로 했다. 거리로 따지자면 그리 멀지 않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그러니 그녀도 쉽게 오겠다고 말했을 테고.
사실 내게 그녀의 행동을 제약할 자격은 전혀 없었다. 때문에 마음대로 하라고 했지만 사실 내 깊은 어딘가에서 드러나는 본심은…….
“아가씨.”
“예, 빅토르.”
“친구분이 오십니까?”
멍하니 밖을 보고 있자 빅토르가 물었다.
그는 전화를 하던 날 보고 있었다. 영어로 어느 정도 할 줄 아니 오가는 이야기도 전부 들었을 테고, 그사이 내가 짓는 표정이나 태도까지 모두 보았겠지.
전화로만 이야기한 세연도 몰랐을 미묘한 감정 변화도 빅토르는 파악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모든 이야기를 다 해 줄 순 없었다.
“기쁘네요. 이렇게 와 주겠다는 친구가 있어서.”
“……그렇습니까?”
빅토르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날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경호원으로서 그는 날 지키려 할 때 종종 저런 표정을 한다.
“혹시 연주회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실까 걱정하시는…….”
“아뇨.”
하지만 난 짧고 단호하게 그의 걱정을 끊어냈다.
이미 결정된 일에 대해선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 난 회피할 수 없는 상황을 억지로 피하려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늘 피해 다니고만 있을 수 없다는 게 운명론자로서 내 지론이기도 했고.
마주한 상황에서 최선의 결정을 이끌어낼 필요가 있었다. 난 다시 한번 다잡은 마음을 확인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제 우선순위를 흐트러뜨리진 못해요.”
“우선순위라 하심은……?”
“연주회가 첫 번째죠.”
일주일 남은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마치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모든 것이 끝난 뒤,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겼을 때 할 수 있다면 교수님과 짧게나마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다. 지금처럼 가슴이 아프거나 숨이 막히는 일 없이, 특별하지 않게 그저 약간의 흥미를 느끼며 자연스레 대할 수 있을 정도면 한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게 되기까지 어떻게 심적 준비를 해야 할진 잘 모르겠지만, 지금 두 번쯤 만나고 나니 벌써 조금 괜찮아졌다. 세 번째는 더 괜찮을 테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일단 내 앞에 닥친 일이나 잘 해내기로 모든 걸 단순화시키고 있는데, 빅토르가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아닙니다. 아가씨.”
“……?”
난 살짝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그가 내 의견에 이렇게 단호하게 반대한 적이 있었나?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빅토르는 컵 끄트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아가씨 본인이 첫 번째죠.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건 절대 바뀌어선 안 됩니다.”
저지른 일이 많은 나는 그가 불만스럽게 말해도 전혀 반박할 수 없었다. 늘 고생이었지. 결국 난 웃으면서 인정했다.
“아하하, 맞아요. 빅토르.”
“아신다면 됐습니다.”
“묘하게 말씀이 뾰족하신데요?”
“걱정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걱정이.”
“후후.”
홀에서 일찍 돌아오자마자 잠들어 있었던 일 때문에 안 그래도 신경 쓰이나 보다.
오늘 같은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다. 난 빅토르를 보면서 오늘 일은 없던 일로 잊어버리기로 했다.
하지만 전부 없던 일로 하기에, 저녁 바다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
약속된 시간에 항구로 나가니 커다란 여객선 한 대가 들어와 있었다.
난 스테이션 안에서 입국 절차를 밟아 들어오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꽤 많은 사람들이 저 배를 통해 들어온 듯했다.
한참을 보고 있자니 곧 자그마한 키에 호기심 많은 귀여운 얼굴을 한 낯익은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임세연이었다.
티셔츠에 린넨 카디건, 데님 바지 차림의 그녀는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있음에도 힘든 기색 하나 보이지 않고 에너지가 넘쳤다.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듯하던 세연은 내 쪽을 바라보더니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거기에 응해 작게 손을 흔들고는 그쪽으로 향했다.
“안녕! 타티아나.”
“어서 오세요.”
가볍게 포옹하며 러시아어로 인사를 주고받은 우리는 곧 자연스럽게 영어로 말을 바꾸었다. 세연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마중 나와 줘서 고마워.}
{저야말로, 이렇게 와 주셔서 고마워요.}
지금은 세연이 내 연주회를 보러 와 준 상황이었다. 고마워해야 하는 건 전적으로 내 쪽이었다.
{오랜만이야. 그치.}
{저번 뵈었던 게…… 그렇네요.}
그녀와 연락은 자주 나누었지만 마지막으로 본 건 저번 봄이었다. 내 리사이틀에 초대했었던 때였다.
그러고 보니 콩쿠르나 연주회 일로 러시아에 왔을 때만 본 셈이었다.
하지만 이유가 어쨌든 세연은 정말로 반가워했다. 그늘 하나 없는 맑은 웃음이 내게로 향한다.
{이렇게 보니 좋네! 정말로.}
{저도 그래요. 오시는 길 불편하진 않으셨나요?}
{응? 전혀.}
{배로 오실 줄은 몰라서…….}
세연이 갑자기 오기로 결정했을 때, 내가 크게 난색을 표하지 않았던 건 한국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의 거리가 굉장히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비행기를 탄다면 2시간 30분 정도. 물론 비행기 티켓값이 비싸긴 하지만 시간만 놓고 본다면 큰 부담 없는 거리다.
그러나 비행기는 아무 때나 타고 싶을 때 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문제가 있었다.
{전화하고 나서 바로 다음날 비행기편을 알아보니까 직항이 없고 두 번이나 경유해야 하는 노선밖에 없지 뭐야? 40시간씩 가라 하더라고. 어이없어.}
{40시간요?}
그런 경유 노선이라면 사실상 비행기편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처럼 전용기를 쓸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비행기 예약은 하루이틀 만에 뚝딱 할 수 없었다. 운 좋게 취소 티켓을 구할 수 있다면 가능하기도 하겠지만.
하지만 세연은 결국 확실한 방법을 택한 듯했다.
{그다음 날이나 다다음날도 비슷했고, 그래서 그냥 배로 왔어. 바로 있더라고?}
배편도 20시간은 걸린다. 결코 짧지도 않고 힘들기도 힘들었을 텐데, 세연은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어릴 때 말고는 배 타 본 적 없었는데 재미있는 경험이기도 했어.}
이런 긍정적인 모습은 천성인 걸까. 난 호기심 많고 진취적인 그녀의 성격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내게 관심을 마구 표할 땐 조금 난감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것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녀가 다가와 주지 않았다면 난 오로지 밀쳐내기만 했을 테니까.
지금은 그럭저럭 편하게 그녀를 대할 수 있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행이에요.}
세연은 기분 좋게 웃더니 캐리어를 자기 옆에 탁 세우곤 시간을 확인했다.
{아무튼…… 오늘도 리허설 있다고 했지?}
{예. 오후 2시부터 시작해요.}
{그럼 오전에만 시간 내줘, 그리고 점심까지만 같이 먹자. 오후엔 방해 안 할게.}
같은 연주자로서 세연도 내가 어떤 상황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방해라는 표현까지 쓰는 걸 보면서 난 살짝 미안해졌다. 전화상으로 이야기할 때도 그녀는 굉장히 조심스러워하면서 내 허락을 구하기도 했다.
그동안 내가 그녀를 상당히 경계하듯 대한 건 사실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앞으로도 어느 정도는 그럴 테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안함을 느끼지 않을 순 없었다. 그녀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면 알수록 더더욱.
약간의 사죄를 담아서, 리허설 전까진 그녀를 우선해 주기로 하며 물었다.
{어딘가 가 보고 싶으셨던 곳 있으시나요?}
{어…… 글쎄? 별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네가 추천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아.}
{…….}
세연은 내가 잘 알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난 모스크바가 아닌 다른 도시들을 잘 모른다.
블라디보스토크도 온 지 며칠이나 되었지만 관광이라곤 해변공원에 가 본 게 전부라서 무엇이 있는지도 잘 모른다. 애초에 알아보려 한 적도 없었고.
{저도 사실 이 도시에 관광 목적으로 온 게 아니라…….}
{아, 그렇겠네…….}
{미안해요.}
{아니야. 나도 내가 살던 곳 말고 다른 도시를 안내해 달라고 하면 전혀 못 할 거야. 심지어 러시아는 더 넓기도 하니까.}
내가 난감해하는 이유를 십분 이해한다는 듯 세연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그럼 지금부터 알아보자며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사실 블라디보스토크는 그렇게까지 큰 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알아보면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우리가 직접 찾아보기 전에, 옆에 서 있던 빅토르가 가볍게 추천해 주었다.
“박물관은 어떻습니까? 그리 멀지 않은데.”
“그럴까요?”
우린 딱히 반대하고 가고 싶은 곳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의 추천에 따르기로 했다.
빅토르가 차로 데려다준 곳은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중간에 있는 아르세니예프 극동 역사박물관이었다.
{와, 이런 건 처음 봐.}
{저도 그래요.}
겉보기엔 그렇게 화려하거나 크지도 않고 자그마한 역사박물관 같아 보였지만 생각보다 정말 볼 것이 많았다.
1884년 지어진 이곳은 유명한 과학자인 아르세니예프 블라디미르 클라브디예비치의 이름을 딴 박물관이었는데, 이곳 러시아 동부에 살던 여러 원주민들의 문화나 유물 등을 많이 전시하고 있었다.
{이거 정말 특이하다. 화난 사람을 표현한 걸까? 먹을 것 빼앗긴 것 같기도 한데.}
{그런 걸까요?}
{응, 여기 봐 봐.}
특히 세연은 모든 전시품들에서 특이하거나 재미난 점을 찾아내는 재능이 있었다. 이건 이래서 재미있고 저건 저래서 귀엽다는 둥 정말 보는 사람도 즐겁게 하는 밝은 천진함이 그녀에겐 있었다.
난 조용히 그 뒤를 따르면서 맞장구만 치는 편이었지만 그녀와 함께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박물관을 어느 정도 돌아보는 데엔 1시간 남짓 정도 걸렸다. 고고학적 전시품들뿐만 아니라 박물관 자체도 하나의 예술품처럼 관리해 놓아서 다 보고 나니까 거대한 하나의 작품을 관람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점심은 어디서 먹을까?}
그대로 대로를 따라 서쪽으로 걸어가면서 세연이 물었다. 난 이대로 근처에 있는 곳이나, 아니면 저번에 빅토르와 갔었던 해산물 레스토랑에 가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 번 간 곳에 두 번 가는 건 실수를 줄이기 위한 좋은 선택이었다. 꽤 괜찮은 곳이었으니까 세연도 마음에 들어 하리라 생각한다. 이번 점심 값 정도는 내가 낼 수도 있을 테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앞서가던 세연이 빙그르 돌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 내게 물었다.
{아, 그런데 있잖아, 타티아나.}
{예.}
{박 교수님이랑 그 후엔 만난 적 없어?}
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야말로 그녀가 이렇게 궁금해하는 이유가 알고 싶었다.
교수님이 내게 흥미를 보이고 있다고 몇 번 말해 준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난 거기에 대해서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평범하게 대했을 뿐이다.
내 각오와 경계는 쉽게 흐트러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세연의 앞에서는.
그리고 교수님 또한 날 보고는 그렇게까지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너무 무관심해서 나도 모르게 세연을 핑계로 붙잡아 버렸을 정도로 담백한 반응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다음엔 내 쇼팽에 대한 문제라든지 음악적인 내용들을 조금 언급하시긴 했지만, 그건 지금까지 내가 해 온 레퍼토리를 한 번 본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유추해 낼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만약 내 음악적 지문이 탄로 났다면 그 정도 반응으로 그치지 않고 조금 더 깊게 캐물어보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난 그 사실에 안심하면서도 조금 가슴이 답답했다.
어쨌든, 내가 대답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인사만 나눈 뒤엔 없어요.}
세연이 여기까지 온 데엔 어떠한 인연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도 있으리라. 그녀는 나와 친하고 싶어 하니까, 교수를 통하면 무언가 도움을 얻을 수 있겠다 생각할지도 모르지.
난 그러한 그녀의 바람을 염두에 두면서 다음 이야기들을 이어 나갔다.
일부러 의식하고 있진 않았지만, 난 그녀가 분명 이런 질문을 해 오리라 예상하고 있었다.